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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열곡은 1971년 벽사 한영숙 선생께서 국립극장에서 〈한영숙춤 법열곡〉으로 초연한 획기적인 작품이다. 대를 이어 1994년 이애주 선생은 불교의식무와 승무와의 관계를 더욱 심화시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이애주춤 법열곡〉을 올렸다. 30년이 지난 2024년, 선대의 춤맥을 잇고 그 정신을 기리고자 이애주한국전통춤회 제자들이 법열의 문을 다시 열었다.
1971년 〈한영숙춤 법열곡〉은 프로그램 1부에 춘앵무 · 칼춤 · 살풀이 · 학춤 · 탈춤 · 태평무 등을 배치하고, 2부에 법열곡이라 하여 귀의불 · 바라 · 나비춤 · 홍구 · 타주 · 염불 · 타령 · 굿거리 · 당악 · 굿거리 순서로 판을 전개하였다. 당시 팜플렛을 보면 “불교의 의식무용과 승무를 합쳐 우리 민족의 기본정서를 이루는 동양적인 철학미(哲學美)와 인간 특성의 끈질긴 쾌락미(快樂美)를 추구하였다. 불교의식무와 승무의 원형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현대 무대에 알맞도록 구성한 접속곡 형식의 장편무용”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한영숙춤 법열곡〉을 보고나서 이두현 교수는 “우리는 오래간만에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휩싸였다. 그것은 궁중정재의 아정(雅正)의 기개와도 다르고 또 무무(巫舞)의 엑스터시와도 다른 그야말로 법열(法悅)의 세계라고 밖엔 할 수 없는 것이었다.”(중앙일보, 1971.6.12. 이두현, 서울대 사대교수)라고 평했다.
1971. 한영숙춤 법열곡 팜플렛 표지 |
1994년 이애주 선생은 〈이애주춤 법열곡〉에서 “법열곡이란 구도 · 정진과 함께 인간 최고의 염원인 깨달음으로 이르는 법열의 세계를 펼쳐낸다”고 했다. 선생은 “춤꾼은 발걸음 한 자욱에도 역사의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하며, 우리춤의 소재나 내용뿐 아니라 춤사위 하나하나에 유구하고 장엄한 역사가 서려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승무는 우리 민족 대대의 역사적 삶의 몸짓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골격이 세워지고 오랜 세월의 형성과정을 거쳐 조선조 말에 완전히 하나로 독립되어 정립된 민속춤으로, 한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춤이 아니고 대대로 민중 몸짓의 토대와 함께 재인과 예인들의 손에 의해 갈고 다듬어져온 민속춤의 본질이며 핵심춤으로서, 승무의 구성은 바로 우리 역사의 구조이며 춤의 흐름 또한 역사의 흐름과 같다.”(〈이애주춤 법열곡〉, 1994, 팜플렛)고 했다.
1994 이애주춤 법열곡 팜플렛 표지 |
〈이애주춤 법열곡〉은 출연진 모두 우렁찬 귀의불 제창으로 막을 연다. 부처님께 의지한다는 삼귀의에 이어 송암스님의 복청게, 구해 · 송강 · 고산 · 일운스님의 천수바라춤과 요잡바라춤, 동희스님과 이애주 선생의 도량게 나비춤, 그리고 대법고 북춤에 스님들 모두 나무영산회상을 청하면서 불교의식무를 끝낸 후, 이어 이애주의 승무 한판이 민속악회시나위 반주와 함께 염불 · 타령 · 굿거리 · 법고 · 당악 · 굿거리의 구성으로 펼쳐졌다.
〈이애주의 법열곡〉을 본 임동권 교수는 “좋은 춤이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춤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에 감춰진 세계를 밖으로 내뿜는 춤이어야 하는데 이애주의 춤판이 그런 판이었다. 귀의하고자 하는 신념과 성실성, 그리고 예술가의 정열이 정성을 다하여 움직이는 동작에서 춤의 정화를 보여주었다”(한겨레, 1994. 4. 19. 임동권, 중앙대 명예교수)고 평하였다. 이처럼 1994년 〈이애주춤 법열곡〉은 춤의 근원과 본질로 회귀하여 정통 승무로 귀의함에 방점이 있었다.
이애주 선생 추모 3주기를 맞이하여 법열곡 30년을 기리며, 제자들은 법열의 의미를 ‘불교의식무’와 ‘불교문화권에서 생성된 고도의 예술춤인 승무’와의 관계로 파악하면서 그 근간에 흐르는 철학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탐색하려 했다. 그리하여 지난해부터 살아생전 이애주 선생님과 인연이 깊었던 봉원사 영산재 전승교육사 일운스님과 논의하며 공연을 기획하였다. 올해 1월부터 교육을 시작하여 천수바라춤 · 사다라니바라 · 요잡바라 등의 바라춤을 전수하였고, 송암스님의 막내 제자인 해사스님으로부터 도량게 나비춤, 향화게 좌립, 법고춤을 배워가며 불교의식에 관하여 수개월의 학습 기간을 가졌다.
또한 제자들은 선생님의 글을 엮어 출판한 ‘이애주의 춤생각’, ‘승무의 미학’ 등으로 책읽기 모임을 꾸준히 가져오면서 한성준–한영숙-이애주로 이어진 승무의 의미를 더 깊게 성찰하고자 했다.
2024 한국전통춤회 법열곡 팜플렛 표지 |
〈2024년 법열곡〉은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라는 부제로, 불교의식무의 일운스님(영산재 전승교육사), 태평소의 지허스님 · 해사스님 · 회정스님 · 기원스님이 특별 출연하고, 이애주한국전통춤회(회장 윤영옥) 회원들(김연정 · 권효진 · 임경희 · 김미자 · 이숙자 · 모영진 · 신영 · 이연실 · 윤해경 · 안효정)과 다음 세대 제자들(서채원 · 홍라겸), 그리고 유인상 반주단(장구 유인상 · 피리 강완규 · 아쟁 김용성 · 대금 정동민 · 좌고 정부교 · 징 박주홍)이 참여함으로써 불교의식무와 승무를 악가무 일체의 호흡으로 융합할 수 있었다.
남산국악당 마당에서 문을 연 〈법열곡〉은 일운스님의 운집쇠 태징과 함께 의식의 원만한 회향을 발원하는 신중작법 옹호게의 범패소리에 이어 태징에 맞춰 요잡바라춤을 추면서 시작을 알렸다. 모셔진 선대 스승들 사진 앞에서 향로에 향을 피우고 연꽃춤으로 한성준–한영숙-이애주 3대의 춤정신을 기렸다. 이어 스님들의 인도 아래 관객을 객석으로 모시고 들어가 본격적인 법열의 춤판을 벌였다.
본격적인 무대공연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다.
먼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송해 줄 것을 대중에게 청하는 ‘복청게’를 시작으로, 신묘한 힘을 지닌 천수주(千手呪)를 거행하는 ‘천수바라춤’과, 천수관세음의 힘으로 도량이 청정하여짐을 찬탄하는 ‘사방찬 범패’에, 삼보천룡의 강림을 청하는 ‘도량게 작법무 나비춤’을 추고, 이어 세간 대중의 깨달음을 깨우는 ‘대법고무’가 펼쳐지고, 불보살께 법회 광림을 염원하는 ‘거불 범패’,와 한성준 · 한영숙 · 이애주 선생을 비롯한 먼저 가신 모든 분들의 안녕과 평안을 빌고, 오신 분들의 자손만대 무병과 평온을 축원하는 상단축원을 청하였다. 이어서 공양물을 질적 양적으로 변화하게 하는 ‘사다라니바라춤’을 일운스님과 함께 행한 후, 마지막 의식무로 향과 꽃으로 자신의 변화까지도 염원 발원하여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찬탄하는 ‘향화게’의 좌립을 두 스님과 제자들이 함께 행하였다.
천수바라춤, 향화게-좌립 |
이어서 승무의 염불 · 타령 · 굿거리 · 법고 · 당악 · 뒷굿거리 · 회향과 공덕으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장막이 걷히면서 삼현육각 소리가 고요히 스님의 염불과 통합을 이루면서 시작도 끝도 없는 청정한 시공(時空)이 나타났다. 무에서 태극의 음양으로 그리고 천지인의 삼사상으로, 나아가 우주 생명의 시작으로, 이애주 승무 첫 이수자 윤영옥이 승무 염불의 첫 시작을 열었다. 여섯 장단이 지나고, 김연정 · 권효진 2명이 합류하여 삼태극의 염불 첫 마루를 마무리하고, 4명의 춤꾼들(임경희 · 이숙자 · 모영진 · 신영)이 함께 긴 염불에 긴 숨을 모았다. 타령 과장으로 접어들어 5명의 춤꾼이 힘찬 춤사위로 이어 나가더니, 굿거리에 이르러 다시 3명의 춤꾼(윤영옥 · 김연정 · 권효진)이 마치 ‘진흙이 묻지 않는 연꽃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3인 3색의 화려하고도 절제된, 숨 막히게 빛나는 장삼놀음으로 법열의 절정을 향해 몰아간다. 그리고 법고 7명의 군무로 당악에 이르러 바라춤(이연실 · 윤해경)과 나비춤(서채원 · 홍라겸)이 함께 어우려져 법열의 세계를 활짝 연다. 나비 · 바라 · 법고가 한데 어우러진 한판의 당악은 그대로 집단 법열의 희열로 무아의 경지가 되었고, 춤 공양을 함께 한 모든 이들이 법열의 세계에 충만하기를 발원하는 회향게를 지나, 함께 한 모든 관객이 동시에 깨달음을 얻고 평화를 기원하는 공덕게로 〈2024년 법열곡〉을 마무리하였다.
승무염불시작, 승무타령 |
당악, 회향 공덕게 |
이번 〈법열곡〉 공연에서 불교의 장엄하고 진지한 의식은 반복되고 축적되어 승무의 대서사에 녹여졌다. 불교의식무에는 승무의 기본이 있었고 비움과 채움, 모심과 생명존중의 원리가 들어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승무의 대미는 모두 비우고 돌아가 다시 시작되는 끝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었다. 무에서 다시 생명이 시작되어 해탈의 꽃을 각자 피워내면서 전체를 꽃피우는 월인천강의 법열세계의 표현이었다.
김연정 예술감독의 고민은 이애주 선생이 일구어 놓은 승무의 확장된 철학적 해석과 정신을 어떻게 ‘춤추는 이’는 물론 ‘보는 이’들로 하여금 느끼게 할 것인가였다. 승무에는 삶의 온갖 몸짓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춤은 단순한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과정임으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우주법계의 원리를 천상과 지상의 모두를 위한 춤으로 가시화해 법열로 표현해야 했다. 그러한 승무 본연의 철학적 미적 체험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긴 승무’의 서사가 필요함을 윤영옥 회장을 비롯한 춤회 회원 모두가 공감하였다. 세간에 유행하고 있는 짧은 호흡의 무대공연 환경에서 축약되고 생략되어 잊혀지고 있는 ‘승무 본연의 사상철학과 미적체험’을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모두가 동의한 것이었다. 이애주 선생은 긴호흡의 승무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셨다. 선생은 병상에서 마지막까지도 축약된 승무에 대한 아쉬움과 걱정을 하시며 제자 김연정에게 긴 완판 승무를 못다 배운 일부 이수자에게도 못다 전한 긴 완판 승무의 전승을 당부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함께 ‘긴 완판 승무’를 추기 시작했다. 이애주선생 2주기 추모공연에서부터 이번 〈법열곡〉 공연까지 ‘상생의 집단적 방법’으로 한영숙-이애주로 이어온 승무의 철학적 지평을 넓히고 그 서사를 구체화하여 깨달음의 서사를 가시화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번 〈2024 법열곡〉은 관객들로 하여금 장엄한 불교의식무와 깨달음의 대서사를 직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하였다. 처음 본 사람들도 승무에 내재된 생로병사(生老病死) · 원형이정(元亨利貞) · 생장수장(生長收藏)의 미적 체험과 사상을 직관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특히 당악은 집단신명의 승화, 집단 법열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국가문화유산 이매방류 승무 보유자인 채상묵 명인은 이 〈법열곡〉 공연을 보고 “올곧은 이애주 춤새를 보는 듯한 눈부신 무대였다”고 평했다. 승무의 철학적 지평을 넓힌 이애주 승무의 세계가 제자들의 〈법열곡〉에 이르러 보다 깊고 풍부하게, 우리춤의 원류인 불교의식과 만나 제대로 꽃을 피우고 빛을 발한 것이다. 한영숙-이애주에 이어 그 제자들이 시도한 이 〈법열곡〉이 우리춤의 대표적 명품 명작으로 자리 잡길 바라며, 또한 우리춤의 기본이자 고도의 예술성을 지닌 승무가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