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2015년도의 일. 어느 학회 발표에서 필자인 나 허트는 서울에서 공공의 공간을 새롭게 활용하는 것을 그 사회적 용도에 비추어 놀이터(noriteo)에 비유한 적이 있다. 발표가 끝나고 저명한 보수 성향의 어느 국내(한국) 사회학자가 다가와서 말씀하시기를 필자가 명백히 틀렸고 필자가 한국에서 놀이터라는 말의 쓰임새를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필자는 이런 식의 약간 오만한 비판이 그가 그야말로 연로하며 완고하고 인색한 한국 사회학자인 때문이라 여겼다.
거리 패션, 거리춤, 한류, 케이팝은 연관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케이팝댄스에 관한 논의를 잠시 미루고, 거리를 한국 또는 서울의 공공 공간 측면에서 필자가 경험하고 관찰한 바를 토대로 생각해본다.
골목으로부터 놀이터에로
그 후로 나는 놀이터(playground)를 나의 작업 모델로 삼았다. 왜냐면 그 학회에서 탁월한 글들을 가득 채워 넣어서 젠체하는 차림새보다는 솔직히 말해 훨씬 나은 그 사회학자와 나눈 이야기 때문에 그런 아이디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동북아시아 쪽에서 순수한 거리 사진의 전설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지 싶은) 거리 사진작가 김기찬은 한국적 정체성의 기반은 골목의 공간 개념에서 발견된다고 말하였다.
공간적으로 말하자면, (1960년대에) 경제개발이 시작되기 전에 한국 어느 골목에나 있었던, 작고 비좁은 판잣집들은 대도시에서 아주 다른 생활 토대를 또렷이 보여주었다. 판자촌 사람들은 옆집에서 저녁 밥짓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옆집 사람들이 무엇으로 다투는지 들을 수 있었고, 성관계를 얼마나 갖는지 알 수 있었고, 애들을 얼마나 세게 때리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거북스럽고 내키지 않게 친밀하였으나 가족적이었다. 서로들 옆집을 알고 있었다. 가족 같은 낯익음에서... 정(情)이라는 것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공간의 정치학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적인 것을 정의하면서 정(연결감 그리고 조건 없는 호의의 복합적 감정)이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일어나는 한국인의 사회생물학적 DNA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감정이라는 것은 보다 큰 사회 구조의 산물이고, 문자 그대로의 구조 그리고 물리적 구조의 산물이다. 즉, 정은 과거나 지금이나 공간의 부산물이다. 아주 좁혀 보아도, 정이라는 것은 일정 부류의 공간 환경 내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나는 놀이터를 유희 공간으로 정의하였다. 한국어에서 터는 땅 위의 현장이나 장소이며 놀이는 유희를 뜻한다.
놀이터를 영어로 거의 완벽하게 번역해낼 쉬운 사례로 play+ground보다 더 나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나는 그 저명한 사회학자가 유희 개념을 아이들이 아닌 연령층에다 적용하는 것을 불편해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른들은 놀이를 하지 않으니까. 아니면 어른들도 놀이를 할까?
공공의 놀이 공간들
어른들도 ‘놀이’를 한다. 그러나 다르게 한다. 아이들은 장난감이나 간단한 게임을 갖고 논다. 어른들은 소비 공간에서 자기 돈만큼 논다. 여가시간에도 놀고, 소비하면서 논다. 이는 (하이퍼)모던의 한국에서 공간이 사회적으로 이용되는 사례의 일부이다.
내가 태어나면서 써온 미국 영어보다 확실히 한국어에서 ‘놀이’의 감(感)이 훨씬 넓다. 왜냐하면 ‘일’(작업, 업무)이 아닌 활동은 늘상 ‘놀이’라고 설명되기 때문이다(친구 만나기, 커피숍에 책 읽으러 가기, TV 시청 같은 것을 할 적에도 놀러 간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의 공공 공간을 사회적 놀이 공간으로 간주할 수 있는 개념의 근거는 폭넓고 풍부하다. 한국사람들이 경제적으로 계산되는 생산적인 작업을 벗어나 행하는 대부분의 일을 미리부터 확고하게 ‘놀이’로 간주한다는 사실에선 특히 그렇다.사실이 그러면,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은 놀이 공간 즉 놀이터로 간주될 수 있는가?
한국 사회학계의 심술궂은 그분을 너그럽게 봐드리는 뜻에서 나는 모래상자 속에서 독특한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들의 놀이와 대개 쇼핑이나 스포츠 같은 소비행위를 통하여 그리고 레저 공간에서 이뤄지는 어른들의 놀이가 똑같지 않다고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놀이이다. 그런 소비자 놀이의 방식들은 빠르게 진행되면서 처음부터 청년층, 놀이, 하위문화에 적대적이었던 한국 사회 압축 성장의 경험을 벗어나 한국이 소비지상주의에 뛰어들 당시의 가마솥 속에서 키워졌다. 그런 방식들은 오늘날 베트남 같은 지역으로 수출되어 현지의 새 환경에서 현지화되어 열렬히 소비되고 있다.
공공 공간의 목적 재설정
공간 면에서, 베트남과 한국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공간 관리 체제나 일 처리 방식 등 경험이 유사하다. 국토 전체가 전쟁에 휘말렸고 경제 발전 단계를 거친 탓으로, 공간의 공공적 이용에 관한 공간 관리 체제는 공산주의 베트남에선 매우 경직되며 한국에선 늘상 질서 준수를 고심한다. 의상 및 행동거지 관련 공식적, 비공식적 규제는 딱딱하게 준수된다. 가령 한국에서 얼마 전까지도 걸으며 먹는 것이나 커플들이 공공 장소에서 버젓이 손잡는 것은 극히 볼썽사나운 일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베트남에서 도시 공간이 공식적인 국가 활동을 위해 유보된 공간으로부터 심지어는 공인되지 않고 (거리 음식 판매처럼) 불법적인 활동 공간으로 역할이 변하는 것은 도시 사회의 규범과 제도가 중요해지는 지표라고 베트남 연구학자 맨디 토마스(Mandy Thomas)는 지적한다. 특히 베트남에서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사람들로 카페가 북적거릴 때.
과거에 베트남에서나 한국에서나 공공 공간은 사적 즐거움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어떤 표준들에 충실해야 하는 진짜로 공동의 공간이었다. 지금 같지 않았다. 지금 공공 공간은 개인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사교적 거품들을 안고 배회할 수 있으며 사회적 규범과 규제가 상대적으로 진공 상태인 텅빈 사교적인 ‘외부 공간’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공공 장소의 공간 관리 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20년 전에 완전히 정상이었을 것이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지붕 밑이 아니라 바깥에서 흡연하는 낯모르는 여자들을 철썩 때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노인이 있을지 모르겠다. 교복 차림의 학생 커플들이 공개적으로 손을 잡는 일을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는데 지금은 버젓이 한다. 오늘날 미혼의 젊은 커플들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버젓이 입을 맞추고 사랑의 감정을 드러낸다.
우연의 일치는 아니겠지만 2015년 11월 신촌 아트레온 CGV에서 있은 PDA의 한 장면 |
용산 CGV에서 계단이 좌석 구실을 한다. 전자 기기에 묶인 오늘날의 새 소비자들을 겨냥한 아주 탐나는 파워 아울렛을 갖추고 여유 있게 이용하도록 유도하는 좌석들이 가장 대담한 이들을 위한 가상 현실을 자랑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
흥미로운 점은 한국사람들이 놀이라 부르는 공간에서 사회화, 하위문화 그리고 여타 사회적 구성물의 다른 형식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진화하는가 하는 점이다.
집단과 사회적 제도로 진화하는 이 모든 놀이는 (최근에 한국에서 퀴어 문화의 표현과 행동주의가 성행하는 데서 찾아지듯이) 권리 개념과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에서 합법화를 찾아내는 사회적으로 촉발된 개인적 행동처럼 사회 속에서 더 큰 문제와 모순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아니면 한국에서 폭발하는 거리 패션 문화의 사례를 들어본다. 실제로 한국에서 거리 패션 문화는 사회적 미디어에서 각광을 받는 커뮤니티로서, 판매자와 문화산업 관계자가 정한 프로그램을 추종하는 나그네들(군중심리로 행동하는 사람) 같은 소비 개념이 아니라 열렬한 패션 팬덤에서 출발해서 창조적인 소비 양태가 두드러지는 커뮤니티이다. 이 모든 것이 ‘놀이’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 공공 공간을 정부 통제의 공간 체제, 심지어는 유교적 행동 규범으로 가득찬 공간으로서 사회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중단되었다.
공공 공간이 놀이 공간으로 되는 경우들이 느는 추세이다. 압축되고 분절된 근대성이 도시에서 유발해온 정신분열적인 공간 환경 안에서 서울사람들이 벌써부터 갖추어 살아간다고 도시사회학자 조명래가 묘사한 ‘유연한 사회성’(flexible sociality)을 감안하는 놀이 공간 말이다.
허나 나는 조명래의 이론에다 다음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서울사람들의 유연한 사회성을 특징짓는 것은 건설되고 지어진 환경 속의 중첩된 차원들만이 아니며 공공 공간의 개인적 활용이 각각의 사람(아니면 커플들)에 따라 아주 폭넓게 달라지기 때문에 각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는 공간의 변화하는 용도에 대해서도 유연해야 한다는 사실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갖춘 커피숍이 비디오 게임방, 그리고 대기 구역에서 사람들이 어슬렁대고 다음 영화를 기다리며 맥주와 와인을 곁들인 맛집 음식을 먹을 동안 어느 방향에서든 시각적 정보를 울려대는 스크린과 뒤섞이는 CGV에 갈 때, 개인들 그리고 커플들이 이런 공간들을 바로 그날 상대를 따라가고 입을 맞추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스마트폰에서 놀이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식에 적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하이퍼모던 공간, 놀이로서의 소비
이제 삐에로 쑈핑에 대해 있는 대로 이야기해야 할 차례다. 기호와 상징이 뒤섞이고 그것들이 지시했던 원본들과는 상관이 없어질 정도로 다시 혼합되는 하이퍼모더니티에 있어 복제의 복제의 복제는 원본과 동일한 것에 관한 것을 향한다.
원본이 더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 실제의 얼굴을 인스타그램과 포토숍을 거쳐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된 이미지와 유사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정상인 것으로 인정되는 행동이 되고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실제 인물을 원본보다 가상적으로 더 잘 재현하는 것과 상호작용한다면, 원본이 디지털로 변경된 복사와 더 같아지도록 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내 얼굴을 SNOW™ 어플에서 케이팝을 따라 성형하지 못할 이유는? 원본의 물신 숭배는 인종, 민족과 같은 낡은 근대적 개념이고 아날로그 시대의 낡은 개념이며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적 충성 서약은 아닌가?
유연한 사회성과 복합적인 양식이 뚜렷한 서울은 그 같은 하이퍼모던 놀이 공간이 된 듯하다. 게다가 소비가 놀이라면, ‘삐에로 쑈핑’으로 알려진 어처구니 없는 소매품의 과장이 심하고 광분하는 공간은 그 궁극의 징후인 것이다.
삐에로 쑈핑은 부끄러움이 없고, 섞지 않아서 진짜이며, 정신적으로 멀쩡한 쇼핑판이다.
그러나 이들 하이퍼모던 놀이 공간을 가장 잘 경험하는 방법은 그 속에 위치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해보는 것이다. 공간이 사용되기로 의도된(그리고 의도되지 않은) 대로 경험하는 것이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굉장한 공간을 실제로 걸어봐야 할 이유는 그렇다. DDP가 멀리서 보이는 모양 때문에 특별한 것은 아니다. DDP는 그 안에서 사회적인 것들을 해보고 그 속에서 움직여 봄으로써 단순하게 터득하는(즉 공감하는) 공간이다. 내가 서울에서 DDP, CGV, 여타 복합 양태의 공간들 속을 떠다니기 시작하면서 참으로 흥미롭게 느끼는 점은 한국사람들이 삐에로 쑈핑이 일본 동키호테 체인의 ‘복제’라는 징계문을 제출하려고 얼마나 시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나의 답은 물음을 겸하여 이러하다. 하이퍼모던 복제와 현지화(glocalization) 시대에 원본을 숭배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케이팝이 서양의 일반적인 소년 소녀 밴드, 랩, 모타운, 잭슨파이브의 스타일링 그외 수많은 것들의 혼합물임에도 그 자체의 대표적 양식이 있다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이마트가 한국에서 최초의 유일한 대형 매점이 아니라는 걸 누가 부인하겠는가? 아주 뽐내는 CGV가 현지화의 성공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C는 CJ 그룹에서 따왔고 GV는 다른 두 제휴사 즉 G는 홍콩의 골든하비스트그룹에서, V는 호주의 빌리지로드쇼에서 따왔으므로 명칭의 부호는 CGV의 세계성(globality)의 흔적과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CJ Golden Village 극장 체인의 글로벌적 구성을 부인할 수 없지만, CGV는 CGV이다. 삐에로 쑈핑이 그런 것처럼. 그러나 핵심적인 질적인 차이는 판별할 수 있다. 문화현장조사, 공간을 관통하며 걷기, 사람들이 땅 위에서 행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기록하기와 같은 작업이 힘을 갖고 중요해지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서울이 그 속을 관통해 보아야 체험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을 토대로 설명되며, 국제상황주의 예술 집단과 심리지리학의 이론가들이 도시 공간과 도시를 실질적으로 알아내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던 점을 단서로도 그렇게 설명될 것이다.
* 국제상황주의: 1950년대 후반부터 15년간 인간의 감성 및 삶을 참여적인 것으로 바꾸기를 시도한 예술 운동으로서 예술과 정치 혁명의 결합을 꾀하였음.(옮긴이 주)
전재: 미디엄닷컴
번역: 김채현
마이클 허트(Michael Hurt)
서울에서 거주하는 사회인류학 연구가. UC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006년에 한국의 거리 패션을 다루는 블로그를 개설한 후 한국의 패션에 관한 영문 서적을 발간한 바 있다. 그동안 한국의 대중 문화 및 거리춤 등을 폭넓게 주목해왔고, 한예종과 경북과학기술원에서 강의한다. 사진작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