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즐겨 먹는 음식이 아니라면 제아무리 이름난 진미라도 몸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자기가 좋아하지 않으면 아무 가치도 없다. 자기 의지대로 좋아하는 음식을 선택해서 삼시 세끼 맛있게 먹는 게 이상적 식사다. 줏대 없이 남들 먹는 대로 마치 짐승이 먹이 받아먹듯 개성 없는 음식으로 매끼 겨우겨우 때우면서 이 중요한 생을 허비해선 안 된다.
• 현대 일본 요리의 원점(原點)을 창조했다는 평을 듣는 로산진(北大路 魯山人)의 말이다. 그의 말을 더 경청해본다.
• 맛에도 등급이 있고 사람마다 타고난 미각도 다르며 나이에 따라 입맛이 달라지기에 어느 맛이 맛있다고 무턱대고 판단내릴 수는 없다. 따라서 누가 맛있다고 했는가, 누가 맛없다고 했는가, 말한 사람에 따라 달리 판단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좋은 미술품과 좋은 음식을 다 분별해내는 것은 아니므로 맛이나 미(美)를 이야기할 때는 누가 한 말인지 잘 간파해야 한다.
• 눈에 보이는 색깔, 코로 맡는 냄새, 혀로 느낀 맛에 따라 음식의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음식을 다루어야 하고, 이런 사람들이 들려주는 음식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 생선회처럼 가공을 적게 해야 하는 요리를 여러 궁리를 해서 이렇게 저렇게 모양만 예쁘게 해서 내놓는 것을 보고 아마추어들은 ‘와,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하고 감동해버린다. 이런 건 보통 맛이 없다. 이 맛없는 요리에 흥미를 느끼고 속아버린다.
• 식품의 원료(식재료)를 가볍게 취급하는 나쁜 버릇을 엄격하게 바로 잡아야 한다. 오늘날처럼 쓸데없이 설탕을 부어 재료의 본맛을 잃게 만들고서는 조금도 돌이켜볼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개탄을 금치 못하겠다. 일본인은 카레라이스, 스튜, 소스까지 전부 다 달게 만들어 버린다. 설탕과 화학조미료를 줏대 없이 사용하는 습관은 마땅히 삼가야 한다.
• 요리의 근본은 식재료를 살리는 데 있다. 모든 식재료는 제각기 독특한 본연의 맛을 갖는다. 이 본연의 맛을 살려야 하고, 정 어렵다면 본연의 맛을 손상시키면 안 된다. 원재료 본연의 맛을 죽이지 않는 일이 요리의 가장 중요한 비결이다. 오이면 오이, 잠두콩이면 잠두콩, 제각기 가지고 태어난 맛이 있다.
• 요즘 요리사 중 쌀밥을 완벽히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지 의심스럽다. 일본 요리에서 쌀밥이야말로 제일 중요한 요리이다. 쌀밥을 제대로 짓지 않으면 모처럼 고생해서 만든 모든 요리가 물거품이 된다. 밥이 맛있느냐 없느냐가 요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도 정작 요리사는 쌀밥이 요리라는 걸 의식하지도 못 한다.
• 로산진, 그는 140년 전(1883년)에 태어나 60년 전(1959년) 세상을 떠난 인물로서 한평생 (일본) 음식을 종횡무진 관찰 연구하였다. 요리는 일반적으로 일정한 조리법으로 만든 메뉴를 지칭하겠으나 여기서 요리라는 것을 음식 일반으로 독해해도 무방하겠다.
• 그는 어려서 어려운 가정 형편에 어느 집에 양자로 갔고 10살도 되기 전에 자기가 밥을 지어 먹었으며 자신이 믿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자는 결심을 굳혔다 한다. 소시 때부터 음식을 골똘히 바라보는 습관이 몸에 배였다. 한참 후에는 음식과 그릇의 밀접한 상관관계에 주목하고 도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생전에 1955년 일본 정부로부터 도예 분야 인간문화재 지정 제안을 받았으나, 깐깐하다 못해 괴팍했던 그는 거절했다고 전해진다.(일본에서 인간문화재 제도는 1954년에 생겼다.)
• 사람들의 입맛은 세상이 그렇듯이 시대와 문명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로산진이 청장년기이던 20세기 전반기 일본은 산업화, 도시화, 서구화로 인해 식생활도 급변했을 것이다. 당시 요리사들이, 로산진 자신의 설명으로는, 갈팡질팡하던 세태 속에서 급기야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음식론이 대부분 엉터리여서, 요리의 개념을 바로 세우는 것이 시급하며, 특히나 망해가는 일본 요리를 구해야 한다고 진단을 내리고선 해결책을 찾아 과감하게 실천에 옮긴다.
• 1921년 회원제 식당 미식구락부(美食俱樂部, 미식 클럽)를 열고 얼마 후 그 식당에서 사용할 식기들을 제작하기 위해 무려 7천평 규모 도기 공방을 세웠으며, 1925년에는 도쿄 중심부 3천평 대지에 일본 요리점 호시가오카사료를 지었다. 이 요리점은 요리의 도리를 실천하는 도장(道場)으로 시작하였고 경영이 유지되는 선 이상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무타협 미식가』는 로산진이 생전에 발표한 글 가운데 일부를 모은 것이다. 5개의 장(미식가의 길, 요리의 본질, 궁극의 진미를 찾아서, 미식이란 음식을 제대로 알고 먹는 것, 오차즈케를 아십니까)으로 구성된 전체 내용은 일본 음식을 기준으로 서술된다. 한국 독자들과는 거리가 있는 글들이 눈에 띄지만, 아무튼 맛의 궁극(窮極)을 찾아내고 보호하려는 그의 태도는 순례자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민물장어, 은어, 복어, 전복, 고등어, 우렁이, 간, 초밥, 참치 등등등 궁극의 진미(珍味)에 소개되는 재료들의 조리법과 맛을 따라 읽는 쏠쏠한 재미가 느껴지는 한편, 시대와 환경과 미각이 다른 우리가 로산진과 흡사한 체험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 우리 주변에서 가정집 음식은 부엌을 떠나는 중이다. 갈수록 음식 조리는 식당과 맛집에 맡겨지고 가서 사 먹거나 주문하는 것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번지고 있다. 이와 함께 먹방, 쿡방이 홍수를 이루는 이면에서 우리의 (조리 솜씨와) 미각이 빠르게 규격화되면서 점차 퇴화(退化)되고 있지 않은가. 퇴화한 미각이 언젠가는 부엌과 결별해 스스로를 아예 맛집에 내맡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무타협 미식가』는 부엌의 회복을 주장하는 책이 아니다. 책은 지금부터 70~80년 전 당대 일본에서 재료 본연의 맛을 잃은 음식을 훌륭한 음식이라 상찬하는 조리사들과 호사가들의 오류를 각성시키고 그런 (고급) 음식업계 풍토를 시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후 일본 사정이 얼마나 호전되었는지 궁금하다.
•『무타협 미식가』를 읽노라면 미식가는 특이(特異) 메뉴를 많이 접한 사람이 아니라 본연의 맛에 대해 안목을 갖춘 사람으로 그 모습이 정리될 것이다. 이런 안목의 사람이라면 부엌일도 즐거울 것 같다. 그의 글들은 맛집이나 특정한 단품 메뉴를 내세우기보다 음식 본연의 맛을 무기로 당대 일본의 미각을 당당히 해부 진단한다.
• 높은 경지(境地)의 안목과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정신, 이 두 가지는 로산진의 글이 지금껏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한 기둥으로 보인다. 그의 글들 깊숙이에는, 비록 음식을 대상으로 한 글들일지라도, 관심 대상들을 견주어가면서 묘사하고 판단하며 다시 전망하는 ‘비평 작업’에 버금가는 센스가 감춰져 있다. 자칫 고급 음식 레시피 모음집 정도로 오인될 『무타협 미식가』에서 그 비평 센스를 찾아보면 어떨까.
• 국내에서 로산진의 저작 2권이 최근 출간되었고, 몇해 전 그의 평전이 출간된 바 있다. 이들 책은 내용이 겹친다. 그중 『무타협 미식가』는 전반부에서 그의 안목과 비평 센스에 따라 음식의 보편적 원리를 터득한 다음에 맛의 본연을 로산진과 함께 상상하는 즐거움을 섭렵하는 순으로 편집되었다.
• 로산진이 말하는 음식들에서 기준은 70~80년전의 일본이므로 오늘의 한국인 식감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 더러 눈에 띈다. 그런 차이가 있는 중에서도, 한일 양국의 일상에서 공통된 두부를 갖고 그가 소개하는 두부 냄비 요리에서 그의 안목과 취향과 두부 맛을 짐작해본다. “두부 냄비 요리인 유도후를 맛있게 만드는 법을 알려주려고 한다. 먼저 냄비 속에 다시마를 잘라 넣고 냄비의 반 이하로 물을 넣는다. 9cm짜리 냄비라면 위의 3cm를 남기고 물을 부은 뒤, 자른 두부를 냄비 아래 1/3 정도 지점까지 부서지지 않게 잘 넣는다. 그리고 그 냄비를 강한 불에 올리고 냄비 뚜껑을 닫는다. 강한 불이라면 5분 정도 지나서 끓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두부를 나무젓가락으로 살짝 눌러보면 가벼운 탄력이 생겨서 하얀 두부 표면이 크림처럼 탱탱하게 알맞게 잘 익었을 것이다. 그 찰나가 맛있다. 너무 익히면 두부가 딱딱해져버리거나, 두부와 두부가 붙어버리거나, 오히려 풀어져버려서 맛이 없어진다. 두부는 한꺼번에 냄비 속에 몽땅 집어넣지 않는 게 좋다. 술안주로 먹을 때는 서너 조각씩 넣고 끓여서 먹는 걸 반복하는 식으로 조금씩 요리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칡 따위를 넣어 두부가 풀어지는 걸 방지하는 대안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이어서 유도후를 만들 때 필요한 준비물로 질냄비, 삼나무젓가락, 망(網)이 붙은 은숟가락, 마른 다시마, 파 · 묵은 생강 갈은 것 · 가다랑어포 등의 양념, 일등품 간장이 예시되었다.)
로산진은 화가, 도예가, 서예가, 칠공예가, 요리사, 미식가. 1883년 교토 출생. 간판 일을 하던 양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재능을 꽃피운다. 21살에 ‘천자문’으로 입상(일본미술협회전)한 후 서예, 전각 분야에서 명성을 얻는다. 그의 도자기, 칠기, 수묵화 등 작품들은 피카소 등에게서 극찬을 받았다 하며 지금도 아주 고가(한 점 당 수천만원 대)에 거래된다.
[➣ 이 책] 란은 국내에서 최근 간행된 신간을 소개하는 란으로서, 서평 형식보다는 〈춤웹진〉 독자들의 독서에 도움이 되도록 해당 신간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압축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