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만의 공간이 주어졌다.
2013년 4월, 한국현대춤 작가12전에 선보였던 〈기다려요〉와 같은 해 9월 강경모댄스프로젝트 작품 <빨간나무>와 함께 올렸던 〈Happy Day〉를 공연예술창작지원금의 수혜를 받아 2014 강경모댄스프로젝트 〈The Evolution〉(11월 5- 6일)이라는 타이틀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올린 것이 그것이다.
지난해와는 또 다른 공간에서 내 춤작업의 진화를 꿈꾸며 공연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기다려요〉
작품 <기다려요>는 초연작에서 나를 포함한 이재영과의 듀엣이었지만 이번 작업에서는 나를 대신해 정재우가 함께 호흡을 맞추었다. 그리고 새롭게 구성된 장면에서는 권혁이 출연하였다.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은 기다림은 그를 시공간의 깊은 중력으로 끌어들인다. 숨 쉴 수 없는 기다림에 돌처럼 굳어버린 그는 자신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들...
지루함과 초조, 낭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지껄이는 그의, 혹은 그들의 굳은 시간들은 누군가에게 들려져 키가 큰 돌탑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한낱 작은 돌멩이로 부서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그 누군가는 알까.
살갗으로 스치는 바람에 누워 떠내려가는 구름을 쳐다본다.
나의 작품 “기다려요”의 모티브가 되어준 돌탑.... 그 돌탑 맨 위에 올려진 작은 돌맹이가 기다림을 시작한다. 권혁과의 첫 장면은 이 작품에서 기다림의 소망과 희망을 동시에 안고 있다.
이후 무대의 양측에는 돌탑이 상징적으로 등장하고 검은 펠트 천을 두른 두 남자 무용수(이재영과 정재우)는 마치 돌탑의 일부인 양 센터에 등장한다. 어쩌면 이들은 누군가가 올려놓은, 혹은 어떤 꿈을 품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돌의 춤이라고도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검은 펠트천의 반대쪽은 푸르른 잔디로 양면성을 나타낸다. 삶 속에 존재하는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긴 시간은 춤이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간절한 희망과 함께 익숙해진 기다림이 역설적으로 나타나며 <기다려요>는 마무리된다.
〈Happy Day〉
작품 〈Happy Day〉는 베케트의 ⌜행복한 나날들⌟을 읽고 난 나의 주관적인 잔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단한 현실에서 부유한 존재의 의미와 그것이 부여잡고 있는 현실의 허무함이 꿈꾸는 행복을 역설적으로 나타내려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무대에는 커다란 갓이 등장한다. 나와 함께 호흡을 같이한 무용수 허효선과 김건중이 공존하는 갓 안에 형성된 공간은 그들이 꿈꾸는 공간이자 사랑하는 공간이며 갇혀있는 공간이었다. 이들의 심리를 묘사해 주는 것은 공간을 채워나간 움직임과 더불어 사운드와 조명이 큰 몫을 한다. 깜빡 거리는 갓등과 숨을 쉬었다 들이 내쉬는 불빛의 호흡은 아슬아슬한 그들의 관계를, 그리고 그것을 부여잡고 있는 모습을 드러낸다.
지나간 시간은 추억으로 재구성된다. 살아있는 과거는 오히려 현재의 시간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여 이 황량한 세상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으며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극의 모티브가 되는 베케트의 부조리극 ‘행복한 날들’에서는 흙더미에 서서히 묻혀가는 한 여자와 실체가 보이지 않고 움직이지 못하는 한 남자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작렬하는 태양아래 삭막한 흙더미에 묻힌 여인의 의미 없는 주변잡사는 허공에 메아리친다. ‘비현실적’인 시공간과 ‘극도’로 절제된 아름다움은 우리가 사는 현재의 시간을 가장 잔인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
최근 발표하고 있는 나의 춤 작업은 인간의 존재와 내면의 흐름이 현실과 맞닿은 경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감상적으로 표현해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위의 두 작품도 희망, 기다림, 행복이라는 키워드를 담아낸 나의 애작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