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전기 뮤지컬로 되살아난 천재 예술가들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본 ‘무용의 신’ 〈니진스키〉
송준호_문화칼럼니스트

전설적인 업적을 남긴 위인들의 이야기는 뮤지컬이 좋아하는 소재다. 가령 모차르트나 베토벤, 반 고흐 등 천재 예술가들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한 편의 드라마 같아서 무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전기 뮤지컬은 대부분 음악이나 미술, 문학에 국한돼 있었다. 이 점에서 〈니진스키〉는 처음으로 등장한 무용가 전기 뮤지컬로 눈길을 끈다. 화려한 명성만큼 굴곡진 삶으로 알려진 니진스키의 여정을, 이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무대 위에 풀어낼까.


‘천재’로 박제된 예술가들, ‘사람’에 주목하는 뮤지컬

주로 문학이나 역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창작하는 공연예술에서 예술가들의 천재성과 비극적인 삶은 보장된 재미를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예술가들의 삶은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그 과정에서 ‘고독하고 불행한 천재’의 전형은 다양한 상상력이 가미돼 현대적 인간으로 확장된다. 자신의 일면과 닿아있는 극 중 예술가 캐릭터에 관객이 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 니진스키는 ‘무용의 신’으로 표현될 정도로 무용계에선 ‘전설’로 평가받지만, 대중에는 그 업적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니진스키의 춤 경력은 60년 인생 전반에 걸쳐 이뤄진 것이 아닌, 발레 뤼스 시절을 포함한 10년에 집중돼 있다. 이후 더 이상 춤을 추지 못하게 된 니진스키는 정신병원에서 마지막 30년을 보낸다. 이런 삶은 극적인 데다 공란이 많아서 창작자에게 유리하지만, 이를 전부 아우르려 한다면 자칫 진부한 위인전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때문에 뮤지컬 〈니진스키〉가 천재 무용가의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는 10년에 집중할지, 정신병원에서 보낸 마지막 30년에 초점을 맞출지는 개막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됐다.




뮤지컬 〈니진스키〉 ⓒ쇼플레이




 이전까지 무대에 등장한 예술가 전기 뮤지컬은 그들의 업적과 비극적 운명을 모두 조명하면서도 그 이면에 숨은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까미유 끌로델〉은 시대를 앞서간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의 비극적인 인생에 초점을 맞췄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지독하게 외로운 사랑이 반복되다 혼란스러운 자아를 이기지 못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끌로델의 비극적 운명은 니진스키의 불행한 삶과도 겹쳐진다. 〈모차르트!〉는 모차르트의 업적보다는 인간적인 성장과 자유에 대한 갈망에 무게를 둔다. 그의 천재성에만 관심 있는 주변인물들과의 대립과 갈등은 자연스레 극의 동력이 된다. 특히 내면의 순수함과 천재성을 ‘아마데’라는 아이로 의인화해 그림자처럼 모차르트와 동행하게 한 연출은 인상적이다. 아마데에게 심장을 찔려 죽음을 맞는 결말도 천재성과 삶의 관계에 대한 다른 해석도 가능케 한다.




음악극 〈에릭사티〉 ⓒ안산문화재단




 니진스키와 동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을 다룬 음악극 〈에릭사티〉는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예술가의 진면목을 주목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타임슬립을 통해 19세기 후반으로 온 신인 영화감독은 그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작업과 일상을 직접 체험한다. 특히 디아길레프의 제안으로 장 콕토가 대본을 쓰고, 파블로 피카소가 무대미술을 맡고, 에릭 사티가 작곡을 해 완성한 발레극 〈퍼레이드〉가 이목을 끈다. 무려 10여 분 동안 진행되는 이 극중극은 사티가 자신의 독특한 예술관을 고수해 창작자들 간의 갈등 끝에 탄생했다는 점에서 니진스키의 기질과 연결된다. “나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라는 사티의 대사 역시 시대와 내내 불화했던 니진스키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비극적인 천재 예술가의 전형인 빈센트 반 고흐의 파란만장한 삶도 당연히 뮤지컬로 옮겨졌다. 고흐와 동생 테오의 2인극으로 진행되는 〈빈센트 반 고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기구한 인생 대신 평범한 일상을 무대 위에 재현한다. 이를 통해 그의 기행에 가려졌던 인간적 면모가 떠오르면서 막연하게 느껴지던 인물은 입체적으로 되살아난다.


‘무용의 신’ 또는 ‘인간 니진스키’

니진스키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다양한 장르에서 그를 그려왔다. 영화에서는 루돌프 누레예프 주연의 〈니진스키〉(1970), 허버트 로스 감독의 〈니진스키〉(1980)가 있고, 발레에서는 모리스 베자르 안무의 〈니진스키, 신의 광대〉(1971), 존 노이마이어 안무의 〈니진스키〉(1979)가 있다. 이미지극의 거장 로버트 윌슨은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A Man)〉(2016)에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를 출연시켜 니진스키의 회고를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다만 이는 모두 해외 작품으로, 국내에서 니진스키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룬 뮤지컬은 〈니진스키〉가 처음이다.




로버트 윌슨 〈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A Man)〉




 지난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공연으로 먼저 발표된 이 작품은 이후 제작사 쇼플레이가 1년여 간 수정·보완 작업을 거듭해 발전시킨 것이다. 당시 학생이던 김정민 작가와 성찬경 작곡가는 〈니진스키〉를 있게 한 주축이다. 특히 김정민 작가는 ‘춤을 사랑하는 천재가 춤을 추지 못한 채 30년을 살았다’라는 사실에 사로잡혀 니진스키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가 30년을 살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김 작가는 바로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니진스키의 『일기』를 비롯해 발레 뤼스와 디아길레프, 스트라빈스키에 관한 원서를 주로 참고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니진스키의 삶에 대한 정보가 너무 많아 곤란을 겪기도 했다. “사실이 지닌 무게가 크기 때문에 그밖의 것을 상상하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인물에 관한 상상은 자유롭게 하려 했다.”
 실존인물의 면면을 돋보이게 하는 캐릭터 해석 작업을 통해 니진스키를 비롯해 디아길레프나 스트라빈스키도 입체적인 성격을 갖게 됐다. 광기에 가까운 천재성을 지녔지만 불운한 운명을 떨치지 못하는 니진스키, 그가 발레 뤼스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해준 디아길레프, 음악계의 혁신을 불러일으킨 스트라빈스키의 세 사람을 주축으로, 니진스키의 아내 로몰라까지 실제 모습을 고증해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만으로도 극 전개가 가능하게 됐다.






뮤지컬 〈니진스키〉 ⓒ쇼플레이




 하지만 〈니진스키〉는 어쨌거나 시대를 앞서간 춤의 혁명가에 대한 이야기다. 내용이나 대사뿐 아니라 춤을 통해 그런 혁신성이 표현돼야 뮤지컬의 특성에도 부합된다. 실제로 이 부분은 김 작가가 니진스키를 소재로 뮤지컬을 쓰겠다고 했을 때부터 지적당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물론 니진스키가 클래식 발레 댄서가 아니기에 상징적으로 풀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 무용가의 삶을 뮤지컬 무대에서 풀어내는 덴 어려움과 고민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프리프로덕션과 연습 과정에서 정도영 안무가와 정태영 연출가, 신은경 음악감독 등 베테랑 창작진과의 협업을 통해 적절한 장면들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렇듯 〈니진스키〉는 단순히 한 위인의 삶을 무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으로 재해석한 인물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극 중 니진스키는 더 이상 박제된 천재 무용가가 아니라 희로애락이 있는 한 인간이다. 그런 무대 위 니진스키의 새로운 모습은 디아길레프나 스트라빈스키와 있을 때보다 의외로 아내 로몰라와 함께 있을 때 두드러진다. 로몰라로부터 창작에 대한 자극을 받는 ‘꿈’ 장면에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해 아이처럼 기뻐하는 니진스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정신병이 한창 심해지던 시기의 모습을 다룬 넘버 ‘빛’ 장면에서는 우리와 똑같이 고통받고 두려워하는 평범한 인간 니진스키가 보인다.




뮤지컬 〈니진스키〉 ⓒ쇼플레이




 〈니진스키〉는 세 주요 인물 간의 관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20대의 10년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창작진의 의도대로 ‘인간 니진스키’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부족할 수 있다. 김 작가도 이 점에 동의하면서 “언젠가는 니진스키의 인생 후반부, 즉 그가 춤추지 않은 채 살았던 30년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니진스키〉에서 재해석한 니진스키는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음에도 여전히 춤만을 생각하고 또 추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해석을 통해 그는 현대의 관객에게 어떤 울림을 준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거나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을 위해 노력하고 고생하는 이들을 위한 위로이자 격려다.
 역사 속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29세의 안타까운 나이에 자신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 불운한 천재’로 기술돼 있다. 반면 뮤지컬에서 재탄생한 니진스키는 그런 건조한 기술대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다. 달라지는 자신의 상황에 따라 예술관도 변화하는 인물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나오는 넘버 ‘어디에나’의 가사에도 수많은 굴곡을 겪은 니진스키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다. 여전히 춤과 세상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느껴지는 가사를 통해 〈니진스키〉는 그의 삶이 무용사 속 기술처럼 어둠 속에서 끝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뮤지컬 〈니진스키〉 ⓒ쇼플레이




 흥미로운 것은 니진스키와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실제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번에 〈니진스키〉를 제작한 쇼플레이는 사실 얼마 전부터 예술가들의 삶을 다루는 뮤지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으로 〈니진스키〉가 등장하며 그 프로젝트의 첫 작품으로 가져오게 된 것이다. 쇼플레이는 〈니진스키〉를 시작으로 3년에 걸쳐 1900년대 초 서유럽을 기반으로 활동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연이어 담아낼 계획이다. 더 정확히는 ‘발레 뤼스’를 대표하는 세 명, 니진스키, 디아길레프, 스트라빈스키를 국내 최초로 각각 무대화하는 것이다. 공연 중 공통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사건을 각 인물의 시점으로 풀어내 세 개의 다른 공연이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마치 하나로 연결된 공연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전개할 예정이다. 뮤지컬 〈디아길레프〉와 〈스트라빈스키〉에서 그들이 바라본 니진스키의 또 다른 모습은 벌써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송준호
문화 전문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을 전공했다.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치며 문화 예술의 각 분야를 두루 취재했다. 춤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2019. 07.
사진제공_쇼플레이, 안산문화재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