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흐름
서울 탄생기
- 1960~1970년대 문학으로 본 현대도시 서울의 사회사
송은영, 푸른역사, 2018년 11월
오늘의 서울은 언제 시작되었나?
• (1970년대에)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파트로 이사간 ‘나’는 다른 주부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고 닮아가기 시작하였다. 앞집 여자의 집을 구경하고 나니 “나는 꼭 그 여자네 방처럼 꾸미고 싶었다.” “나는 그 여자네 방보다 더 멋있게 꾸미려고 별렀으나 꾸며놓고 보니 가구 배치나 커튼 빛깔까지 비슷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 여자네 방에서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내 기호가 어느 틈에 그 여자를 흉내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박완서 소설 〈닮은 방들〉, 1974)
• 현대도시로서의 서울, 즉 오늘의 서울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1945년 일제 강점기가 끝나던 날부터일까?『서울 탄생기(誕生記)』는 그 시기를 1960~70년대로 잡는다.
• 정도의 차이가 없지 않을지라도, 오늘의 서울 이미지에서는 도시 곳곳의 고층 아파트 단지, 강남과 강북의 대략적 이분법, 차별화된 도시 공간, 가속화된 변화와 경제적 창출의 논리 등이 완연하다. 서울이 이런 이미지의 도시로 방향을 확실히 틀고 자리를 잡아 간 시기는 1960~70년대였다. 이 시기에 서울에서 살던 작가들이 서울을 소재로 발표한 문학(소설들)을 토대로『서울 탄생기』는 당대 서울의 사회사(社會史)를 펼친다.
• 『서울 탄생기』가 다루거나 인용한 소설은 100여 편, 작가는 16인(이호철, 김승옥, 박태순, 신상웅, 최인훈, 하근찬, 손창섭, 이문구, 이청준, 최인호, 조선작, 조해일, 박완서, 윤흥길, 조세희, 최일남)이다. 이 작가들 중에 지금 젊은 세대에겐 낯설 분들이 다수이며, 그들의 작품이 지금 세대 정서에 얼마나 가닿을지 미지수이다. 이제는 구하기도 쉽지 않은 그 작품들을 직접 탐독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대신해서『서울 탄생기』는 당대 서울을 살은 작가들의 생활 체험과 예리한 관찰을 통해 오늘 서울의 문제가 실은 1960~70년대에 비롯된 것임을 구체적으로 예시한다.
• 일제 강점기가 끝난 1년 후 1946년 8월 경성부(京城府)에서 서울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래도 1950~53년 한국전쟁의 혼란기 이후 1962년까지 서울은 인구와 판잣집이 늘은 것 말고 큰 변화는 없었다.
• 5·16군사쿠데타 직후인 1962년에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이 시행되고 1963년에 경기도의 여러 지역을 서울 강남북으로 편입해 들임으로써 서울의 도시 경계는 오늘의 강북과 강남 규모로, 2배 이상 확장되었다. 현대도시 서울의 실제 기점은 바로 그 시기이며,『서울 탄생기』는 서울을 1961~66년(제1부), 1966~72년(제2부), 1972~78년(제3부)의 3시기로 나누어 작가들의 목소리를 모은다.
•『서울 탄생기』제1부(서울, 욕망의 집결지가 되다), 제2부(서울, 개발의 시대를 맞이하다), 제3부(서울, 강남 개발과 중산층의 시대가 도래하다)의 소제목들에서 당대 서울의 실정을 기억해낼 사람도 많을 것이고 서울의 머지않은 과거를 비로소 학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를 사회사 측면에서 정리하면서, 이 책은 개발과 발전 그리고 현대의 미명 아래 서울에서 우리의 삶이 왜곡되고 과거의 역사가 실종되는 추이를 짚어간다.
서울: 욕망의 집결지가 되다
• 빈궁(貧窮)의 시대에 그래도 형편은 서울이 나았고 서울에 기회가 더 있었을 것이므로, 전국 도처의 사람들은 대개는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서울 탄생기』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1960년대부터 30년간 서울로 이주한 사람의 56%가 가족 전체가 함께 도시로 이주한 전가(全家) 이농(離農)이었다. 생계유지, 안정적 돈벌기 같은 경제적 요인이 주된 동기였다. 인구 통계를 보면, 1960년 244만명이던 서울 인구는 1963년 325만명, 1970년 543만명으로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강남은 아직 개발되지도 않았을 때, 지금보다 좁은 강북과 영등포 일원에 그 인구가 모여 살은 때문에 어느 소설은 제목마저 ‘서울은 만원(滿員)’이라는 표현을 붙였다.
• “서울은 만원이지만 대개 나도는 사람은 같은 사람들이다. 아침나절에 명동 입구에서 만나서 반갑게 악수를 나눈 사람들이, 점심때는 무교동 근처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악수는 생략하고 씽긋이 웃기나 하고, 저녁나절에는 또 세종로 근처에서 마주쳐, 피차 종일토록 빌빌거리는 것이 쑥스러워서 슬그머니 외면을 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이호철 소설 〈서울은 만원(滿員)이다〉, 1966)
•『서울 탄생기』가 소개하는 바를 다시 들여다보자. 1960년 서울에서 자기 집에 거주하는 가구는 56.5%였다. 이 수치에는 합법적 정상 주택 이외에 ‘소위 비정상적 구조, 즉 선박, 창고, 판잣집, 천막, 토막, 움막 등의 임시 가건물 또는 불량 무허가 건물 등이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집단적 가거주 시설, 즉 호텔, 하숙이나 병원, 기숙사, 고아원, 양로원, 사찰 등의 공공적 건물과 야영 캠프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가 거주의 34%가 거주 기간이 1년 미만이었고 자가 거주의 51.2%는 단칸방 가구였다. 서울에서 자기 집을 갖지 못하고 ‘월세, 전세 또는 사택, 친척이나 친구 집들에 신세지는 가구 수’는 43.3%였다. 이에 따라 서울에 온 상경민들이 서울 정착민이 될 수 있는 최종 관문은 바로 서울에 자기 집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 “사실 내 경우에 있어서도 힘들었던 것은 바로 서울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다... 방은 내 경우에는 한없이 푸근하고 마음이 놓이고 나아가서는 나의 삶을 시인해주는 어떤 따뜻한 특혜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하숙생활을 해오면서 그러니까 잠정적으로나마 내 방을 소유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간신히 자기가 사람임을 수락하고 있는 듯한 그런 기분에 젖어들곤 하였다.”(박태순 소설 〈서울의 방〉, 1966)
•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괴, 월남민과 상경민의 이주로 1950년대 서울에서는 판잣집이 늘어났다. 빈민들의 판잣집을 철거해서 국공유지로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서울시는 1962~70년에 시내 변두리 20개 지구에 4만 3500가구분의 판잣집 정착촌을 만들었으나 결과적으로 그 몇 배 되는 엄청난 규모로 무허가 건축물의 난립을 유발하였다.
• 작품들에서의 묘사처럼, 1960년대 세태를 그린 문학들에서 서울은 공갈과 협박이 정당한 생존방법처럼 간주되고 통용되며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도덕적 가치도 양보해야 하며 인간 관계도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는 곳으로 조명되곤 하였다.
• “어찌 됐건 전쟁이 끝났고 그 와중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이 기특하고 소중했다... 피곤과 궁핍이 얼룩진 누르탱탱한 얼굴들에서는 아직도 어떤 희망 같은 걸 찾아내기 힘들었으나... 아무 것이나 아구 아구 먹고 체면이나 도사림 같은 건 애시당초 집어던진 채 자신을 곧추 세워야겠다는 탐욕스러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때문에 전쟁 마당을 갓 지나온 사람들의 눈빛에는 아직도 살벌함이 남아 있었다.”(최일남 소설 〈서울의 초상〉, 1983)
• 그러나,『서울 탄생기』가 당시 서울의 세태를 조명하는 대로,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서울에서 적자생존의 혼란은 조금 더 냉혹한 도시적 질서로 변화해간다. 소설들에서 사기와 허풍, 위악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행하는 행태도 더 이상 손쉽게 통용되지 않는다.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사회 체제 속에서 허풍쟁이와 사기꾼들이 살아남을 여지는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서울: 개발의 시대를 맞이하다
• 1962년 시작한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나던 해인 1966년 서울은 자본 성장으로 들썩이며 보릿고개도 끝나가고 고도경제성장 시기가 시작된다. 이후 서울 도처에서 개발과 건설 붐이 들이닥쳤다. 1966년부터 김현옥 시장이 불도저처럼 앞장선 4년 동안 사직터널, 삼청터널, 남산 1·2호 터널, 서울역 고가도로, 청계고가도로, 삼각지입체도로, 강변도로, 북악스카이웨이가 만들어졌고 세운상가가 건설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마포(1962), 동대문(1965), 정동, 공무원, 홍제 등 아파트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판자촌도 계속 늘어났다. 1960년대 후반에도 서울에서 빈민가 판자촌은 흔한 풍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서울시는 도로를 건설하거나 새 아파트나 고층 상업 시설을 짓기 위해 서울 도심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서울 변두리로 추방하였다. 1966년 이후 서울 안에서도 강제 이주가 진행되어 철거민들의 집단 난민촌이 이른바 달동네 같은 이름으로 생겨났다.
•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무허가 집들을 철거한 시 당국은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을 위하여 새로 이 동네를 만들어 증정했던 것이다. 시 당국은 재건토목주식회사에 청부를 맡겨서 날림으로 공영주택을 지었다. 적당히 블로크로 칸을 막아 가면서 닭장 짓듯이 잇달아 지은, 겉으로 보자면 기다란 엉터리 강당 같은 모습이었다.”(박태순 소설 〈정든 땅 언덕 위〉, 1966)
• 1968~72년 사이에 도시빈민들의 집을 철거하고 새 아파트를 만들어 수용한다는 계획으로 시내 곳곳에 좁은 평수의 시민아파트가 산비탈 등지에 집중적으로 지어졌다. 다만 시민아파트는 1970년 마포구의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으로 더 이상 건립되지 않았다.
• 또한 1968년에 서울시는 서울 시내 판잣집 정리 차원에서 경기도 광주군에 위성도시로서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를 조성, 수만 명에게 땅을 유상 분양하고 이주시켰다. 그러나 서울시는 신도시의 기반 시설을 전혀 조성하지도 않았으며 이주민들 사이에서는 입주권 전매 행위가 성행하고 이주민들이 서울로 되돌아가는 등 도시 정책의 무계획성과 졸속성에 항의하여 급기야 1971년에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항의하여 폭동을 동반한 대규모 시위를 벌인 바 있다.
• 작품들에서 묘사되듯이, 개발과 건설의 시대에 고층의 도심 중심과 주변부 사이에 위계화 현상이 나타나고 급조된 양옥에 의해 전통적 한옥 가옥이 초라한 것으로 비치면서 점차 서울은 본래 모습을 잃고 도시 경관이 무역사적이고 무장소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간다. 또한 경제 성장의 열매가 사회적으로 불균등하게 분배되면서 막연히 서울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도 점차 계급 분화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 이를 더 확대해서『서울 탄생기』는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1966년 이후 경제성장과 도시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서울의 현대화는 역사적 흔적과 기억들을 지우는 것으로 첫발을 디뎠고 민족주의를 앞세워 식민지 시기의 건축을 거리낌 없이 파괴했으며 과거의 기억에 의존해 도시를 이해하던 방식은 낡은 것으로 부정되었다. 도시 정책을 담당하던 관료들은 서울에 미국의 현대도시처럼 모더니즘적 고층 건물을 세우고 자동차 중심의 도로체계를 세우는 것이 근대화이자 발전이라고 믿었다.
• “호텔 장식을 맡으면서 준구는 공부를 많이 했다... 그리고 요즈음 짓는 호텔이 어떤 손님을 상대로 짓고 있는가도 알 수 있었다. 관광객이 첫째다. 반드시 관광이 아니라도 외국 손님을 머리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새 아이디어니 민속이니 해도 요는 외국사람에게 먹혀들어갈 것이 기준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최인훈 소설 〈하늘의 다리〉, 1970)
서울: 강남 개발과 중산층의 시대가 도래하다
• 1972년은 정부의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첫 해이며, 1973년 강남 지역이 개발촉진지구로 선정된다. 1972년 서울시는 강남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강북 개발을 제한한 데 더하여 종로구, 중구 등 도심 지역을 재개발지구로 지정해서 이 지역 일대에서 건물의 신축, 개축, 증축을 금지시켰다.
• 1963년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될 당시 강남 지역은 신사리, 압구정리, 학리, 논현리를 묶은 사평동과 삼성리, 청담리, 대치리를 묶은 수도동으로 구성되었고 그 주민수는 6700명 정도였다. 1975년 성동구 일부(사평동과 수도동)가 강남구로 정식 분리되고 1976년 반포, 압구정, 잠실 등 강남 및 여의도 등지에 11개 아파트 지구가 선정되었다. 1977년 하반기부터 서울의 주택 건설은 유례 없이 엄청난 호황을 맞이했고, 1981년에 이르러 신규 주택 가운데 아파트 수가 단독가구 수를 추월하게 된다.
• “거리 옆으로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시원하고 넓은 고속도로 위로 매끈한 차들이 씽씽이며 대전으로, 부산으로 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땅값이 뛰고 있었다. 유난히 질퍽거리다가는 유난히 먼지가 피어오르는 거리로, 납작한 세단들이 소달구지를 피해가면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와서 쑥덕이는 흥정을 하고는 사라져버리곤 했다. 이곳 주민들은 모두 하룻밤 자고 일어날 때마다 뛰어오르는 땅값에 반쯤 혼이 나가서 모두들 앞니 빠진 유아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최인호 소설 〈미개인〉, 1971)
• 『서울 탄생기』는 1970년대의 추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인다. 1970년대 말에 한국 사회는 경제 호황에 따라 중산층 중심의 대중사회에 도달했다는 자신감을 드러낸다. 같은 시기 강남 개발 시대에 부동산 투기가 대중화하고 복부인이 등장하며 강남 8학군이 회자되면서, 한강은 강북과 강남 사이에서 계급과 문화적 차별화 그리고 심지어 ‘위생’의 지리적 분할 경계선이 된다.
• 더 나아가 『서울 탄생기』는 다음의 진단을 덧붙인다. 서울의 변화상 밑바탕에는 1960~70년대에 만들어진 현대성에 대한 지향, 발전주의 이데올로기, 일상과 문화의 아메리카니즘이 뒤섞여 있다. 과거의 모든 것을 뒤엎고 단절하여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도시 서울만큼 현대성을 구현한 도시도 또 없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거부, 단절, 망각의 흐름은 냉전시대 미국 사회를 모델로 삼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려는 의도에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1960~70년대는 서울의 운명이었다
• 70년대에 강북의 도심 재개발, 판자촌 철거, 강남의 개발은 일상적이었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그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존과 편의가 크게 고려되지 않은 사실을『서울 탄생기』는 작가들의 목소리를 빌어 들추어 보인다. 작가들은 서구의 미디어와 관광객의 시선,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 따른 시선, 서구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갖게 된 내부인의 시선을 중심으로 서울이 개발되던 아주 불편한 진실에 대해 메스를 들이대었다.
• 또한, 작품들에 따르면, 관료와 정책가들이 상상한 도시 모델을 서울 도시 공간에다 구현하는 과정에서 공적(公的) 폭력이 횡행하였다. 서울로 무작정 이주한 사람들의 판잣집은 불량주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철거되었다.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은 대규모로 집단 추방되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다수가 아직도 보도로 접할 수 있거나 체감하듯이,『서울 탄생기』가 정리하는 대로 폭력적인 강제 철거 방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기보다 1980년대에 합동재개발제도의 도입 이후 더욱 잔혹하게 변해갔다. 다시 말해, 폭력은 모습을 바꾸고선 폭력이 아니라 강변할 테지만, 그것이 위장 폭력에 불과한 것임을 지금도 웬만하면 다 아는 일이다.
• 당시, 특히 70년대부터 지금껏 서울의 도시 공간에서 벌어진 문제들이 오직 국가의 발전주의 정책과 식민주의적 사고방식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여전히 회피할 수 없는 물음이다. 당시 작가들의 목소리를 다시 모아보면 서울 전체가 개발과 발전의 광풍에 휘둘리고 어설픈 현대를 동경하면서 정체성의 혼돈을 심하게 겪은 느낌이다. 제 앞가림하기에 급급한 이런 시기에는 남 탓으로 돌리기가 예사다. 그러나 이 시기 서울 정착에 성공하여 서울 사람이 되는 데 성공한 사람들도 얼마간 그 정책과 사고방식의 동조자(同調者)이자 공범자(共犯者)였음을『서울 탄생기』는 환기한다.
• 우리가 살고 있거나 알고 있거나 가보았거나 익히 들어보았을 서울의 무수한 동네들을 1960년대 이래 정책과 세파와 욕망에 휩쓸린 지명들로 예거(例擧)하고 통계치에 근거를 둔『서울 탄생기』는, 다시 언급하건대, 작가들의 구체적인 묘사와 진단을 토대로 오늘 서울에 내재한 문제들이 정확히 1960~70년대부터, 즉 지난 40~50년 동안 누적된 결과라고 밝힌다.
• 근거 자료에 바탕을 두고 서술된 사회사가 드러내는 1960~70년대 현대도시 서울은 꿈은커녕 낭만을 앞세우기 어려운 도시다. 욕망과 개발이 최대 화두였던 현대 서울에서 꿈과 낭만을 뒷전으로 밀쳐낸 무수한 부조리를『서울 탄생기』에서 읽는다. 그 부조리를 알 만큼 아는 이제, 그러면 서울은 새로이 탄생하고 있는가.
저자 송은영은 문학연구가로서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학술연구교수이다. 도시문화, 청년문화, 대중사회와 대중문화, 대항지식의 체계 등을 연구해왔다.
[➣ 이 책] 란은 국내에서 최근 간행된 신간을 소개하는 란으로서, 서평 형식보다는 〈춤웹진〉 독자들의 독서에 도움이 되도록 해당 신간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압축 소개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