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춤으로 엮어낸 삶의 궤적과 아날로그적 인간성의 회복
박호빈_안무가, 제로포인트모션

춤의 씨앗을 심고 길을 묻다

2018년 11월 어느 날, 오랜 만에 산을 다시 타기 시작했다. 빛 바랜 천년묵은 탱화 한 점이 마치 희미해지는 흑백사진처럼 느껴지듯 그림의 윤곽의 경계선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좋아했던 산, 사라지는 잔상처럼 너울거리는 몸짓이 다시 되돌리는 춤사위로 첩첩켜켜이 쌓아지기를 기대하며 정규적인 프로젝트로 명명하였다. 이름하여 ‘대동여지도를 그리는 마음으로 야산에서 명산까지 산이란 산은 몽땅 뒤지기 프로젝트’가 개인의 염원을 담은 장기프로젝트로 첫 발을 디딘 것이다. 특히, 백두대간 종주를 할 때 바라보았던 그 궤적들이 지나 온 춤의 여정과 맞물릴 때 깊은 숨소리와 함께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뱉어내며 홀로 서 있는 무대를 비추는 듯 했다.


무대 위에서 보낸 시간을 되돌아볼 때, 나는 종종 나 자신의 출발점을 떠올린다. 1994년 나의 공식적인 안무 입문작인 〈시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 가장 깊고 선명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작품의 성공 여부나 평단의 평가를 떠나, 그 창작 과정 자체가 몰입과 엑스터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작품을 두고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항상 “만들어졌다”는 수동적인 표현을 쓴다. 그 시절의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영감들을 정돈하고 세상에 펼쳐놓은 대리인에 불과했고, 매 순간이 삶과 예술이 하나로 겹쳐지는 몰입의 상태였다.

자연 속을 걷고 산을 타는 행위는 내 안무 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훈련이자 삶의 일부였다. 내게 젊은 시절 영적·정신적으로 깊은 궤적을 남겨준 세 분의 스승을 통해 나는 산을 만났다. 김기인 스승님은 산을 타는 행위 자체를 피지컬한 몸 훈련의 연장선으로 바라보셨고, 강만홍 스승님과는 산속의 흙과 돌, 자연의 요소들과 어우러지며 그 자체가 연습이었고 공연으로 이어갔다. 강송원 스승님과는 유유자적하게 산세를 거닐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멋과 여유를 배웠다.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다져진 몸의 감각은 훗날 내 무용 인생을 받치는 든든한 뿌리가 되었다.

젊은 날, 나를 오싹할 정도의 전율로 몰아넣었던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는 댄스컴퍼니 조박 시절의 대표작 〈녹색전갈의 비밀〉(1998)로 탄생했다. 교미 후 종족 번식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암컷의 먹이로 내어주는 전갈의 생태에서 고독한 모성과 자아 희생의 철학적 질문을 읽어냈다. 이 작품은 1999년 미국 4개 도시 순회공연 당시 워싱턴 포스트로부터 “춤으로 된 시에 가까웠다”는 찬사를,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로부터 “이질적인 신비로움과 놀라움을 갖춘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세계 무대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생각하는 새〉 ⓒ박호빈



2002년 전후로 새로운 인식의 전환기를 맞는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교토아트페스티벌 예술감독과 모노크롬 서커스 (Monochrome Circus)안무가로 활동하던 코세이 사카모토(Kosei Sakamoto)의 초청으로 〈생각하는 새〉 를 공연하면서였다. 이 인연으로 약 3년간은 매해 초청되었고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협업작업도 수행했다. 그러던 중 교토 지역 아티스트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아뜰리에 프로그램을 참관했고 특히 ‘덤프타입(Dump Type)’이라는 미디어 아트그룹의 움직임 리서치 방법이 인상 깊었다. 그들이 준비한 것은 2대의 프로젝션과 1대의캠코더 그리고 노트북과 그래픽 패드가 전부였다. 유럽연수기간 동안 런던 라반센터(Laban Center)에서 배운 무브먼트 리서치는 아날로그 방식인데 비해 이들은 소니(Sony)의 나라답게 디지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박호빈의 가치관은 변했다. 그 전에는 자연관에 입각하여 가급적 과학숭배나 자본숭배에 따른 결과물을 멀리했다면 이후부터는 얼리어답터(Early Adopter)처럼 기계와 친숙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멀티미디어 댄스그룹 ‘댄스씨어터 까두’였다. 그 전에도 총체적인 공연형태를 추구했지만 창단 이후로는 더욱 그 경향을 확고히 하며 나름의 창작시스템을 구축했다. 특히 영상작업을 하는 최종범 작가에 대한 신뢰는 상당해 거의 모든 작업을 그와 함께 했다. 그때 당시 필자는 미래에는 영상 미디어가 우리의 모든 생활을 압권하고 그 중에서도 홀로그램방식이 구현될 것을 기대했다. 댄스씨어터 까두는 이런 세계관의 변화를 예측하고 단계적 성장을 꿈꿨던 공동창작집단이었다.



 

〈천적증후군〉 ⓒ박호빈



2004년 LG아트센터 기획공연으로 마련된 ‘한국 무용계를 이끄는 4인의 안무가’에 초청되어던 〈돌아온 퍼즐속의 기억〉과 〈천적증후군〉을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공식초청 되어 독일 4개 도시 순회공연으로 유럽무대에 선보이며 뜨거운 반응과 함께 더욱 활발해진 해외진출을 전개했다. 내가 가장 깊은 애착을 느끼는 작품 중 하나는 〈엘리베이터 살인사건〉(2007)이다.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 개관 초청공연 당시, 극장 중앙 벽면에 설치된 상하 이동용 엘리베이터를 보고 직감적으로 이를 무대 장치로 끌어들였다. 밀폐된 공간이 주는 모종의 불안과 고독, 소통의 부재가 가져오는 현대인의 고립감을 미스터리 추리극 형식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2008년 SPAF, 2009년 인도 아딸깔라리 비엔날레에 초청되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이 인연은 훗날 인도 아딸깔라리 컴퍼니와의 협업 및 현지 젊은 안무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멘토링 프로그램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한국춤평론가협회 ‘춤비평가상 2008년작품상’과 2009년 대한민국 무용대상 우수상을 받은 〈Full Moon〉이다. 달은 개인적으로 여러 사연이 많기에 특별한 시선이 녹아있다.


궤적의 변화: 쇼크에서 몸의 본질로, 그리고 전체성 회복

내 작업의 화두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댄스컴퍼니 조박’과 ‘댄스씨어터 까두’ 시절, 나의 화두는 단연 ‘쇼크(Shock)’였다. 예쁘고 세련된 정형화된 미학을 깨부수기 위해 무용수들에게 거칠고 투박할 정도의 강렬한 피지컬 움직임을 요구했다. 단순한 물량공세를 배제한 채, 관객의 호흡을 뺏고 지루함과 싸우게 만들며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연출적 시간 디자인을 구사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팀 ‘제로포인트모션’으로 전환하면서 나의 화두는 ‘몸 그 자체에 대한 집중’으로 이동했다. 제작 여건의 변화로 안무가인 내가 직접 무대 위에 올라 몸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늘어났고, 이는 역설적으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춤의 본질과 깊이 있게 독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무와 무용수를 분리하던 일방적 연출에서 벗어나, 내 자신의 몸속에 축적된 시간과 감각을 직접 무대에 펼쳐놓기 시작한 것이다.

내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철학적 바탕은 구스타프 융이 역설한 ‘전체성 회복’이다.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는 모든 존재가 ‘샤먼’으로서의 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다. 나는 이러한 시각으로 사회적 이슈와 인간관계를 관찰하고, 이를 구도자적인 자세로 작품에 투영해 왔다. 얼마 전 건강의 위기를 겪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예술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화려한 유명세를 치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을 놓지 않고 무대 위에서 창작을 이어가는 진짜 예술가들이다. 세월이 흘러 내 안무의 움직임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하고 감각적으로 바뀌었지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진실된 시선과 통합적 세계(만다라)를 향한 열망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어쩌면 앞서 언급했던 산행 프로젝트 ‘대동여지도를 그리는 마음으로 야산에서 명산까지 산이란 산은 몽땅 뒤지기 프로젝트’에서 ‘대동여지도’는 필자가 그리고자하는 세계관 '만다라’일 것이다.



〈코펜하겐 해석을 위한 고양이 협주곡 C장조〉 ⓒ박호빈



디지털 시대의 역발상: 〈오지랖 OZ_Rap 2.0〉과 아날로그적 생존 관계망

최근 선보인 〈오지랖 OZ_Rap 2.0〉은 이러한 나의 예술적 철학과 현시대에 대한 질문이 집약된 프로젝트다. 홍보 포스터에 ‘박호빈 30년’이라는 문구가 담겼지만, 사실 나는 수식어나 기념비적인 타이틀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다만 30여 년간 무용 단체를 이끌어오며 ‘조박’, ‘까두’, 그리고 ‘제로포인트모션’으로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현장을 지켜온 시간들이 만감으로 교차했을 뿐이다. 이번 작업은 제로포인트모션과 더불어 휴식기를 가졌던 무용수들의 농축된 몸 언어를 탐구하는 김원 선생의 〈S.O.S 나누기 함께〉, 그리고 최원석·주하영 부부 무용가가 이끄는 와의 공동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오지랖 OZ_Rap 2.0〉 ⓒ박호빈



작품의 출발점은 급격한 AI(ChatGPT) 기술의 발전과 고립형 SNS 시대가 가져온 현대인의 불안감이었다.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방향을 상실한 기성세대(‘라떼’ 세대)의 소외감, 그리고 “몸을 써온 무용수들의 일상은 안녕하신가?”, “비효율적인 춤 작업은 과연 가치가 없는가?”라는 정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지랖’과 AI 시대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둘 다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와 정보망을 기반으로 하며, 그 매개체는 ‘수다’에 있다. 포털 시대의 검색이 일방향이었다면, AI 시대와 일상적인 수다는 쌍방향으로 핑퐁처럼 오가는 구조다. 그러나 오지랖에는 AI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불완전함 속에 녹아 있는 ‘복합적인 감정과 인간적인 온기’다. 남에게 안부를 묻고 쓸데없이 참견하는 오지랖의 본질은 결국 ‘사람과 사람 간의 상호 관심’이자 관계의 연결성이다.



  

〈오지랖 OZ_Rap 2.0〉 ⓒ박호빈



과거 이어령 장관의 강의에서 접했던 “여성들의 무의미한 수다가 통신 산업의 판을 흔들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다”는 역발상처럼, 나는 인생의 70%를 차지하는 ‘무의미한 수다’와 ‘비정제된 제스처’야말로 효율성만을 강요하는 이 시대에 인간성을 증명하는 가장 직관적이고 본질적인 언어라고 보았다.



 



〈오지랖 OZ_Rap 2.0〉 ⓒ박호빈



이번 작품은 내향적인 어린 부부가 어른으로 사회화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1부 www.어린부부다큼.com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서툴게 적응해가는 라떼 세대들의 분투기를 다룬 2부 〈수다 Chat는 집이지 GPT!〉로 구성되었다. 세대와 역할을 넘어 우리 모두가 직면한 관계의 어려움을 〈오즈의 마법사〉 속 캐릭터들처럼 스스로의 본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풀어냈다. 제작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초기에 기획했던 AI 기술 제휴나 대형 예산 지원이 무산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해외 정세와 중동 전쟁의 여파로 협찬을 약속했던 지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자금 조달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기획자는 빚을 질 수 있으니 공연 포기를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난 삶 동안 두려움 때문에 한 발 뒤로 물러섰을 때 추진력을 잃고 삶의 주인이 되지 못했던 교훈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익은 공유하되 손실은 스스로 책임진다"는 각오로 판을 뒤집었다. 기술적 효과를 과감히 덜어내는 대신, '몸의 비정제성'과 '아날로그적 인간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다행히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과 무용·연극계 동료들의 따뜻한 후원으로 목표액의 120%를 달성하며 무대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험난한 과정 자체가 바로 내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아날로그적 생존 관계망의 가치'를 현실에서 증명해 보이는 시간이었다.







〈오지랖 OZ_Rap 2.0〉 ⓒ박호빈



무대 위에 존재하는 삶을 향하여

세상은 점점 더 빠르고 효율적인 것을 요구하고, 인간의 영역을 기술이 대체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정보와 효율성의 범람 속에서도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은 결국 손에 잡히지 않는 비효율적인 가치들—무의미해 보이는 수다, 불완전한 제스처, 그리고 서로를 향한 엉뚱하고 따뜻한 ‘오지랖’에 있다. 산을 오르내리며 자연의 이치를 배우던 젊은 시절부터, 무대 위에서 몸의 본질을 찾아 헤매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의 춤은 언제나 ‘인간의 전체성 회복’을 향해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화려한 수식어 대신,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땀 흘리는 한 명의 현장 예술가로 남고자 한다. 삶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을 몸의 언어로 바꾸어 내며,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따뜻한 만다라를 계속해서 그려나갈 것이다. 이제 빛 바랜 천년묵은 탱화를 복원하 듯, 대동여지도를 그리는 마음으로 막춤에서 정제된 춤까지 춤이란 춤은 몽땅 춰보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련다.

박호빈

안무가. 댄스컴퍼니 조박, 댄스씨어터 까두로 거듭 나면서 나름 체계적인 제작시스템을 구축하였으나 운영난으로 2여년 휴식기 끝에 결국 폐업, 전문무용수와 안무가의 권익보호와 복지개선을 위해 노력해오고 있다. 새로운 공연예술미학과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제로포인트모션(Zero Point Motion)-영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026. 8.
사진제공_박호빈 *춤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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