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특정 종교의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뮤지컬은 ‘종교극’이라는 선입견에 쉽게 부딪힌다. 이런 뮤지컬들은 작품의 완성도가 그 선입견을 극복하면 명작의 반열에 오르지만, 그렇지 못하면 해당 교인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뮤지컬들은 일반 관객들까지 아우를 수 있는 예술적 완성도에 초점을 맞춰 다양한 방식으로 기존 무대 문법을 변주한다. 캐릭터나 음악, 안무 등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성공한 작품들은 시대를 초월해 관객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초연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벤허〉나 9월 초연을 앞두고 있는 〈싯다르타〉는 어떤 접근으로 관객과 만날까.
도발적인 해석으로 발전해온 기독교 뮤지컬
종교 뮤지컬의 계보에서 기독교 성경의 인물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은 국내외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왔다. 대표적으로 〈요셉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Joseph and the Amazing Technicolor Dreamcoat)〉, 〈가스펠(Godspell)〉,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 〈십계(Les Dix)〉 등은 해외에서 명성을 떨친 후 국내에 상륙해 높은 호응을 얻었다. 또 〈마리아 마리아〉나 〈바울〉, 〈마르틴 루터〉 같은 국내 창작 뮤지컬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며 관객의 호평과 함께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
〈어메이징 테크니컬러 드림코트〉 ⓒ라이브앤컴퍼니 |
이 같은 ‘기독교 뮤지컬’ 중에서 재해석의 방향과 캐릭터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단연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다. 이 작품은 1971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파격적인 소재와 캐릭터 해석, 실험적인 음악으로 뮤지컬계에 충격을 주고 사회적인 파장까지 일으켰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의 7일을 유다의 시선으로 그린 이 작품은 기존 성극(聖劇)과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고난을 겪는 예수의 인간적인 갈등을 묘사하고, 유다를 단순한 배신자가 아니라 예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인물로 그린다. 기독교계의 반발을 빚어온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최후의 유혹』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당시 신성 모독 비판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설앤컴퍼니 |
이 작품의 또 다른 혁신은 음악이다.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과 반항으로 점철됐던 1960~1970년대,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파격적인 극의 내용을 이 시대의 정신인 ‘록’으로 표현했다.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선보인 〈가스펠〉 역시 복음서를 소재로 록 음악을 사용했지만, 작품 자체는 전통적 성극에 가까웠다. 반면 로이드 웨버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록’과 ‘오페라’를 결합시켜 극 전체를 성 스루(Sung-through) 형식으로 풀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 ‘록 오페라’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다.
안무는 이 두 요소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파생된 혁신의 결과물이었다. 어쩌면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유다는 성경과 같은 결말을 맞은 후 또 한 번 등장해 여성 팔로워들을 이끌고 멋진 쇼를 보여준다. 현대의 하얀 수트를 입고 하얀 드레스의 댄서들과 함께 춤과 노래를 펼치는 유다의 모습은 기존 인물에 대한 정의를 일거에 해체해버린다. 더 파격적인 것은 헤롯의 군무 장면이다. 자신에게 이송돼온 예수를 맞아 헤롯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광기 어린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내 라이선스 버전에서는 아이돌 배우 조권이 특유의 방정맞고 페미닌한 매력으로 이 역을 소화해 화제를 모았다. 헐벗은 무희들과 호흡을 맞추는 이 장면은 퇴폐적이면서도 경쾌한 움직임을 통해 성서 속 헤롯을 입체적으로 무대 위에 되살린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설앤컴퍼니 |
강렬한 춤과 음악으로 극복한 종교극의 한계
〈벤허〉는 20세기에 여러 차례 개봉된 동명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로마 제국 시대 억압받는 유대인들의 상황을 담은 이 작품은 고대 이집트 치하의 유대인들을 그린 〈십계〉와도 닮은 꼴이다. 다만 종교적인 테마를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십계〉와 달리, 〈벤허〉는 벤허의 삶을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예수와 교차시키며 기독교의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전달한다.
〈벤허〉 ⓒ쇼온컴퍼니 |
뮤지컬 〈벤허〉는 영화의 웅장한 서사와 스펙터클한 배경을 효과적으로 무대에 재현한다. 특히 영화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벤허와 메살라의 전차 경기 장면을 특수 장치와 영상을 동원해 화려하게 구현했다. 회전 무대 위로 각축을 벌이는 두 사람의 대결과 이글거리는 경기장의 화려한 영상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작품이 해외 뮤지컬이라는 오해를 낳게 할 정도였다.
한국 창작 뮤지컬로서 〈벤허〉가 이런 긍정적인 오해를 받은 데는 창작진의 전적과 관계가 있다. 이미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국내 무대를 평정하고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얻은 왕용범 사단은 전작 방식처럼 보편적인 이야기 안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발산하는 뮤지컬 넘버와 안무로 〈벤허〉를 만들었다. 극한의 감정을 압축한 음악과 노래, 이를 표출하는 벤허의 여정에 관객들은 자연스레 동참하게 된다.
〈벤허〉 ⓒ쇼온컴퍼니 |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영웅으로 거듭나는 서사를 위해, 강렬하고 웅장한 넘버와 함께 남성 배우들을 대거 앙상블로 활용했다. 이로 인해 안무도 역동적이고 선 굵은 움직임 위주로 이루어졌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남성 실험체들의 경련하는 듯한 춤으로 깊은 인상을 줬던 문성우 안무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로마 군인들에게 고통받는 유대인들의 피폐한 삶을 몸부림치는 춤으로 표현해 존재감을 보여준다. 창과 방패, 칼을 사용한 역동적인 춤과 함께 거대한 붉은 깃발을 휘두르는 군무는 초연에 이어 이번 공연에서도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이런 강한 일변도로 진행되는 음악과 춤의 진행 속에 종교적 소재에 대한 거부감은 자연스럽게 퇴색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벤허가 골고다로 가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와 만나는 장면은 감동을 자아낸다. 교리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음악과 안무 등 예술적 완성도를 끌어올려 관객들을 감탄시키는 뮤지컬 일반의 문법에 먼저 충실했기 때문이다. 〈벤허〉보다 더 노골적인 기독교 작품인 뮤지컬 〈십계〉도 교훈적인 메시지를 설파하기보다 현대춤과 재즈댄스, 브레이크 댄스가 섞인 감각적인 안무로 관객들을 빠져들게 했다. 결국 종교성과 불가분의 관계인 종교극에서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뮤지컬적 완성도가 전제돼야 하는 것이다.
천천히 대중적 접점 넓히는 불교 뮤지컬
기독교 뮤지컬과는 달리 불교 소재 뮤지컬은 종교성이 강조된 까닭에 제작과 공연의 폭에서 더딘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2000년 이후 〈갓바위〉, 〈원효〉, 〈오! 부처님〉, 〈사명대사〉, 〈천도재 니르바나〉 등이 제작돼 공개됐지만 작품성과 별개로 흥행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물론 의미 있는 실험도 있었다. 산사 스님들의 일상을 신명나는 타악 공연으로 풀어낸 비언어극 〈야단법석〉이 그것이다. 뮤지컬 〈넌센스〉의 불교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공연은 음악을 좋아하는 스님들의 좌충우돌 수행기를 타악 리듬으로 풀어낸다.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법고, 목어, 요령, 죽비, 발우 등과 전통 타악기, 불경에 이르기까지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 리듬을 만들어낸다. 각양각색의 개성을 지닌 스님들이 선무도와 탭댄스, 애크러배틱까지 보여주는 공연은 의외로 흥미진진한 앙상블을 보여줬다.
〈쌍화별곡〉 ⓒ로네뜨 |
하지만 일반 대중까지 아울렀던 뮤지컬은 역시 〈쌍화별곡〉이었다. 안무가 이란영이 직접 연출을 맡은 이 작품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승려 원효와 의상 두 사람의 우정, 요석공주와의 사랑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다뤘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은 2011년 MBC가 주관한 〈원효〉도 있다. 하지만 〈원효〉가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무대 양식에 치중했다면, 〈쌍화별곡〉은 예술적인 완성도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안무가 출신 연출가의 작품답게 안무에 힘이 실은 것이 특징이다. 요소마다 정교한 안무가 등장하는데, 뮤지컬 무대에서는 긴 7분여의 ‘무애가’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로 꼽힌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포교했다는 원효의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진 이 장면은 뮤지컬적 양식과 만나 일반 관객들을 흡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처럼 종교 소재 뮤지컬의 선입견을 깨는 데 주력한 결과는 대중과 평단의 호평으로 이어졌다.
〈싯다르타〉 ⓒ엠에스엠시 |
이번에 선을 보이는 〈싯다르타(The Life of Siddhartha)〉는 부처의 일대기를 극화했지만 뮤지컬로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쌍화별곡〉과 연결된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생애를 다루기 때문에 종교적 색채는 자연히 강할 수밖에 없다. 주변인물들에 대한 재해석의 폭도 제한돼 있기 때문에 현대적 감성의 음악과 안무의 몫이 중요하다. 최인숙 안무가는 싯다르타와 그의 고행을 방해하는 마신 마라의 노래와 춤을 주목하라고 권유한다. 특히 그가 추천하는 장면은 2막 오프닝의 수인(手印) 군무. 〈싯다르타〉의 정수가 담겼다고 할 정도로 이 장면은 불교적 메시지와 뮤지컬의 미적 완성도가 겸비된 장면으로 기대할 만하다.
이제 종교를 소재로 하는 뮤지컬은 단순히 종교적 이슈를 넘어 공연예술의 한 장르로 확장되고 있다. 성경과 불경은 명작 소설보다 오랜 시간 동안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텍스트다. 때문에 동서고금을 통해 다양한 예술적 표현의 대상이 됐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 소재 뮤지컬은 단순히 종교적 의미로 국한하기보다 예술적 영역에서 새롭게 인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개인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이들의 이야기는 영웅 서사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또 세상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성인(聖人)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적극 차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적 인물들의 이야기 역시 선입견을 버리고 본다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작품으로 다가올 것이다.
송준호
문화 전문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을 전공했다.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치며 문화 예술의 각 분야를 두루 취재했다. 춤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