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대부분의 배우들은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현역으로 병역을 이행한다. 연극 분야에선 전국연극제 2위 이상 입상자에게 예술요원 복무 혜택을 주지만 입영 대상 연령인 20대가 이 대회에서 입상하기란 매우 어렵다. 현재까지 이 대회를 통해 병역 특례를 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일부 순수예술에 치중돼 있는 현행 예술요원 제도의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등 관련 법의 전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최근 10년 간 군에서도 배우들이 춤과 노래, 연기를 펼칠 수 있는 무대가 꾸준히 마련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른바 ‘군(軍) 뮤지컬’이 그것이다. 2월 27일부터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공연 중인 〈신흥무관학교〉는 육군본부가 기획한 창작 뮤지컬이다. 물론 ‘군대 뮤지컬’이라는 태생적 한계는 있지만, 현역 입대와 함께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스타 배우들의 출연은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이 같은 군 뮤지컬은 장병들의 대거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현역 복무 중 경력 지속의 기회로도 눈여겨볼 만하다.
군(軍) 뮤지컬의 역사
육군본부가 주최 주관하고 뮤지컬 〈헤드윅〉으로 유명한 공연제작사 쇼노트가 제작한 〈신흥무관학교〉는 지난해 9월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첫 공연을 선보인 바 있다. 육군의 뿌리로 1920년 만주에 세운 독립군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청년과 독립투사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군 뮤지컬인 만큼 작품 내용보다는 스타 배우인 지창욱과 강하늘, 김성규(인피니트 성규)의 출연이 이슈가 됐지만, 개막 후 관객과 평단의 호평까지 이끌어내며 전국 투어도 성공리에 마쳤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가 첫 번째 군 뮤지컬은 아니다. 지난 2008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뮤지컬 제작을 발표한 후 현재까지 총 네 편의 군 창작 뮤지컬이 세상에 나왔다. 최초의 군 뮤지컬은 2008년 선보인 〈마인(MINE)〉이다. 비무장지대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이종명 중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군대가 삶의 전부인 아버지와 자신의 전공인 현대무용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고민하는 아들의 갈등과 화해를 그렸다. 군 제작이라 딱딱한 내용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당시 군 복무 중이었던 안칠현(HOT 강타)과 양동근의 출연과 화려한 비보잉 안무 등 보는 재미가 있었다는 반응이 많았다.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앵콜 공연 포스터 ⓒ육군본부·쇼노트, 뮤지컬 〈MINE〉 포스터 ⓒ육군본부 |
뮤지컬 〈생명의 항해〉 포스터 ⓒ한국뮤지컬협회, 뮤지컬 〈프라미스〉 포스터 ⓒ랑 |
〈마인〉으로 군 뮤지컬의 포문을 연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차기작부터는 한국뮤지컬협회와의 공동 제작으로 행보를 이어갔다. 2010년에는 1950년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을 배경으로 한 〈생명의 항해〉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올렸다. 메러디스호에 탑승해 거제도로 향하는 한 가족의 여정을 그린 이 작품은 이준기, 주지훈, 김다현과 장병 배우들이 극을 이끌었다. 2013년의 〈프라미스〉는 6.25 전쟁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일곱 명의 전우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이 역시 지현우, 김무열, 윤학(초신성), 박정수(슈퍼주니어 이특), 정태우 등이 출연해 일반 관객들의 취향을 노렸다.
〈신흥무관학교〉는 육군본부가 5년 간의 숨고르기 끝에 제작한 뮤지컬로 기대를 모았다. 스타 캐스팅 외에도 이희준 작가, 박정아 작곡가, 오필영 무대 디자이너, 김동연 연출 등 제작진도 화려해 군 뮤지컬로서는 이례적으로 각종 예매 사이트 1위까지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과 안무상 후보에 오르며 작품 완성도에서도 인정받는 뮤지컬이 됐다.
이 같은 소위 ‘군 뮤지컬’들의 특징은 기념사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마인〉은 건군 60주년 기념사업, 〈생명의 항해〉는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프라미스〉 역시 6.25 전쟁 60주년 기념사업 차원에서 제작돼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동맹 60주년이 되는 해에 공연됐다. 〈신흥무관학교〉는 지난해 건군 70주년 기념으로 선보였고, 올해는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공연으로 진행 중이다. 다만 역사적인 사건을 기리는 군 뮤지컬의 취지는 일반적인 뮤지컬로서의 재미보다는 공공 행사의 성격을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방부와 육군본부에서는 민간 제작사와 창작진과의 협업을 꾸준히 이어오며 독자적인 작품성이 있는 공연을 추구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의 청년들 이야기
군 뮤지컬이 일종의 기념행사에 머물지 않고 독립된 뮤지컬 장르로 기능하려면 일관된 애국심의 강조 대신 보편적 삶의 정서가 담긴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신흥무관학교〉는 역사적 사실의 재현과 교훈 전달에 집착하기보다 오늘의 시대정신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를 소개하며 군 뮤지컬로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1907년부터 1920년까지, 국권 피탈의 시국을 배경으로 이회영과 이상룡 등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극적인 삶을 다루면서도 그 시대 청년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며 동시대 관객과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다.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육군본부·쇼노트 |
이런 행보는 육군본부가 2017년 전(全) 장병을 대상으로 소재 공모에 나설 때부터 시작됐다. 군인뿐만 아니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뮤지컬’을 선정 기준으로 삼아, 전 국민의 애국심 고취는 물론 대중에게 소구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의 소재를 찾은 것이다. 그 결과 총 300여 편의 응모 소재 중에서 ‘신흥무관학교’가 낙점됐다. 2019년이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점, 신흥무관학교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지는 중요성에 비해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도 선정의 이유였다.
이후 제작진은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전문가들에게 수차례 자문을 구해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의 핵심은 사건의 나열보다 혼란과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 있었던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었다. 젊은 학생들을 비롯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무관학교를 설립한 선각자들, 조선, 일본, 만주 등 각지에서 찾아온 무관들, 학교가 배출한 수많은 투사 등 평범한 사람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펼치는 것이 〈신흥무관학교〉의 중점 과제였다.
이희준 작가의 생각도 같았다. 오직 한 사람만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여러 구상 끝에 실존 지도자들을 배경에, 무명의 병사들을 이야기의 전경에 배치했다. 그 병사들이 작품의 주인공인 동규, 팔도, 나팔, 혜란이다. 또 하나의 키워드는 ‘학교’다. 원래 가제였던 ‘신흥무관학교’가 몇 가지 대안을 거쳐 제목으로 확정된 것도 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성장하는 이야기의 힘 덕분이다. 이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은 쇼노트의 김영욱, 임양혁, 송한샘 이사는 “‘학교’라는 말의 영역을 공유하는 단어들, 즉 청춘, 우정, 배움, 가르침, 성장, 친구, 고통, 꿈이야말로 이 뮤지컬이 담고자 한 테마였다. 학교에서 배움을 시작하는 아이들은 불완전하고 불안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학교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불안과 연민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그곳이 ‘신흥무관학교’였다”라고 입을 모은다.
학교의 품을 벗어나면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고, 그 선택의 무게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차가운 현실은 오늘날의 청춘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작품 속 청춘들의 선택은 비극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이 납득할 만한 것이기에 깊은 울림을 준다. 어두운 결말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전혀 어둡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계속해서 진화하는 군 뮤지컬
앙코르 공연으로 돌아온 이번 〈신흥무관학교〉는 초연의 장점을 유지하되 새로운 공연장 환경에 맞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성스루 뮤지컬(sung-through musical)을 연상시킬 만큼 음악의 비중이 커졌다. 박정아 작곡가 겸 음악감독은 신흥무관학교의 강한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운드 디자인과 편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암울한 시대와 맞물리는 활기찬 에너지의 음악은 작품에 독특한 색깔을 부여한다. 특히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대한 시위 장면에 등장하는 7분여의 오프닝 곡 ‘죽어도 죽지 않는다’와 독립에 대한 희망과 학생들의 결의를 느낄 수 있는 넘버 ‘가난한 유서’는 작품의 주제를 담은 대표곡이라고 할 만하다.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안무상 후보에 오른 〈신흥무관학교〉의 안무는 작품의 상황과 정서를 대변하는 기능을 한다. 채현원 안무가는 인물들의 열정, 슬픈 역사에 대한 좌절과 분노, 역경을 이기는 결연한 의지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군무로 존재감을 발휘한다. 군 뮤지컬의 특징 중 하나는 현역 장병 배우들의 절도 있고 파워풀한 움직임을 활용한 군무가 반드시 들어간다는 것인데, 이번에는 의병부대, 망명자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마적단으로 무대에 서는 앙상블들이 역동적인 춤으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육군본부·쇼노트 |
현란한 액션이 인상적인 전투 장면 역시 이번 〈신흥무관학교〉의 주요 관람 포인트다. 다른 작품보다 무술의 비중이 높은 이 작품에서 서정주 무술감독은 무대 공간의 특성과 동선, 속도, 인물의 성격까지 고려해 액션 장면을 구성했다. 초반부에 단순한 기초 체력 훈련에만 매진하던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점차 현란하고 세련된 액션을 구사하는 독립군으로 성장하는 연출은 시간의 압축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군무나 단체 액션 장면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함께 연습을 해야 소화할 수 있는 것이기에 장병들의 합숙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첫 번째 군 뮤지컬인 〈마인〉을 시작으로 〈신흥무관학교〉에 이르기까지 장병들은 각각의 부대로부터 파견 형식으로 차출돼 국방부 내 한 공간을 빌려 연습과 공연 일정을 함께한다. 이번 작품도 총 40여 명의 출연진 중 민간 배우 5~6명 외에는 모두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장병이라 이런 과정은 필수였다.
처음에 군 뮤지컬은 그 시기에 복무 중인 스타를 캐스팅해 화제를 모으는 마케팅에 주력했다. 물론 지금도 짧은 머리의 스타들을 한 자리에서 보는 것은 좋은 볼거리임에는 틀림없지만, 군 뮤지컬의 진정한 장점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장병들에게 진로 탐색과 경력 지속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군 복무를 위해 연기를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던 젊은 배우들에게 군 뮤지컬은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다. 또한 이 무대는 아직 유명하진 않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지닌 예비 배우들을 발견하는 장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만약 국방부나 육군본부가 정기적인 창작 시스템을 구축한다면 현역 복무에 대한 배우들의 불안감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이제까지 군 뮤지컬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많은 대중이 알기 쉽게 만든 ‘역사 문화 콘텐츠’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질적인 발전을 거듭한 끝에 군 뮤지컬은 병역과 공연 장르 양쪽에서 유의미한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송준호
문화 전문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무용미학을 전공했다. 주간한국과 한국일보, 더뮤지컬을 거치며 문화 예술의 각 분야를 두루 취재했다. 춤과 공연예술의 다양한 변화를 주시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춤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