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해외 국립 무용단체에 초빙안무자로 초청되었다.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권역별 국제문화교류 전문가 양성사업(NEXT; Next Expert Training)의 일환으로 기획된 프로젝트이다. 아르헨티나 국립현대무용단과 3주간 시간을 보내며 초청 안무를 진행하고 해당 작품을 발표하는 기획인데, 주 아르헨티나 한국문화원과 아르헨티나 국립현대무용단이 함께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아르헨티나 연방문화부가 후원한다.
5년간 해외 상임 안무로 함께 해 온 싱가포르의 T.H.E 무용단도 매 시간 나를 긴장하게 했지만 아르헨티나 국립현대무용단은 정단원이 20명에 달한다. 임신과 부상으로 휴직을 한 무용수 외 예술단원 모두가 내 공연에 참여하니 평소 작업보다 인원이 늘어난 만큼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없으면 더욱 긴 시간 진땀 빼는 상황이 만들어질 터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지금의 나를 성장하게 해줄 것임은 분명하다.
처음 무용단을 만난 곳은 엄청난 크기와 압도적인 분위기의 연습공간이었다. 원래는 국립도서관이었던 건물이 국립음악무용센터로 바뀐 곳이라고 한다. 연습공간은 3층에 있고 1층은 극장이며 실제 내 작품이 상연될 공간이다. 오전 연습은 3층에서 진행되지만 오후연습은 1층의 실제 상연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웃음기 없이 시작된 연습. 첫 시작은 내 춤의 기본 동작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팔꿈치와 손목의 기능을 섬세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들에겐 실제 안무보다도 이 기본 동작을 익히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시작한 건 첫날 여러 가지 동작을 시켜본 다음 날부터였다.
내가 손목의 쓰임새에 더욱 신경 쓰게 된 것은 싱가포르 T.H.E 무용단과 작업하면서부터였다. T.H.E 무용단은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 모두 아시아 무용수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덕분에 지난 5년간 그들과 작업하며 얻은 것은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었다. 동양의 특성과 그것을 드러나게 하는 표현에 대한. 재미있는 건 같은 아시아라는 점에서 쉽게 공유되는 대중적 습관이 존재한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T.H.E 무용단과의 작업에서의 장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아르헨티나 국립 현대무용단과의 작업 과정은 정 반대였다. 어떤 감성이나 텍스트에 대해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몸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기로 했다.
이번 작품제목은 〈Tensión espacial〉(공간적 장력)이다. 외부의 대상으로 인해 내부에서 발현되는 힘(두려움, 의지, 사랑 등)과 타자(他者)에 따라 작용하는 내부의 명상을 춤으로, 상황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막연하게 느껴지겠지만 이러한 의제들이 형이상학적 범주에 머물러 있는 현재 나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추상적인 힘을 우연적, 필연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작품 준비 과정에서는 더욱 내가 원하는 바를 몸소 보여주곤 했다. 불가능한 속도로 느껴진다면 직접 보여주고, 모르겠다고 하면 또 직접 보여주다 보니 나중에는 무용수들도 편하게 다가와 시범을 요청했다. 어쩌면 나의 춤 인생은 ‘내가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동작을 직접 보여주더라도 소통이 원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모국어로 소통할 수 없으니 간단한 설명도 제각기 다르게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써야 했다. 단원들 중에 영어를 할 줄 아는 무용수가 4명 정도 있었지만 무조건 그들만 통해서 의사소통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어설픈 스페인어일지라도 본인의 눈을 보고 직접 말하려고 애썼다. 그러한 작은 관계가 서로의 의지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가면 끝없이 음악을 만들고, 밥을 먹으며 스페인어 단어를 공부하는 것이 아르헨티나에서의 일상이었다.
음악 얘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이 작품에 사용된 곡의 완성이 이번 작품과정에서는 큰 난관이었다. 충분히 동양적 색채를 넣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음악을 하는 지인에게도 의견을 구했지만 그 역시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지금까지의 내 음악은 확실히 내가 즐겨들었던 서양음악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제 아무리 피리나 가야금 등의 국악기 소리를 사용해도 이미 뉘앙스 전체가 서양음악의 형식과 배열을 품고 있기에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기존 음악을 모두 지우고 새롭게 음악을 구성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음원을 사물놀이 악기로 사용하며 재미있는 것을 알아냈다. 사물놀이 악기 중의 북은 중저음에 가까우며 꽹과리는 중고음에 가깝다. 그리고 그 사운드는 내가 만든 현대무용 동작과 전혀 거리낌 없이 어우러졌다. 곡을 대대적으로 바꾸고 다시 지인에게 의견을 구했을 때 돌아온 축하 인사에 큰 보람을 느꼈다. 음악에 대한 새로운 시도 역시 이번 기회에 얻은 큰 선물이다.
청각적 텍스트는 시각적 텍스트보다 여운이 길다. 이번 작품에서 소리꾼이 없이는 확연한 음악적 텍스트를 만들지 못할 거라 생각되었고 자아와 타자에 대해, 관계에 대해 생각하며 판소리 '사랑가'를 이용하였다. 이전 작품에서도 판소리를 선보인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강한 맛을 걷어내고 보다 조용하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고 싶어 일상성을 위해 가사를 바꾸고, 음폭을 줄여 미니멀 한 느낌을 추구했다. 그리고 레지던스 3주차에 소리꾼 정승준이 합류했다.
레지던스 기간 동안 내 옆에는 2명의 조안무와 음악감독, 무대감독이 시종일관 붙어있었다. 이들은 내 작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다. 부분 동작을 편히 연습 할 수 있게 음악을 반복적으로 재생해주었고, 전체 흐름 중 포인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질문했다. 특히나 두 명의 조안무가 있는 것은 정말 좋았다. 단원들은 내 안무 같은 동작을 해 본적이 없다며 무척 어려워했는데, 연습과정 중 내가 A그룹에 집중하고 있을 때 조안무자인 라미로와 아우구스티나는 나대신 B그룹을 연습시켰다. 싱가포르에서 나의 어시스턴트 역할을 해준 쉬분(T.H.E 무용단 예술감독)이 나를 더욱 성장시켰음을 알기에 이곳에서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라미로와 아우구스티나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어려워하면서도 동작 연습에 욕심을 가지고 이 작품에 최선을 다해준 단원들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보인 것은 물론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정․중․동의 미를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듀엣 춤이 있는데 이 부분을 선보이는 마르틴과 마리아는 유독 기억에 남을만한 강력한 무용수들이다. 내 동작을 구현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 가끔 아시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는 ‘동양적인’ 힘이 꼭 아시아에 국한되어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 참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마르틴은 무용수로서의 재능은 물론이거니와 특히나 몸통을 멋지게 사용한다. 그래서 남자 춤의 대부분은 마르틴이 메인이 되어 선보이도록 하였다.
내일부터 3일간 진행되는 〈Tensión espacial〉 공연의 막이 내리고 나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4월에는 브라질 투어(상파울루, 살바도르, 고이아니아 등)에 오르고, 9월에는 콜롬비아와 볼리비아 투어가 있다. 계속 중남미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참 재미있다. 낭만과 열정, 그리고 축제의 공간. 나에게 중남미는 긍정적인 힘을 각성시켜주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이 너무 맛있다! 하하
참. 하반기에 있을 싱가포르 작업에도 엄청 좋은 일이 생겼다. 싱가포르 독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싱가포르 댄스페스티벌에서 내가 5년째 해외상임 안무가로 있는 T.H.E 무용단을 초청하기로 한 것이다. 축제의 지원을 받아 내가 새롭게 창작하게 될 이 작품은 에스플러네이드 극장 내부의 공간들을 이용하는 공간 특정형 작품이 될 것이다. 이 또한 너무나 기대된다.
3월 19일, 공연을 하루 앞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안무가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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