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의례와 예술 그리고 광복절에 대한 단상
서정록_춤연구가

의례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참여자들이 집단체험을 공유하고 기억하는 것을 통해 집단 동질성을 형성하는 기능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례란 참여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그 의례 속에 여러가지 형태로 반드시 녹아있어야 하고, 참여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라 하겠다. 그런데 의례 속에 작동하는 기억은 단순히 관념적이고 무형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참여자들 사이에서 형성된 기억은 항상 보존의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 아무리 강렬하다 할지라도 망각이라는 또 다른 작동 원리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그 기억을 보존할 형식화된 장치가 필요하다. 이를 집단적인 측면에서보면 의례로 나타난다. 

 

의례에서 기억을 보존하는 데 흔한 수법은 상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들은 대부분 우리가 예술이라로 부르는 형태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서 기억은 보통 물질적으로 화려하게, 때로는 자극적으로, 그러면서 구체적인 형식으로 고정된 형태가 된다. 소위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여기서 순수예술과 차이는 이러한 상징들이 순수하게 아름다운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징들에 가장 중요한 점은 참여자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우리의 기억을 충분히 되살릴 수 있어야 한는 것이다. 다실 말해서 참여자들이 그 상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의례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이런 점에서 의례와 예술은 그 뿌리가 같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며 한국의 현행 국가 의례들에는 문제가 제법 있는 것 같다. 올해 광복절 경축식의 예를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이번 광복절 경축식은, 대개 국가 의례가 그러하듯, 개식공연, 국민의례, 광복회장의 기념연설,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 대통령 경축사, 경축공연, 만세삼창, 광복절 노래 제창 순으로 진행됐다. 여기서 연설이나 포상 같은 순서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물질적으로 드러나는 상징들인 역사적 순간들을 함께한 '남상락 자수 태극기' '진관사 소장 태극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 '김구 서명문 태극기' '한국 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등 여섯 가지의 태극기는 광복의 의미를 기억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의례 속에 축하 공연이라는 이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과 여러 공연들은 납득할 수 없다. 우선 가장 상징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공간에 대해 살펴보자. 장소로 사용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광복절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장소 선정에 대해 정부는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국민들과 애환을 함께했던 옛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 의미가 이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지닌 개방과 교류 및 소통이라는 미래지향적 가치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디자인 플라자를 보며 몇명의 참여자 즉 국민들이 공감을 할 수 있나?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하였기에 혹 미적으로는 우수할 만하겠으나, 의례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순수예술이 아니다. 한국인 중 누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광복절을 연관을 지어 생각할 수 있을까?

 

다음으로 개식 공연은 “우리나라의 전통악과 서양의 관현악, 그리고 군악이 조화를 이룬 '대취타 易(역)' 연주를 통해 광복의 기쁨을 나타내었고, 행사 내 모든 연주와 공연은 공연자와 악기 편성 등을 통해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개인과 단체의 조화 등 서로 다른 요소들의 어울림과 상생 속에 평화의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동서양의 음악이 만나는 것과 광복의 의미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참여자들이 정부가 소개하는 것처럼 이러한 공연들의 의미를 즉각 알아차릴 수 있는가? 사실 의례와 예술은 그 내용과 형식만 이해한다면 대부분 즉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광복에 대해 그 의미의 이해와 공유하는 기억은 상당히 뚜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러한 의례 속에 사용되는 공연 즉 상징의 모호함은 오히려 의례 주관자들의 의례와 예술의 몰이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대부분의 참여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번 경축식에서의 압권은 경축공연이었다. 본 공연에는 바로 우리가 관심있어 하는 춤이 중심이었다. 우선 경축공연은 아마도 경축식에서 가장 하일라이트라 할 만한 대통령 경축사와 광복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만세삼창 순서 사이에 위치하여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이번 경축공연의 주제는 '운명, 소명, 사명'이라고 하였는데 “광복을 향해 달려왔던 대한민국의 운명(運命)과 독립운동가들의 소명(召命),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사명(使命)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이제 경축공연의 중심이 된 춤 공연을 살펴보면 바로 의례와 예술에 몰이해하다는 생각에 확신이 든다. 먼저 미적인 것을 일차적으로 목적한 공연이 아니라는 점에서, 춤 동작, 춤 구성, 무용수의 춤 테크닉과 같은 것에 대해 미적으로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공연이 의례 가운데 등장한다는 점에 심각성이 있다. 일례로 춤 작품의 시작에서부터 이러한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시작 부분에 사용된 음악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음악인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 잘 아는 곡이라고 이 노래를 통해 과연 참여자들이 광복의 의미를 즉시 기억할 수 있을까? 도대체 왜 이 곡이 사용된 것일까? 이탈리아어로 붙여진 곡의 의미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환상 속에서’라는 뜻인데, 이것은 광복절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 이유에 대해 한번 추정해 보자. 이 곡은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가 작곡한 것으로1986년 개봉한 영화 <미션>(The Mission)의 OST 중 하나인데, 영화에서는 남미의 원주민 선교사인 가브리엘이 연주하였다고 하여서 '가브리엘의 오보에 (Gabriel's Oboe)'라 부른다.  여기에 1998년 작사가 키아라 페르라우(Chiara Ferraù)가 작사한 이탈리아어 가사를 붙인 것이 우리가 아는 ‘넬라 판타지아’이다. 우선 여기까지에서 우리는 광복절과 이 곡은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참여자들의 기억을 저장할만지 않고 때문에 이 곡과 이 곡에 맞춘 춤이 참여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이 곡이 유명하게 된 배경에는 영화 <미션>이 있다. 이 영화는 남미의 원주민을 선교하는 과정에서 겪는 사건들을 선교사들의 시선에서 담아내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사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은 사실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바로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바라본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곡을 사용하였을까? 이를 상기하자는 의도도 이 곡을 사용하였다면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설마 이 곡의 작곡가인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가 올해 작고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보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이긴 하다. 이도 저도 아니면, 한국의 대중들이 잘 아는 곡을 사용하였다는 결론 이외에는 딱히 찾을 만한 것이 없다. 이를 좋게 해석하여, '여민동락'(與民同樂) 쯤으로 볼 수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단언컨대 이는 ‘광복절’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그래서 실로 무책임하다. 

 

이러한 국가 의례에 관한 의문들은 올해 광복절 기념식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행해지는 국가 의례는 거의 대부분 이런 식이다. 국가 기념일에는 모든 공중파 방송이 생중계하여 참여자 즉 국민의 참여를 유도한다. 그렇지만 과연 이를 눈여겨 시청하는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특히 축하 공연을 보며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공감하는 국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참여자들이 기억을 충분히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의례는 국가 정체성과 소속감에 상당히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2017년 5·18 기념식에서 유가족이 대통령의 품에 안겨 눈물을 쏟는 장면을 보면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눈물을 흘리며 공감했을 경우가 바로 그 예이다. 

 

국가 의례가 일반 국민들에게 소위 ‘예술’이라는 이름 하에 이해 못하는 무엇인가로 표현되는 것은 일종의 협박이며 폭력이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 이를 제작하는 이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낯뜨거운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국가 의례에는 허식보다도 진정성이 우선 담보되어야 한다. 이것은 국가 의례가 단순히 통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가 의례에는 참여자들의 기억이 여러 상징으로 승화되어 공감을 이루는 곳에 바로 예술이 있다. 

 

서정록
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교수. 태국 Mahidol 대학교 국제대학 강사, 국립대만대학교 초빙교수, 런던대학교 SOAS 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한국춤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춤문화 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2020. 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