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역사보다 상상력! 역사 판타지 뮤지컬
전통과 현대 사이 절묘한 외줄타기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송준호_문화칼럼니스트

역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상상력이 가미된 팩션(Faction)이 문화 전방위에서 등장하고 있다. 뮤지컬 무대에서도 역사 판타지가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정통 역사극과 달리 역사 판타지물은 상상력의 힘이 더 크다. 가상의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역시 민중의 모습을 흥미롭게 그려낸 판타지 뮤지컬에 가깝다. 전통음악과 힙합, 시조 랩과 다양한 장르의 현대춤이 뒤섞인 스타일은 진지한 주제와 균형을 이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더웨이브




역사 판타지의 변천사

‘역사 판타지’로 분류된 뮤지컬이 근래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역사’는 창작 뮤지컬에서 늘 인기 있는 소재였다. 1990년대 창작 뮤지컬에서 역사 소재 작품은 무려 40%를 차지했다. 서울시뮤지컬단(당시 시립가무단)과 서울예술단이 이런 흐름을 주도했는데, 정부 기관의 지원을 받아 창단된 까닭에 이들은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역사에서 찾으려고 했다. 두 단체의 작품 외에도 당대에 등장한 역사 뮤지컬들은 대개 전통적인 역사관을 바탕으로 왕이나 영웅, 민중의 삶을 묵직한 주제로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명성황후〉나 〈들풀〉, 〈블루 사이공〉 같은 작품들이 그렇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역사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사실을 기본으로, 그만큼의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 뮤지컬이 그것이다. 고구려 대무신왕 ‘무휼’을 중심으로 초기 고구려의 역사를 재구성한 〈바람의 나라〉, 『난중일기』에 기록되지 않은 이순신 장군의 3일간의 행적을 코믹하게 풀어낸 〈영웅을 기다리며〉가 대표적이다.






가무극 〈바람의 나라〉 ⓒ서울예술단




 특히 〈바람의 나라〉는 팩션 뮤지컬의 명품으로 꼽을 만하다.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재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기존 역사극의 서사와 거리를 뒀다. 원작자인 김진 작가는 만화에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2 대무신왕』 편을 근거로 무휼의 전쟁과 사랑, 아들 ‘호동’과의 관계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재해석했다. 뮤지컬에서는 이런 판타지의 중심에 ‘신수’ 캐릭터가 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네 신수는 각각 무휼, 괴유, 세류, 해명 등 주요 인물이 지향하는 이념과 인물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고대 역사를 환상적으로 복원했다.
 이 작품의 호평에는 안애순의 인상적인 안무도 기여하고 있다. 그는 인물의 내면과 전쟁 장면을 오히려 화려하게 표현함으로써 시각적 재미를 이끌어냈다. 특히 음악과 춤으로만 짜여진 12분간의 전쟁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로 꼽힌다. 춤과 무술을 결합한 안무, 조명과 영상이 춤과 어우러지는 연출은 말 그대로 ‘판타지’의 진수를 보여주며 역사 판타지의 새 장을 열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뮤지컬에서는 전쟁 장면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표현하는 안무가 자주 등장하게 됐다. 이에 따라 안무가와 무술감독의 협업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동시대의 영화나 드라마가 이미 역사의 무게감에서 벗어나 상상력에 집중한 것과는 달리, 뮤지컬은 이때까지도 여전히 〈영웅〉처럼 진지하게 접근법이 주를 이뤘다. 타 장르에 비해 본격적인 산업화가 늦었기 때문에 역사에 대해 새로운 사고로 접근하려는 시도도 동반 지체된 것이다.




뮤지컬 〈영웅〉 ⓒ에이콤




역사와 상상력의 흥미로운 결합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은 조선이 시대적 배경이긴 하지만 특정 시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한때 퓨전 사극에서 자주 쓰인 방식처럼 시대 설정만 빌려오고 가상의 인물들이 사건을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시조가 국가의 이념인 상상의 조선에서 양반이 독점한 시조 활동을 백성 모두에게 허용하게 한다는 내용인데, 이는 민주주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어 흥미를 자극한다. 사실을 토대로 하는 팩션보다는 노골적인 픽션, 즉 판타지에 가깝다.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더웨이브




 이런 ‘역사 판타지’라고 불릴 수 있는 작품들은 2010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선을 보이기 시작했다. 명성황후의 공식적인 사진이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잃어버린 얼굴 1895〉, 허균의 홍길동전 집필 동기를 상상해본 〈균〉, 명성황후와 고종, 순종의 왕실 가족사를 현대의 중산층 가정에 대입한 〈라스트 〈 패밀리〉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 판타지는 기존 정통 역사극이 차지하고 있던 지분을 급격히 잠식해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익히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익숙함과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의 재미가 시너지를 낸 것이다.




뮤지컬 〈라스트 로얄 패밀리〉 ⓒ클립서비스




 사실상 ‘명성황후 새로 읽기’인 〈잃어버린 얼굴 1895〉에서 픽션의 핵심이 되는 것은 근대의 문물이 활발히 유입되던 시대의 산물인 ‘사진’이다.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고 전해지는 고종의 사진은 후대에 전해지고 있지만, 오늘날 명성황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은 대부분 아니라는 검증으로 끝났다. 미스터리로 남은 황후 사진의 존재 여부는 이 작품에서 가상의 인물들과 함께 숨겨진 역사를 상상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판타지를 증폭시킨 건 ‘가무극(歌舞劇)’이라는 형식이었다. ‘뮤지컬’이라는 장르 대신 ‘가무극’이라는 용어를 일관되게 써온 서울예술단은 〈바람의 나라〉 이후 〈잃어버린 얼굴 1895〉를 통해 용어의 뉘앙스를 적확하게 살려냈다. 전통적인 선율의 음악과 한국적 춤사위가 살아있는 안무는 확실히 ‘뮤지컬’과는 또 다른 장르로서의 가무극을 입증했다.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서울예술단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은 〈잃어버린 얼굴 1895〉처럼 가무극을 표방하지는 않아도 노래와 춤, 극의 삼박자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흥겨운 리듬이 귀를 먼저 사로잡는다. 전통음악 특유의 장단에 시조를 랩처럽 내뱉는 모습은 한국식 스웨그(Swag)로 다가온다. 안무도 노래와 잘 어울린다. 가령 시조의 자유화를 목표로 하는 ‘골빈당’ 멤버들이 부르는 넘버 ‘이것이 양반 놀음’은 탈춤의 손짓과 양반걸음을 코믹하게 형상화한 동작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가상의 조선 시대에 충분히 있을 법한 이 춤과 노래들은 역사 판타지에도 설득력을 부여한다.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더웨이브




지금의 시대정신을 담아낸 역사 판타지

조선시대 민중들이 뭉쳐서 자유와 평등을 향한 목소리를 높인 뮤지컬이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이 처음은 아니다. CJ문화재단이 지원한 스테이지업 기획공연 〈판〉은 전기수(傳奇叟)가 등장하는 형식으로 풍자와 코미디를 섞어 관객의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이야기꾼 호태와 달수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극의 양식에선 전통연희를 따르고, 음악은 뮤지컬을 바탕으로 하여 두 장르가 뒤섞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극 중 호태와 달수가 만담처럼 풀어내는 정치와 세태 풍자는 웃음뿐만 아니라 어두운 시대에서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이는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에서 골빈당의 역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뮤지컬 〈판〉 ⓒ정동극장




 지난해 말 공개됐던 〈금란방〉은 〈판〉의 변정주 연출이 ‘전기수’에 ‘금주령’이라는 키워드를 더해 선보인 작품이다. 금주령은 조선의 국가 기본 정책이었지만, 영조 때에는 민간 제사뿐 아니라 종묘제례에서도 술을 금했다. 이 시기에 있었을 법한 밀주방이자 매설방을 배경으로 한 〈금란방〉은 신분, 연령, 성별의 차이를 뛰어넘는 유쾌한 소동극이다. 정신없고 시끄러운 소동의 연속에서 시대를 풍자한다는 점에서 몰리에르식 희극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특정 계층이 독점한 문화 자본과 그것을 향한 민중의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노래하고 춤추는 뮤지컬들의 실험은 고스란히 축적돼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같은 작품으로 이어졌다.




가무극 〈금란방〉 ⓒ서울예술단




 이런 민중의 힘에 집중하고 있는 역사 판타지의 성공 키워드는 ‘현대성’이라는 접점이다. 우진하 연출은 “작은 외침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서 ‘확장’ ‘분출’ ‘파동’ 같은 단어를 떠올리면서 작품을 다듬었다고 말한다. 이런 통찰에서 주목한 것이 현대의 소셜 미디어에 해당하는 시조이다. 백성이 자기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그 시대의 소셜 미디어가 시조라는 설정이다. 시조를 읊을 때 활용되는 부채가 소셜 미디어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확산되는 의미를 담아 사용된 것도 흥미롭다.
 한국무용과 힙합의 혼합도 ‘한국적’ 춤사위의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김은총 안무감독은 전통춤을 중심으로 어반 댄스, 락킹, 비보잉을 하나의 장면에 섞어 활용했는데, 이는 한 가지 춤만 사용했던 기존 역사 판타지 뮤지컬의 안무법과는 다른 행보다. 이런 시도는 역사 판타지에 대해 느낄 수 있는 편견을 깨는 동시에 시각적인 재미도 제공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뒀다.






뮤지컬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 ⓒ더웨이브




 물론 〈스웨그에이지: 외쳐, 조선!〉도 보완할 점이 적지 않다. 작품의 에너지나 가능성에 비해 이야기가 전달되는 방식은 여전히 미숙하다. 가볍지 않은 주제의식에 비해 사건을 따라가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은 충분히 무르익지 않았다. 또 빠른 호흡의 음악은 인물 정서의 변화와 종종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비단 이 작품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성을 강조한 역사 판타지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과제이기도 하다.
 뮤지컬에서 역사 판타지는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것이다.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이나 접근 형식에 따라 허무맹랑한 코미디나 무리한 주제의식이 도출될 수 있다. 실제로도 이제까지 그런 작품들이 적지 않게 등장해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시도들이 역사 속 실존 인물과 사건들을 자유롭게 변주하며 현대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이다.

 

송준호
문화 전문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을 전공했다.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치며 문화 예술의 각 분야를 두루 취재했다. 춤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2019. 08.
사진제공_더웨이브, 서울예술단, 에이콤, 클립서비스, 정동극장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