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싱가포르의 상징인 다목적 공연장 에스플러네이드에서 기획하는 싱가포르댄스페스티벌은 나에게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제작비나 공간활용을 맘껏 할 수 있도록 특별히 페스티벌 측에서 모든 것을 지원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T.H.E 무용단의 해외상임안무가 자격으로 신작을 제작하게 되었다.
사실 그 전에 나는 일반적인 야외공연이 아닌 제대로 된 site-specific (공간특정형 공연)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안무가에게 있어서 가장 익숙한 공간은 프로시니엄이다. 프로시니엄은 관객과 공연자의 분리가 일어나는 형태의 극장공간이다. 이에 반해 site-specific에는 그러한 경계가 없다. 허물어진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연은 나에게 있어 새로운 도전이자, 내가 가진 창작력을 새롭게 탐구해볼 수 있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에스플러네이드 측에서도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백스테이지를 일반 관객에게 공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에스플러네이드의 백스테이지 공간은 사전에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그 흔한 백스테이지 투어조차도 없던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관객에게도 이 공연은 생경한 경험이 될 것이었다.
본 신작에서 나는 에스플러네이드의 백스테이지 중 4곳을 선택하여 작품을 짤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곳은 loading bay(장비 반입구) - cargo lift (장비 반입구와 극장을 연결하는 큰 엘리베이터) - workshop stage(무대 바로 뒤편에 위치한 세트작업실) - car park (지하 주차공간) 이었다. 이곳을 순서대로 이동하면서 작품을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극장공연 연습과는 확연히 다른 스케줄이었다. 에스플러네이드에는 총 4개의 극장이 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고, 이곳을 통해 수많은 무대장치가 오고 간다. 하나의 공연을 만들기 위해 무대 뒤에서 작업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배어있는 곳이다. 각 공간에서 끝없이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제각각 이었다. 어떤 날은 야심한 밤이 되어서야 작업이 가능하기도 했다. 특히 지하 2층 carpark 는 오래 있으면 피곤함도 꽤나 있었다. 각 장소에서의 작업 이외에도 이것을 하나의 공연으로 이어가는 것 또한 숙제라면 숙제였다.
또한 각 공간의 성격을 파악해야 했다. 만지거나 매달리는 일, 또는 올라가는 일 또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안전상의 문제도 포함된다. 극장 측 감독과 무용단 측 무대감독이 항시 대기해야 했다. 작업 초기에는 손을 베기도 하고, 조그마한 가시에 찔리기도 하며, 섣불리 올라갔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약간의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사물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나에게 site-specific은 인간의 힘과 더불어 공간의 매력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보통 극장은 공연을 하기 위한 객체로 인식된다. 하지만 site-specific에서는 공간 자체가 지닌 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야외공연 이상의 것이 나올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음악을 만드는 과정 또한 재미있었다. 호텔방에 앉아 각 공간에서 받았던 영감을 되새기며 만드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음악작업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사실 나는, 특히 외국에서 작품을 만들 땐 미리 한국에서 만들어 가져갔고 현지에서 다시 수정 및 보완을 거쳤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 〈Impulse〉는 공간을 힘으로 바꾸고 이것을 춤으로 변환하는 것이 위주가 되었다. 즉, 인간이 자의적으로 사물에게 가서 사물의 능력을 이용하여 이를 춤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이 나를 만들지 않는 것이 핵심이 된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들었던 것은 바로 조명이었다. 조명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공간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조명을 그대로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조명기를 세팅하되 기본 화이트 계열 조명으로 할 것인가? 이번 작품의 목적 중의 하나는 축제 측에서 한번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적 없던 무대 뒤 공간을 공연을 통해 공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의 판단으로 인해 에스플러네이드 백스테이지에 대한 관객들의 첫인상이 결정되는 일이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공간의 순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가? 조명기를 세팅 하면 순수한 모습이 아닌가? 인공적인 공간에서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은 무엇인가?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생각을 좀 달리 해보았다. 애초에 무대를 위한 목적으로 공연을 제작하면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든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도 약간의 변화를 주면 특별해질 수 있다. 특히나 조명이 그러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무대를 준비하는 백스테이지이지만 공연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 공간이 무대가 된다. 그래서 과감하게 조명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이 백스테이지 공간이 얼마나 멋진 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지 시험해보기로 했다. 조명디자이너 앤디는 작품의 흐름과 더불어 공간에 딱 맞는 조명을 디자인해 주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마지막 장소인 지하2층 carpark에서는 포그머신을 사용할 수 없었다. 포그머신을 사용하면 소방법을 위반하게 되는 것이 이유였다. 이 장소를 마치 배트맨의 고담시티처럼 멋진 연출을 할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공간은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와 맥락과 함께 존재한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는 공간은 단순히 무생물적인 조형물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사실 공간은 인간과 함께 존재해왔다. 이번 작업은 공간의 존재력이 무엇으로 인해 나에게 다가왔는지를 알아 볼 수 있어 의미 있었다. 내가 사용하려고 하는 순간, 그 공간은 또한 나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힘껏 발휘한다. 또 하나, 소리 나지 않는 공간은 나로 하여금 소리를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동양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에 철학적으로 맞는 일일 테다. 인간의 생동감 있는 움직임이, 춤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듯, 춤을 추는 공간 또한 살아있는 것처럼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