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작년 6월, 이머시브마켓이 제주시 해안동에서 국내 미디어아트 전시 공연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노형수퍼마켙’을 열었다. 최근 과거를 그리워하는 기성세대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성에 신선함을 느끼는 Z세대에 힘입어 Y2K 패션이 트랜드로 부상하거나 LP구매 비중이 확대되는 등 복고풍 문화를 즐기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제는 신구세대를 겨냥한 ‘복고 마케팅’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머시브마켓 역시 복고 감성을 살리기 위해 과거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퍼마켙’이란 오자 표기를 사용했다. 이름에서 풍기는 레트로한 감성은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물씬 느낄 수 있다.
노형수퍼마켙 입구 |
전시장은 ▲미지의 공간으로 떠나는 시작점 ‘노형수터마켙’, ▲빛을 모두 빨아들인 공간을 안내하는 길 ‘베롱베롱(아롱아롱)’, ▲미지의 공간이 경고하는 듯 다시금 색이 사라진 뿌연 안개 속 공간 ‘뭉테구름(뭉게구름)’, ▲화려한 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와랑와랑(우럭우럭)’, ▲또 다른 재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숨겨진 공간 ‘곱을락(숨바꼭질)’ 등 5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노형수퍼마켙은 기존의 전시와 다르게, 독특한 세계관을 설정하여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전시에 몰입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데 전시를 제대로 즐기려면 이곳의 콘셉트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노형수퍼마켙의 세계관은 이러하다. 오래 전, 두 개의 지구를 잇는 문이 있었다. 이 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첫 번째 지구와 신화, 설화, 상상 속 이야기가 펼쳐지는 두 번째 지구를 연결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문’의 존재를 잊기 시작했고, 모두의 기억 속에서 문은 사라졌다. 두 개의 평행 지구를 다시 연결하는 방법은 이 문, 이른바 ‘포가튼 도어’(The Forgotten Doors)를 다시 찾는 것이다. 그런데 1981년 4월 15일, 노형수퍼마켙에서 ‘포가튼 도어’가 열려 제주의 색을 모두 빨아들인 것이다.
노형수퍼마켙 벽 |
전시장 초입에는 노형수퍼마켙을 둘러싼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 전단지, 광고 등이 부착되어 있다. 기사에는 산책 중에 발견한 문을 열었더니 빛과 음악이 가득했고 또 다른 문을 열고 나왔더니 제주도 ‘노형수퍼마켓’이었다는 통영시에 거주 중인 김주성씨, 색이 사라지는 현상을 포착한 최초 목격자 김 모 씨, 노형수퍼마켙에서 마법의 문을 발견했다는 신아무개씨 등등 포가튼 도어를 체험한 사람들의 생생한 목격담이 담겨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포가튼 도어’를 넘어서면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고 증언한다.
노형수퍼마켙 |
관람객은 전시장 계단을 올라가며 기사를 읽은 후, 첫 번째 테마이자 색깔을 모두 잃어버린 ‘노형수퍼마켙’에 진입하게 된다. 이 공간은 오직 명도로만 구분되는데, 복고풍 감성을 자극하는 불량식품, 달력, 88 올림픽 포스터, 다이얼 전화기, 쥐약 벽보 등이 배치되어 있다. 옛 추억을 떠올릴 때쯤 공간이 암전되면서 오디오에서 “온갖 색이 넘쳐흐르는 미지의 공간과 연결되는 문이 열린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사이키 조명이 아래 ‘포가튼 도어’가 열린다. 관람객은 이제야 문을 넘어 잃어버린 색을 찾는 여정을 떠나게 된다.
베롱베롱 |
두 번째 테마인 ‘베롱베롱’은 미지의 세계가 시작됨을 알려주는 길로써 천장에 매달아 놓은 광섬유에 형형색색의 빛이 투영된다. 이곳을 지나면 천둥소리와 함께 구름으로 뒤덮인 ‘뭉테구름’을, 빛을 향해 가다보면 세계관의 중심에 놓인 ‘와랑와랑’을 마주하게 된다.
와랑와랑 |
약 1200여 평, 6층 건물 층고의 ‘와랑와랑’은 원형 공연장으로 프로젝트 46대와 7.1 채널EWQ 스피커가 설치되어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자아낸다. 서서히 공연장을 푸른빛으로 물들이는 폭포, 위아래로 움직이는 가지각색의 주상절리, 밤하늘을 수놓는 듯 찬란하게 빛나는 천체, 휘날리며 회전하는 알록달록한 꽃잎 등 제주의 자연을 모티브로 한 영상이 약 30분간 상영된다. 관람객은 한자리에 착석해 빛의 움직임을 즐기거나 사방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관람, 사진 찍을 수 있다.
곱을락_대나무숲 |
전시장 백스테이지에 위치한 마지막 테마인 ‘곱을락’에선 숨겨진 공간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눈동자를 움직이는 돌하르방 두 쌍을 지나면 대나무숲이 나오고, 바닥에는 물고기 형상을 한 불빛들이 비친다. 조금만 걸으면,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을 연상케 하는 영상이 투영된 공간이 나온다. 오른쪽 벽면에는 관람객을 감지, 실시간으로 신체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로써 빛을 찾는 모험을 마치게 되는데, 이번 전시는 결국 관람객에게 “Keep Your Color, 어떤 상황 속에 놓이든 나의 색깔을 잃지 마세요”라는 커다란 메시지를 전달한다.
곱을락_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
‘노형수퍼마켙’의 관람 포인트는 360도로 공간을 채우는 화려한 색채, 흑백과 색상의 대비, 레트로한 감성, 일상과 비일상의 공존을 꼽을 수 있다. 곳곳의 전시 공간에 다양한 형식의 미디어아트가 연출되어 다채로운 경험을 즐길 수 있다는 점 역시 색다른 묘미이다.
전시장 내부에 있는 카페 ‘노형다방’에서 흑백의 컨셉에 맞춘 음료와 디저트를 먹을 수 있고, 기념품샵인 ‘노형잡화점’에선 노형수퍼마켙의 패턴이 들어간 기념품을 만날 수 있으니, 한번 쯤 둘러보는 것을 권장한다. 전시의 총관람 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며, 운영시간은 매일 오전 9시 30분~오후 7시까지다.
이슬기
춤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춤현장을 취재하는 〈춤웹진〉 인턴기자. 현대무용과 무용이론을 전공, 현재 관객참여 춤의 특질과 관객성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