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11월 5일부터 12월 7일까지 멕시코 과달라할라에 머물며 네 나라의 여성 안무가(멕시코의 가브리엘라, 헝가리의 바타리타, 일본계 타일란드의 소노코 프로우, 한국의 나)들이 함께하는 <우먼, 바디>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마치고 돌아왔다.
지난번 부다페스트에 이어 멕시코에서의 콜라보레이션이 결정되고 나서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위험한데 괜찮겠느냐”는 걱정의 말들을 했다. 멕시코에서 데모하던 학생들 40명이 실종되는 사건과 함께 워낙 치안이 엉망인 나라로 악명 높은 것도 한 몫 하는 듯 했다. 그래도 한창 우중중한 초겨울 날씨에 공연의상과 소품들 그리고 여름옷들을 챙기며 난 기분부터 업 되었다. 그동안 공연과 워크샵 일정을 관리하고 성사시킨 멕시코 안무자 가비의 노력과 수고로 우리 네 여자들은 몇 개월 만에 드디어 다시 재회를 했다.
멕시코 과달라할라 시의 지원금으로 우리들이 한 달간 머무는 숙소를 호텔로 잡기엔 너무 무리가 되어 가비와 그녀의 시인 파트너 호르케의 절친 부부 집에 머물기로 하였다. 집 주인, 엠마누엘은 대학서적과 예술서적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부인은 쥬얼리 다자이너 였다. 삼 세대에 걸쳐 물려받은 오래된 집이지만 시간과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름다운 정원이 인상적이었고 더구나 우리는 각자 방을 하나씩 쓰며 매일 오는 하우스 키퍼 아주머니가 방 청소와 빨래까지 도맡아 해주시니 정말 최고의 환경에서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도착시간은 제 각각이었고 모두 반가움의 포옹과 안부 인사로 첫날을 맞았다. 첫 주는 워크샵을 통해 멕시코의 무용수들과 일반 아티스트들을 만났다. 우리들의 워크숍은 삼일 동안 세 시간씩 각자의 방식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단 부다페스트에서 했던 작품 <우먼, 바디>를 기본으로 새로 투입되는 현지 뮤지션과 함께 지난 공연 비디오를 보며 진지한 토론에 들어갔다.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은 라이브로 공연되어졌는데 멕시코에선 멕시코 뮤지션들과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중간에 있는 짧은 대사들도 스페인어로 하기로 하고 작품 중간에 쓰는 소품도 멕시코와 연결된 것들로 찾아보기로 했다.
다시 한 번 작품의 초심으로 돌아가 우리들이 계획하고 고민했던 <우먼,바디>에 얼마만큼 깊게 그리고 또 우리의 의도대로 작품이 나왔는지에 포인트를 두고 영상을 보며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지난번 부다페스트에서 초연 때 우리 네 사람이 모두 무대에 서느라 간과 될 수 있었던 디테일한 부분들을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첫 리허설 들어가기 전에 스케줄 체크를 하다 보니 빡빡하게 짜인 인터뷰 일정과 라디오, 티브이 인터뷰들이 잡혀있어 형식적인 것이려니 하고 넘겼는데 나중에 보니 그 효과는 공연 홍보에 꽤 큰 역할을 해주었고 과달라할라 시 문화부에서 지원하는 만큼 그런 미디어 홍보도 아주 적극적인 것에 놀랐다.
스튜디오 첫 연습에 들어가기 전 잡힌 첫 인터뷰의 장소는 시 문화부 건물 마당이었다. 라임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들 가운데 간단히 우리들 작품 제목이 쓰인 간이벽과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인 분위기 있는 야외 인터뷰였다. 문화부 직원과 우리들 콜라보레이션의 퓨로듀서 산드라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각 신문사와 문화계 쪽 사람들의 질문들에 우리는 돌아가며 답변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이삼일 간 각종 신문과 웹 지면에 우리들의 기사가 실렸다.
그 다음날은 세계적인 멕시코 건축가 바라간이 지은 과달라할라 대학에 소속된 문화의 집에서 시인 호르케의 시 낭송과 시 강연이 있었는데 이는 우리들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행사로 마련한 것이었다. 세계적인 마술사 호디니에 관한 시집을 출판해서 이날 판매하는 수익이 우리들 콜라보레이션 작업에 기부되는 그런 밤이었다. 과달라할라 출신의 바라간이라는 건축가의 건축을 꼭 보고 싶었었는데 우연히도 이 행사는 바라간이 지은 집 정원에서 있었다.
한주가 그렇게 후딱 시간이 흘러갔고 처음 맞는 주말은 관광을 하는 시간들이었다. 우리를 초대해준 나이 드신 여류 조각가의 집이 있기도 하지만 오래된 건물들과 성당이 있는 타팔파라는 작은 도시로의 일박 여행이었다. 워낙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밤에 여자들끼리 차를 타고 오는 게 위험하다고 했다. 여기까지도 난 그 위험하단 말을 실감할 수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왜 무엇이 위험하다는 것인지를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는 데킬라 밭(알로에 비슷하게 생겼는데 데킬라 술 만드는 식물이라고 한다), 온갖 선인장들이 보이는 사막, 그리고 또 갑자기 펼쳐지는 거대한 산들과 호수, 자연경관이 그야말로 너무 다양하게 펼쳐져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렇게 좋은 기후에 풍요로운 자연을 갖고 있는 이 나라는 대체 왜 그토록 가난하며 사회적 문제들이 산재해 있는 것인지,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착한 곳은 아주 오래된 마을의 스페인풍의 시골집이었다.
스페인 양식의 집들과 건축들을 보며 사백년 동안 멕시코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로서 스페인이 멕시코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멕시코가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좁은 길목 안에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진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안에는 정원처럼 가꾸어진 화려한 진분홍색 꽃나무들이 나타났다. 그 사이를 지나니 옥수수 밭에 온갖 과일나무들이 보이고 집안으로는 또 큰 산으로 연결되는 대자연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그분의 작업실 그리고 커다란 옛날식 부엌과 거실을 구경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분이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저녁은 멕시코 전통음식으로 그것도 바로 눈앞의 정원에서 직접 가꾸고 수확한 생전 본적도 없는 야채들과 과일들로 만든 음식들이 주 메뉴였다. 한 가지 신기한건 호박 꽃잎에 싸인 음식이었는데, 우리나라는 호박잎을 먹는다고 나는 설명해주었다.
즐겁게 시작된 식사에 조각가라는 그 나이든 부인에게 자식이 몇 명인지를 누군가 물었고 그때부터 그 부인의 가족사를 들으며 우리는 잠시 숙연해졌다. 남편은 존경받는 유명한 정치가였지만 반대파로부터 살해당하고 자식 중에 두 명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분은 재치있게 자신의 국제적인 옛 남자 편력을 자랑하시며 나라별 남자들 성향 비교를 하며 바타리타 역시 국제적으로 만난 전 남친들 이야기로 맞장구를 쳐서 다시 웃고 떠들었지만 그녀의 드리워진 그늘이 어둡게 느껴졌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이 작은 마을 구경을 나갔다. 작은 동키를 타고 지나가는 노인들이나 낡은 트럭 뒤에 아이들부터 키우는 개, 전 가족들이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독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이색적인 분위기를 즐기며 동네를 걷고 있는데 허름한 작은 집 안에서 멕시코 음악이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 작고 어두침침한 집안을 들여다보니 열 명 정도 되는 한눈에 봐도 가족처럼 닮은 남자들이 멕시코 전통음악 같은 구성진 음악을 연습 중이었다.
우리는 잠시 들어가 구경해도 되는지 묻고 그 좁은 어두침침한 집안으로 들어가 한쪽 벽에 겨우 끼어 앉았다. 이들은 4대째 내려오는 음악가 집안으로 타팔파에선 아주 유명한 뮤지션 집안이라고 했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 또는 사촌 이거나 삼촌쯤 될 것이다. 아주 낡은 악기지만 기타 첼로 바이올린 연주와 노래까지 정말 기막힌 라이브 연주를 듣고 우리는 연속 앵콜을 외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단 한 번도 음악학교에는 가본 적이 없으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수하고 가르치고 그렇게 대를 이어 음악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흙으로 지어진 낡은 집이 연습실이었다. 이들은 타팔파 시내 레스토랑이나 또는 거리에서 연주를 한다고 했다. 특히 가장 나이들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구성진 노래를 들으며 천진하게 행복해 보이는 이들의 표정과 멕시코의 슬픈 현실이 겹쳐졌고 어둡고 쾌쾌한 이 작은 집과 밖에서 너무나 찬란하게 타오르는 태양이 겹쳐져 그냥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타팔파 시내구경을 하고 동화 같은 그 부인 집에서 하루 밤을 묵고 다음날 오래된 바위라는 유적지를 돌아왔다. 정말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 어마어마한 바위들이 있었는데 세월과 역사의 시간들이 느껴져 우리는 그 거대한 바위 위로 등산하듯 서로 잡아주고 밀어주며 올라가 아래로 보이는 굽이굽이 펼쳐진 자연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햇살을 쪼이고 왔다.
그 다음 주는 드디어 우리들 네 명의 솔로 공연이 있었다. 우리는 공연 당일 라디오 방송국에 인터뷰를 갔다. 모두들 생방송이라 은근히 긴장했지만 라디오 방송국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순간 사회자들이 어찌나 활기차고 코믹한지 완전 화기애애한 인터뷰가 되었다.
그중에 한명이 “안녕하세요?” 하는 멘트를 날려주며 시작된 인사와 함께 공연 홍보에 포커스를 맞춰주면서도 이번 콜라보레이션의 취지나 목적을 아주 재미있게 보도해주었다. 때로는 모든 진행자들이 동시에 큰 소리로 떠들기도 해서 난 참았던 웃음보를 터트리기도 했다. 암튼 너무 색다른 생생한 라디오 방송에 우린 긴장감 없이 즐겁게 인터뷰를 마쳤다.
무엇보다 우리를 긴장하게 한 것은 이날이 하필이면 멕시코의 레볼루션데이라고해서 전국 곳곳에서 데모 시위가 벌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실종되었던 사십 명의 학생들이 모두 학살된 채 발견 되었고 나라 전체가 슬픔과 비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멕시코 상황을 이야기하자면 멕시코는 마약밀매의 문제와 갱들이 판을 치다시피 하는 나라라고 한다. 문제는 이 갱들과 정치인들이 뒤로 깊게 연루되어있고 국민들은 가난하며 교육수준도 무척 낮다. 더 큰 문제는 이 마약의 주요 고객들이 대부분 미국에 있다는 것이다.
멕시코의 비극은 미국의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충이란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심지어 갱들은 가난한 아이들을 이용하여 사람을 죽이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고 배고픈 아이들이 그 희생양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머무는 동안 우린 개인적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받았고 택시도 길에서 잡아타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늘 픽업 받아 연습실을 오갔다.
멕시코 안무자 가비의 친 오빠는 바로 우리 공연 며칠 전 권총 강도를 당해 타고 가던 차도 가방도 모두 도난당하는 사고를 당했으며 바로 그즈음 멕시코 언론에서는 잘 보도되지 않는 멕시코의 뉴스를 독일에 있는 파트너에게 전해들은 나로선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인 블로그에 멕시코 사회를 비판하던 한 멕시코 여자가 살해된 채 그 사체가 본인 블로그에 그대로 올려졌다는 것이었다. 사회부패와 부조리함의 극치에서 사십 명 학생들의 학살 사건은 멕시코 인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것이었다.
아무튼 하필이면 이날은 레볼루션데이로 나라에서 음악이나 파티를 자제하고 거리에도 되도록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이전에 이미 이날 공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 진지하게 회의를 했었다. 그날 주요 도로들이 막히고 데모의 물결로 넘쳐 나겠지만 그런 상황에도 우리들 인생은 계속되어야 하듯이 쇼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의상은 그대로 입고 공연은 하되 우리의 마음도 한뜻이라는 의미로 한쪽 팔에 검은 리본을 달기로 했다. 불과 몇 명의 관객이 온다 해도 공연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날 극장 리허설 중 들려온 웅장하고 기괴하기 조차한 함성에 난 충격을 받았다. 극장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극장 관계자의 당부에도 살짝 문을 열고 밖을 보니 어마어마한 인파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 중이었다. 우리가 공연하는 라르바라는 극장이 시내중심 대로변에 있었기에 그 엄청난 현장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나는 가슴이 떨리고 진정이 되질 않았다. 마침내 리허설은 끝난 뒤여서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살짝 극장 밖으로 나가 함성의 무리들을 지켜보았다. 학살당한 사십 명의 학생들 사진을 들고 피켓을 들고 그동안 싸였던 핍박과 설움에 찬 그들의 함성에 말할 수 없는 울렁임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과달라할라 사상 초유의 몇 십만 명이 모인 행진이었다고 하니 그 현장은 그야말로 난생 처음 보는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공연장에 도착한 관객은 이미 네 시간 전, 세 시간전에 출발해서 극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처음엔 예약도 많았고 워낙 백퍼센트 극장 점유율을 기대했던 우리로선 정부의 발표이후 다시 서너 명이 와도 공연을 하자고 했었는데 오십여 명이 와준 것만도 감사하고 다행이었다.
많은 도로들이 차단된 상태에서 또 엄청난 데모 인파를 뚫고 와준 관객들은 너무나 특별했다. 공연 시작 전 시인 호르케는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레볼루션과 연관된 자작시) 우리가 왜 이런 상황 속에 공연을 하는지에 관한 짧은 멘트와 우리들 마음은 데모 시위에 참여하는 그들과 함께하며 학살된 죄 없는 학생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검은 리본을 달고 네 명의 무용가들이 네 개의 작품을 한다는 멘트를 하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우리들 각자 솔로는 다 제 각각 다른 스타일의 다른 이야기였는데 부토 댄서인 일본계 타일란드 소노코의 작품은 거의 무음에서 하는 즉흥적인 공연이었기에 고요한 가운데 극장 밖의 함성은 여전히 극장 안을 뚫고 들어와 소노코가 우는 듯이 마마 마마 하고 부르다가 멕시코 멕시코 하며 몸을 떠는 장면에선 관객들이 많이 울었다고 한다.
이날 공연은 관객들과 우리들 사이에 어떤 특별한 전류가 흘렀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은 통하지 않아도 서로 꼭 안아주며 감사의 인사를 나누는 특별한 공연이었다.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공연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또 한주가 가고 두 번째 주말은 월요일이 멕시코 공휴일이어서 가비가 태어나 자란 곳 이기도한 자팔라라는 곳으로 이박삼일 일정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집주인 엠마누엘이 일년 전 이곳에 별장을 지었는데 넓은 정원에 수영장이 있고 멀리 산이 보이고 뒤로는 호수가 있는 기막힌 경치를 안고 있는 멋진 현대식 건축의 새 집이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정원에서 수영도 하고 장을 봐서 요리도 하고 와인을 마시며 여유를 부렸다. 솔로 공연이 끝난 뒤여서 그런지 우리는 조금 더 릴렉스 할 수 있었던지라 그야말로 여자들만의 이야기로 온몸이 그을리는 줄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작은 동네는 관광지로 유명하다는데 사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미국인이었고 여기에서 노년을 보내기로 하고 집을 지어 정착해 사는 사람들도 대부분 미국인들이었다. 나에게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호수로 가는 길목마다, 집집마다, 작은 상점들마다 자유롭게 그려진 외벽 페인팅들이었다.
눈부신 햇살을 받아 더욱 화려하고 과감한 색깔들로 빛나는 다양한 벽화들이 온통 내 시선을 사로잡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멕시코는 분명 화가들의 나라인 듯하다. 그 어느 뮤지움을 걷는 것 보다 볼거리가 풍성하고 독특해 우리는 계속 환성을 지르며 벽화 그림들에 도취되었다.
가끔 그런 낮은 집들의 지붕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개들의 모습도 특이했다. 왜 개들이 옥상이나 집 지붕위에 올라가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구경을 하고 있는지 처음 보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이 동물의 구경거리가 된 듯한 이 장면은 그 자체로 영감을 주는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그 다음 주는 드디어 우리들의 콜라보레이션 공연날이었다. 공연 이틀을 앞두고 우리는 또 다른 라디오 방송 인터뷰와 함께 역시나 공연 당일날 TV 방송국 아침 프로에 라이브 인터뷰가 잡혀 있었다.
방송국에 일찍 도착한 우리들은 간단한 메이크업까지 받고 광고가 나가는 동안 스튜디오에 앉아 사회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첫눈에 범상치 않은 미모의 사회자는 물론 스페인어로 이야기하면서 직접 우리들에게 영어로 질문을 하고 통역까지 하면서 방송을 능수능란하게 이끌었다.
다시 한 번 이 콜라보레이션을 지원한 문화부에서 아주 적극적인 홍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극장에 도착하여 진행된 무대 리허설 과정은 특히 이 극장 스탭들이 영 내 맘에 들지 않았다. 어찌나 일도 느리게 하고 일하는 과정에 웃으며 농담까지 하며 여유를 부리던지 그런 그들의 모습이 드디어 저녁 시간이 되어가면서 난 점점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이들에겐 그 어떤 상황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당하는 강도 사건 또는 총살을 당하는 판에 웬만한 문제는 문제거리도 아닌 것이었다. 나 혼자 부글부글 하다가 결국 리허설이 늦어져 공연 시간이 삼십분이나 늦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도 관객조차 불평하는 사람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낙천적이라는 멕시코 사람들이 좋게 보면 참 따듯하고 정 많은 사람들이지만 이런 그들의 안일함이 그들의 발전을 느리게 하는 요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런 내 생각에 우리 모두 공감, 동감하는 분위기였다.
500석에 가까운 객석은 거의 다 찼다. 이날 공연은 전석이 무료 공연. 이 극장은 무용을 대중에게 쉽게 다다갈수 있게 하기위한 시의 정책으로 매주 수요일은 무용 무료공연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토론이 열린다.
역시나 적극적으로 토론에 임하는 관객들에게 내가 첫 번째 질문의 대상이었다. 관객들은 이 작품을 통해 한국의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를 궁금해 했다. 아무래도 <우먼, 바디> 라는 여자의 이야기였지만 네 나라 안무가들이 국제적으로 모인 공연이다 보니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작업을 했는지가 궁금했던 것 같았다.
나는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작품을 하고 표현을 할 때 단 한 번도 내가 한국인으로서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고민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던 간에 한국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답했다.
한류의 영향은 멕시코까지 퍼져 있는 듯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짧은 한마디이긴 하지만 한국어로 인사를 한다거나 한국에 관한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상대적으로 헝가리 안무자와 타일랜드 안무자들은 농담처럼 “멕시코는 한국을 무척 좋아하나 보다” 라고 하면서 사실 헝가리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인기란다. 타일랜드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소노코도 한몫 거든다. 기분 좋은 일이긴 했지만 계속 들리는 어지러운 우리나라 소식들을 접하고 있던 나로선 딱히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과달라할라 공연이 끝난 다음날 우리는 바로 마지막 공연장이자 최고의 휴양지로 유명한 뿌에로 바야르타로 향했다. 역시나 차로 달리는 국도와 고속도로 밖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중간중간 허름한 휴게소 같은 곳에 들러 사먹는 아보카도로 만든 와카몰레와 매콤한 음식들은 최고였다.
태평양을 끼고 있는 이 휴양지는 극장은 오래되고 낡았지만 유명한 컴퍼니들이 이 휴양지에 와보고 싶어서 이 극장에 초청받기를 원한다고 들었는데 과연 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특유의 건축물들이 정말 환성을 자아내게 했다.
극장은 너무 낡아 조명 시설도 부족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슝 먼 옛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 이었다. 그야말로 옛날 무성영화를 틀어주면 딱 맞을 것 같은 먼지 풀풀 나는 느낌의 극장 말이다. 그래도 낡은 나무 바닥은 정감이 느껴졌고 곧 우리는 익숙하게 최소의 조명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힘을 모았다.
우선 극장을 돌아보고 극장 디렉터가 예약해둔 작지만 아늑한 작은 식당에서 정성들여 준비한 음식을 먹고 있는데 캐나다인 관광객들이 옆 테이블에서 우리를 눈여겨보고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물었다. 마침 식당 안에 붙어있는 눈앞에 보이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이 공연을 하러 왔다고 하자 이런 저런걸 묻더니 공연을 꼭 보러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공연장에 와주었다. 이 작은 휴양지에 넘치는 관광객들 상대로 이 낡은 극장은 꽤 인기가 있는 듯 했다.
마지막 공연이어서 그런지 모두들 좀 너무 오버하는 경향이 없지 않나 싶은 느낌은 나만의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아주 즐겁게 마지막 공연을 끝냈다. 늘 그렇지만 마지막 공연이 끝난 다음에 먹는 저녁과 와인 한잔은 정말 꿀맛이었다. 더구나 이 극장 전통대로 극장장이 챙겨준 관객들의 후기가 적힌 메모지를 읽으며 우린 즐거운 쫑파티를 했다.
외국 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관객이 일반인들로 채원진다는 것이다. 멕시코는 경제적, 교육적으로는 우리보다 뒤져있을지는 몰라도 문화적 수준은 그 어떤 나라 못지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화가, 문학가, 건축가들 중에는 세계적인 위인들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드디어 공식 일정을 마치고 마지막 삼일은 이 휴양지에 머물며 배도 타고, 바다 수영도 하고 가비 아들이 잡은 물고기로 요리도 해먹고 썬탠도 하며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과달라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주는 자유시간이었다. 마지막 주는 멕시코시티에 가서 프리다카를로 하우스도 보고 뮤지움도 돌아보며 마지막 여유를 마음껏 누리고 돌아왔다.
햇살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그 무엇이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일 년 내내 따뜻한 나라들은 대부분 가난하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 지수는 잘사는 나라 사람들보다 행복하다. 아이러니 하지만 그런 게 우리들 인생이다. 독일은 참 안정적이고 안전한 나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지하고 또 문제 삼아 토론하길 즐기며 심각하다. 또 그렇기에 오늘의 독일이 있다. 우리나라는?
멕시코 콜라보레이션은 문화가 다른 우리 네 여자들의 깊은 문화적 교류의 시간들이었으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시간이라기보다는 많은 영감을 준 시간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