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연출가 이지나가 신작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으로 돌아왔다. 이 작품은 스타 연출가의 복귀작이라는 이유로 화제가 됐지만, 제목 앞에 붙은 ‘총체극’이라는 표현이 기대감을 자극했다. 한국에서 총체극은 대개 연기와 음악, 춤, 미술 등 다양한 장르와 각종 무대장치 등을 아우른 실험적인 형식을 가리킨다. 다른 장르 간의 조합이 주는 생경함 때문에 변방에 머물러온 양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지나가 굳이 이 형식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그는 이 작품에서 춤 장면의 비중을 높여 상업극의 냄새를 더 지웠다. 발레리나 김주원을 뮤즈로 삼고 현대무용가 김보라에게 안무를 맡기는 파격을 통해 이지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
해체와 재구성의 무대 실험
지난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3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무대에 오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세종문화회관 산하 9개 예술단이 뭉쳐 올린 음악극 〈극장 앞 독립군〉에서다.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서울시오페라단,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단 등 6개 단체가 무대 양쪽 사선 공간을 채워 음악을 맡았다. 서울시극단, 서울시뮤지컬단, 서울시무용단은 무대 중앙에 나서 극을 이끌었다. 비록 ‘대규모 음악극’이라는 수식이 붙었지만, 춤과 연기, 노래, 국악과 양악, 영상이 쉴 새 없이 교차되는 전개는 일반적인 의미의 총체극이라고 불려도 지나침이 없었다.
흔히 토털 씨어터(Total Theatre)로 번역되는 총체극은 크로스오버(Cross-over)와 연관돼 있다. 주로 재즈나 팝 등 대중문화에서 주로 사용된 이 용어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섞어 창출해낸 장르였다. 공연예술에서는 연극, 음악, 춤, 영상매체의 특성을 모두 동원해 새로운 예술 형식인 ‘토털 크로스오버’로 발전시켰다.
국립극장 〈우루왕〉 |
서울예술단 〈바리〉 |
그동안 국내에서 시도된 총체극들은 주로 관 주도의 공연사업으로 진행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바리데기 설화에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접목한 〈우루왕〉은 국립극장 소속 4개 단체가 참여해 연극과 춤, 창(唱), 뮤지컬을 한데 버무렸다. 장르의 낯선 느낌을 극복하기 위함인지 이 작품은 이후 ‘총체극’ 대신 ‘국악 뮤지컬’이라는 새 타이틀을 붙였다. 가무악(歌舞樂)을 한국식 뮤지컬로 해석해 제작해온 서울예술단은 노래와 춤, 연극을 혼합한 〈바리〉를 선보인 바 있다. 지금은 ‘가무극’의 브랜드화에 성공한 서울예술단은 우리 춤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적 총체극의 가능성을 이미 이 작품에서 확인했다.
한편 영상 기법이 주축이 된 작품도 있었다.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역량을 결집한 〈화선, 김홍도〉는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다양한 방식으로 시각화하는 작품이었다. 반투명막에 투사된 단원의 산수화와 풍속화는 때론 살아 움직이며 다양한 국악 선율과 조화를 이룬다. 한국무용가 국수호의 안무는 그림 속 등장인물을 그대로 현실로 불러내는 사실주의적 춤사위를 무대에 펼쳐냈다.
이런 총체극에서 중요한 것은 각 장르 고유의 특성이 해체되거나 혼합돼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국내에 소개된 총체극들은 대개 크로스오버라는 원래의 취지에 부합하지 못하고 장르의 나열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은 창조적인 역량 없이 시도되는 실험보다 잘 만든 정통극이 여전히 낫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21세기로 불러온 와일드의 예술과 사랑론
총체극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오스카 와일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891년 출간된 이 소설은 환상적인 분위기의 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를 와일드의 재기 넘치는 대사로 풀어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실과 환상의 교차, 살인과 집착, 동성애 등의 묘사 때문에 발표와 동시에 논란을 가져온 문제작이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영화, 연극, 드라마, 춤, 뮤지컬 등으로 여러 차례 각색됐다.
이지나 연출가도 그런 와일드의 매력에 매료된 사람 중 하나다. 2015년에 와일드의 관능적인 비극 『살로메』를 무용극 〈클럽 살로메〉로 옮겼던 그는 이듬해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까지 연출하며 와일드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 뮤지컬 연출 당시 원작을 분석하면서 극 중 배경의 현대화를 떠올렸지만 시대 고증에 충실한 뮤지컬의 특성상 이를 실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예술 춤과 영상 기법 등을 적극 활용하며 전형적인 뮤지컬 양식을 거부해온 그는 이때 이미 총체극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
이 작품이 그동안 나온 총체극과 다른 점은 그 형식 자체가 정체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지나 연출가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연극적 대사나 뮤지컬의 노래가 아니라 춤과 음악, 조명, 영상 같은 특화된 매체로 풀기 위해 총체극을 선택했다. 실제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매끄러운 서사보다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음악과 움직임, 세트와 영상이 두드러질 때가 많다. 이는 무대예술만이 표현할 수 있는 생경함을 통해 공연만의 경쟁력을 획득하려는 연출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곡가, 안무가, 무대미술가 등 각 분야 전문가들과 협업한다는 점에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역시 기존 뮤지컬 작업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은 각 요소를 묶어 장르의 관습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둔다. 이로부터 총체극 특유의 분야 간 컬래버레이션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타락의 척도인 ‘도리안의 초상화’는 작곡가 정재일의 음악과 현대무용가 김보라의 안무로 표현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이 고대 그리스극의 원형에서 착안한 ‘코러스’를 도입한 것이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코러스는 주요 인물들의 주변 캐릭터를 맡는 한편, 서사 전개를 위한 대사를 하거나 주인공들의 심리를 춤과 노래로 보완하는 기능으로 다양한 재미를 불어넣는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
이 작품은 온통 실험적인 요소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상업극’으로서 예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이지나 연출가는 〈바람의 나라〉와 〈잃어버린 얼굴 1895〉, 〈더 데빌〉을 연출하면서 이런 실험적인 작품에서 균형을 이루는 노하우를 알고 있다. 젠더 프리 캐스팅도 그중 하나다. 원작의 도리안 그레이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제이드’ 역은 발레리나 김주원과 배우 문유강이 맡아 역시 남녀 배우가 함께 맡은 유진 역과 동성, 이성의 조합을 이룬다. 각각의 조합이 빚어내는 다양한 인상은 관객에게 유연한 선택지를 제공하며 총체극의 낯선 냄새를 조금씩 지워내고 있다.
안무가 김보라 인터뷰
이번 작업 전부터 이지나 연출가와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예전에 뮤지컬 〈라카지〉 초연에 출연한 이후로 꾸준히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만날 때마다 동시대 예술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번에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창작진으로 처음 작업하게 됐다.
총체극은 창작진에게도 생소한 장르인데, 처음에 어떤 작품이라고 설명을 들었나.
컬래버레이션 작업은 현대무용에서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이 작품은 이지나 연출가가 그리려는 모습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극 안무가 처음이라 서사에 대한 이해와 언어의 해석에 시간이 걸리긴 했다. 하지만 워낙 춤을 잘 아는 연출가인지라 스토리텔링보다 이미지텔링에 익숙한 나에 맞춰 소통해주셔서 비교적 순조롭게 작업할 수 있었다.
처음 대본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연극 안무가 처음이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장면 전환이 연극보다는 영화의 몽타주 같은 인상이었다. 장면이 연결되지 않고 컷 단위로 끊어진 느낌이어서 끝까지 봐야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대본으로 볼 때는 어려웠는데 나중에 작업을 진행하면서 보니 그런 장면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안무의 역할이라는 걸 깨달았다.
첫 극 작업인데 춤의 비중이 적지 않은 작품이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나.
현대무용이 관객들한테 자연스럽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 현대무용이 극 안에서 과하게 보이지 않게 노력했다.
이 작품에는 무용가도 있고 춤 문외한도 있다. 이런 격차에서 오는 고충과 재미도 있었겠다.
가령 김주원 배우는 무용계의 전설 같은 분이고 코러스 배우들은 현대무용을 처음 접하는 경우였다. 이런 차이와 관련한 에너지의 조율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있다. 또 코러스 배우들을 지도할 때 장면마다 달라지는 개별 역할들을 내가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정확한 조언이 가능하기 때문에 긴장을 많이 했다. 그래도 연출가와 배우들의 배려를 받고 대화하면서 점점 적응할 수 있었다. 배우들도 처음엔 쑥스러워 했지만 연습을 거듭하면서 어느 순간 춤에 눈을 뜬 것이 보였다. 그럴 땐 보람을 느꼈다.
연출가와 합의된 안무 콘셉트는 무엇이었나.
이 극은 환상이나 마약, 내적 갈등에 관한 묘사가 많은 작품이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가령 환상이나 영감처럼 추상적인 부분을 춤으로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했다. 초상화 장면에서는 초상화를 거는 게 아니라 그 장면이 초상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움직임을 만드는 식이다. 이렇게 연출가의 콘셉트는 명확해서 이해하기 쉬웠는데, 내가 의도한 추상적 안무가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까 하는 점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점차 ‘감’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면서 고수하고 싶었던 포인트가 있었다면.
오브제 사용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가령 마이크로 몸을 두드려서 울림을 주거나 선으로 몸을 감아서 제이드가 파괴되는 상황을 표현하는 안무가 그렇다. 마이크는 누구나 알듯 사회적인 도구다. 하지만 동시에 예술가와 대중 사이에서 스탠드 마이크는 일종의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벽을 부숴야만 내적 갈등이 전달된다는 내러티브가 내 안에 있었다. 마이크로 움직임을 하는 이 장면은 관객들에겐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이것만은 고수하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콘셉트를 무대에 구현한다는 것은 순수예술 하는 사람에게 무척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게 꺾이지 않고 실현한 점은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극 중 인물들 못지않게 연출가의 예술관 또한 단호하고 진보적이다. 본인의 예술관은 어떤가.
지금은 장르 간 경계가 무의미한 시대다. 지금 나뉘어져 있는 예술들도 결국엔 다 한 무대 안에서 만나기 마련이다. 그게 컨템퍼러리 아트인데,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이런 시도가 필요하다. 일단 시도를 하니까 관객들이 보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순수예술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을 선호한다. 누구나 좋아하는 작품보다는 방향성이 확실한 작품이 컨템포러리 아트로 가기 위한 지름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상업극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런 식의 콜라보레이션 작업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지길 바란다.
송준호
문화 전문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을 전공했다.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치며 문화 예술의 각 분야를 두루 취재했다. 춤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