문화+ 흐름
코로나19로 인해 어느 때보다 심한 부침을 겪었던 뮤지컬계가 최근 일상 복귀 추세와 함께 점점 활기를 되찾고 있다. 지난 2년간 대형 라이선스 작품들이 주도했던 라인업도 올해는 창작 뮤지컬들이 대거 가세하며 이전의 균형을 회복하고 있다. 특히 오랜 개발 과정을 거쳐 완성도를 끌어올린 신작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눈길을 끈다. 이와 함께 뮤지컬 무대에 양질의 창작 뮤지컬을 꾸준히 공급하는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의 역할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약진하는 창작뮤지컬의 공통점
올초 열린 제6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대상은 2019년 토니상 작품상과 그래미 어워즈 최고 뮤지컬 앨범상에 빛나는 라이선스 뮤지컬 〈하데스타운〉에 돌아갔다. 이 작품은 이날 남자 주연상과 여자 조연상까지 거머쥐며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서는 대상작인 〈하데스타운〉 못지않게 시선을 끈 두 작품이 있었다. 바로 작품상을 가져간 〈레드북〉(400석 이상)과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400석 이하)였다. 작품상을 비롯해 각각 4관왕과 3관왕을 차지한 두 창작 뮤지컬은 굵직한 라이선스 뮤지컬들을 제치고 이날의 진정한 주연이 됐다.
〈레드북〉 ⓒ아떼오드 |
주목할 것은 두 작품 모두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 프로그램은 뮤지컬의 제작부터 유통까지 단계별로 지원하는 사업이다. 2015년 우란문화재단의 시야 플랫폼(현 ‘우란 이상’)에서 개발된 〈레드북〉은 2016년 창작산실 ‘올해의 작품’을 거쳐 이듬해 트라이아웃 공연을 선보였다. 이후 2018년 초연 무대를 올리며 순조로운 발전 단계를 거쳤다. 가장 보수적이었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도색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와 융통성 없는 신사의 로맨스를 탄탄한 여성 서사로 그려내 눈길을 끌었다. 제15회 차범석희곡상에서 뮤지컬 극본 부문 당선작의 영예도 얻어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수작으로 인정받았다.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 ⓒ㈜랑 |
반면 〈쿠로이 저택엔 누가 살고 있을까?〉의 시작은 2018년 충무아트센터의 스토리작가 데뷔 프로그램인 ‘뮤지컬 하우스 블랙앤블루’였다. 개성 있는 소재와 빠른 호흡의 코미디로 주목받은 이 작품은 2020년에 창작산실에서도 올해의 신작에 선정돼 일찌감치 웰메이드 창작뮤지컬의 가능성을 알린 바 있다. 일제 강점기에 희망을 잃어버린 남자와 성불을 간절히 바라는 지박령, 각자의 소망을 가진 원귀들이 쿠로이 저택이라는 폐가에서 벌이는 소동극은 지난해 초연과 재연을 몇 달 차이로 잇따라 성사시킬 만큼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배출한 웰메이드 뮤지컬들의 활약은 올해 갑자기 대두된 것이 아니다. 한국뮤지컬어워즈만 해도 몇 해째 인큐베이터 출신작들이 주요 상을 휩쓸고 있다. 당장 지난해 제5회 행사에서 5관왕을 차지한 〈마리 퀴리〉, 그에 앞서 제4회 행사에서 무려 8관왕을 독식한 〈호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도 ㈜라이브의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와 창작산실 등을 거쳐 영예의 단상에 올랐다. 비단 수상작들이 아니어도 최근 몇 년간 높은 완성도로 주목받은 창작 뮤지컬들은 대부분 인큐베이팅 사업의 수혜작들이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아랑가〉(이상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를 비롯해 〈명동 로망스〉, 〈난쟁이들〉(이상 충무아트센터 ‘뮤지컬 하우스 블랙앤블루’),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레드북〉, 〈어쩌면 해피엔딩〉(이상 우란문화재단 ‘우란 이상’) 등은 이제 창작뮤지컬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했다.
창작뮤지컬 성장의 밑거름,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이런 흐름은 올해 라인업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3월 개막 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프리다〉와 〈렛미플라이〉 역시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낳은 창작 뮤지컬이다. 2020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에서 창작뮤지컬상을 받은 〈프리다〉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로 입지를 다진 EMK뮤지컬컴퍼니가 처음으로 선보인 중소형 창작 뮤지컬로 기대를 모았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한 〈렛미플라이〉는 2018년 우란문화재단의 ‘우란 이상’ 선정작이다. 약 2년간 대본과 음악 개발 과정을 거친 이 작품은 2020년 트라이아웃 공연에 이어 올해 데뷔 무대를 치렀다. 또 지난해 DIMF 창작뮤지컬 수상작인 〈말리의 어제보다 특별한 오늘〉과 2019년 공모전을 통해 신스웨이브가 개발한 〈페드라〉도 관객들의 높은 관심 속에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프리다〉 ⓒEMK |
〈렛미플라이〉 ⓒ우란문화재단 |
사업의 성격을 감안하면,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출신 작품들의 약진은 특이한 일도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다듬어진 만큼 작품들의 높은 완성도는 관객의 기대나 취향에 대체로 부응한다. 또 수년간 재연 라이선스 작품들에 익숙해졌던 관객에게 초연 창작 뮤지컬은 참신한 매력으로 다가간다. 이런 여건을 통해 창작 지원 사업은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던 초기와 달리 최근에는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다.
공공과 민간 등 운영 주체도 다른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의 등장은 국내 뮤지컬 시장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2000년대부터 덩치를 키워온 한국 뮤지컬 시장은 어느덧 4천억 원대에 육박하는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다만 그동안 시장이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여러 문제점이 발생했다. 해외 무대를 통해 검증된 라이선스 뮤지컬의 흥행력에는 고가의 로열티가 포함돼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타 캐스팅이 필수가 된 것이다. 그와 함께 제작비와 대관료, 각종 인건비의 상승도 불가피했다. 결과적으로 티켓 가격은 매번 높게 매겨졌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돌아갔다.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전체 시장에서 라이선스 뮤지컬의 비중을 줄이는 것, 즉 양질의 국내 창작뮤지컬을 공급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공연예술 창작산실 포스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이에 대한 제도적 대응은 2008년에 시작됐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의 새 정부 문화정책과 함께 출발한 ‘창작팩토리’(현 창작산실)가 그것이다. 이는 지원작이 레퍼토리 공연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대본 개발부터 시범공연(리딩공연 또는 쇼케이스), 본 공연, 재공연까지 단계별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현재 창작산실은 연극, 무용, 전통 부문까지 확장했지만, 원래 이 사업은 미국 브로드웨이의 작품 개발 과정을 벤치마킹한 것인 만큼 뮤지컬에 특화된 방식이다.
영화와 함께 대표적인 상업예술로 인식되는 뮤지컬에 이처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은 해외에서도 드문 사례다. 문화산업의 관점에서 영화 지원 정책은 이에 대한 좋은 선례가 된다. 1980년 이전까지 ‘방화’로 불리며 비주류 장르에 그쳤던 한국영화는 1990년대 정부의 지원을 통해 산업과 예술의 양면에서 국내외 위상을 끌어올린 바 있다. 뮤지컬에서도 이러한 제도적 지원을 통해 규모와 내실의 성장을 꾀한 것이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의 효시가 됐다.
창작팩토리를 시작으로 창작뮤지컬을 지원하는 사업들이 연이어 생겼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2010년 시작된 CJ문화재단의 ‘크리에이티브 마인즈’다. 민간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뮤지컬 창작 활동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이 사업은 멘토제 등 전문적인 과정을 마련해 이후 등장한 인큐베이팅 프로그램들의 근간이 됐다. 2017년부터는 ‘스테이지업’(Stage Up)으로 사업명을 바꾸고 공연 제작까지 지원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창작뮤지컬의 요람
창작산실과 스테이지업을 필두로 뮤지컬 창작 지원사업은 각 단체별로 다양하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민간 단체인 우란문화재단은 인력 육성은 물론, 콘텐츠 개발과 확장을 목표로 한 사업으로 의미 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단체는 그동안 ‘시야 플랫폼’, ‘시야 스튜디오’, ‘시야 플레이’, ‘시야 스테이지’ 등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프로그램으로 꾸준한 성과를 보여왔다. 특히 각 분야 전문가와 진행하는 특강 및 워크숍을 통해 창작의 원동력을 키우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시야 플랫폼’과 개발 단계부터 리딩, 트라이아웃 공연에 이르기까지 콘텐츠 전 과정을 지원하여 작품을 개발하고 무대화하는 ‘시야 스테이지’가 대표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지금은 ‘시야 플랫폼’과 ‘시야스튜디오’를 ‘우란 이상’으로 묶고, ‘시야 플레이’와 전시 사업이 ‘우란 시선’으로 정리되면서 재정비된 모습이다.
특히 ‘우란 이상’은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을 통해 각 분야 인재들이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직접 실현하는 전 과정을 지원한다. 초기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 작품 개발과 공연 중심으로 지원이 이루어졌다면, 우란 이상은 철저하게 창작자 육성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안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창의인재 동반사업’과 ‘우수크리에이터 발굴 지원사업’도 꾸준한 성과를 보였다. 2012년 시작된 ‘창의인재 동반사업’은 청년 인재의 창작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전문가를 동원한 도제식 멘토링으로 눈길을 끈 프로그램이었다. 콘텐츠 창작자 양성을 목표로 멘토와 멘티를 매칭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포맷을 도입한 것이 충무아트센터의 ‘뮤지컬 하우스 블랙앤블루’였다. ‘블랙앤블루’는 이후 ‘우수 크리에이터 발굴 지원사업’과 ‘스토리 작가 데뷔 프로그램’ 등 지원 방식을 바꿔가며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한편 이즈음부터 창작 지원 사업은 작품 개발이나 창작자 육성을 국내에 국한하지 않고 해외 시장까지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우란문화재단이 배출해 공연마다 매진 사례를 이끄는 〈어쩌면 해피엔딩〉은 2014년 기획과 개발 과정을 거쳐 2015년 리딩 공연과 트라이아웃 공연을 거쳐 2016년 뉴욕에서 리딩 공연을 올리며 세계 무대에서의 가능성까지 검증했다.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 대표 선정작 |
창작 뮤지컬의 해외 진출을 위한 글로벌 크리에이터 발굴을 목표로 하는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민간 제작사 ㈜라이브의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가 그것이다. 이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인정받는 글로컬(Global+Local) 뮤지컬을 기획, 개발해 국내 공연과 함께 해외 진출까지 추진하는 공모전의 형식을 띤다. 심사와 기획 단계부터 해외 관계자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해외 진출과 사업 확대까지 실현한 〈팬레터〉가 좋은 사례다. 쇼케이스와 정식 공연을 통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이 작품은 일본과 대만, 중국 현지 무대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팬레터〉와 함께 글로컬 뮤지컬 라이브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 된 〈마리 퀴리〉도 지난해 일본 방송에 방영되는 한편, 폴란드 무대에 직접 오르며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도모하고 있다.
〈팬레터〉 ⓒ로네뜨 |
〈마리 퀴리〉 폴란드 상영회 포스터 ⓒ㈜라이브 |
다만 이러한 창작 지원 사업이 창작뮤지컬 성장과 발전의 만병통치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업 초반에 한계로 지적됐던 요인 중에는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것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대본이다. 애초에 멘토링을 통해 더 발전시킬 것을 기대한 까닭에, 대본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시놉시스 형태나 트리트먼트 수준에서 출발하는 예가 많다. 이 경우 원래 그 대본이 지니고 있던 개성이 개발 단계에서 휘발돼 전혀 다른 작품으로 변질돼버린다. 결국 이런 작품은 창작자나 멘토, 관객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또 해외 무대까지 염두에 두고 개발하다 보니 서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대거 쏟아지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국내 무대에서 흥행을 좌우하고 있는 라이선스 뮤지컬의 영향이기도 한데, 이런 현상이 이어지면 창작뮤지컬이 우리만의 이야기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K-콘텐츠가 주목받는 것을 돌아보면 창작 뮤지컬 개발 단계에서도 이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송준호
문화 전문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을 전공했다.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치며 문화 예술의 각 분야를 두루 취재했다. 춤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