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영국 웨일즈에서 돌아본 나의 일상
무의미한 것들에 매달리지 않기
김윤정_재독 안무가. YJK댄스컴퍼니

 네덜란드 유학시절 영국 로얄아트칼리지(Royal College of Art)교수이자 사진작가이며 바디페인터로 활동하던 데이브 데거스가 감독하는 무용영화 <Dance on vulcano>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이 영화는 BBC방송에서 방영되기도 했었다.
 영국을 구성하는 네 개의 연방국 중 하나인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로의 5 박6일 여행은 그때 그 데이브 데거스를 오랜만에 만나기 위해, 음악을 좋아하는 열일곱 살 아들의 데모 CD 레코딩을 위해, 무엇보다 독일 입시를 코앞에 둔 아들과 겨울 방학에 떠나는 여정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영국에 갈 때마다 느껴지는(다른 유럽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아마도 섬나라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문화와 전통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딘지 시간도 느리게 가는 것 같고, 이 시대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유행과는 무관해 보이는 거리의 사람들, 펍에서 들려오는 영국식 악센트의 영어들, 오래된 LP를 파는 상점, 그리고 라이브 연주를 흔하게 들을 수 있는 펍과 클럽을 합쳐 놓은 듯한 술집들 그리고 높은 건물이 없어서 어딜가나 하늘이 무지 넓게 가까이 펼쳐져 있는 거리들이 카디프의 풍경이다. 영국 남서부 지역에 위치한 웨일즈는 1284년 영국 합병 이전까지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 문화가 타 지역과 확연히 구분된다고 한다. 언어도 웨일즈어와 영어를 쓴다.


 

 



 공항에서 데이브 데거스를 십여년 만에 만나 포옹하고 서로 어쩌면 그리 변한게 없냐는 말을 거의 동시에 하며 그의 집으로 향했다. 똑같이 생긴 주택들이 나란히 있는 거리에 다섯 개의 집을 사서 안으로 터서 한집을 만들었단다. 밖에서는 다섯 채의 작은 집들이지만 안에는 개인 사진 스튜디오와 음악 연습실, 그리고 완벽한 장비를 갖춘 녹음실까지 그야말로 예술 문화공간이다. 전형적인 이 영국식 집안에는 안소니 홉킨스, 피터 오툴 같은 자신이 직접 찍은 헐리우드 스타들 사진에서부터 그 옛날 내가 참여했던 이태리 남부 스트롬볼리란 화산섬에서 찍은 무용영화 사진, 바디 페인팅을 하고 그당시 찍은 내 사진까지 온갖 조각품들, 그리고 다양한 모양의 기타들과 소품들이 온 집안을 덮고 있어 그 사진 속 인물들과 작품들이 그들만의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는 듯했다. 그야말로 어디부터 시선의 초점을 두어야할지 모르게 만드는 공간들의 연속이었다.
 모든 예술가들이 잘나가고 못나가고를 떠나, 성공여부를 떠나, 데이브처럼 돈을 잘 버는 사람은 영국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이층에는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살고 있었다. 데이브는 자기 주변에 그야말로 꽤 똑똑하고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예술가 친구들에게 레지던스 하듯이 거의 무료로 방을 빌려주고 그중에 시인이라는 오랜 친구에게는 소정의 생활비까지 도와주며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후원을 해주고도 있었다.
 데이브는 BBC 방송에서도 일을 하고 상업 광고 사진으로 운좋게 돈을 잘 벌지만 자기보다 능력있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진정한 동정심과 존경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아무튼 그 옛날에도 참 기인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그의 기인같은 라이프는 여전해 보였다.
 데이브는 자신이 너무나 심각한 것들에 거부감이 있어서 순수 예술가는 되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가명의 이름으로(Stevie Stabbers라는 가명) 작품전시를 했는데 엄청난 호평을 받고 작품들도 잘 팔리는 억세게? 운좋은 어쩌면 정말 실력자 일수도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뭉크의 절규나 모나리자 같은 명화 그림 속에 배경이 현대판 카디프의 도시나 공원 같은 것을 합쳐서 그야말로 사진 그림을 교묘하게 합성해 만든 재미있는 리싸이클링 작품들이었다. 그는 이 그림들을 보여주며 작품 설명을 할 때는 마치 제 삼자의 작품을 이야기하듯이 꼭 그 가명의 작가 이름으로 이야기를 했다. 데이브는 늘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그러나 늘 주변을 챙기고 나누며 사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이다.


 

 



 둘째 날은 그야말로 식당에서나 볼 수 있는 불이 활활 오르는 가스식 불에 커다란 복을 올려놓고 인도요리를 척척 해놓는 데이브의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모여 파티를 했다. 무용을 가르치고 또 공연도 한다는 댄서 킴과 시인 폴,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는 케이트, 도자기를 만든다는 리엄은 모두 한집안에 살고 있는 멤버들이었다.
 무용수 킴은 자신의 무용을 하면서도 터칭 트루스라는 단체에서 장애인들과 즉흥 컨택을 하며 그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그들이 춤을 통해 더욱 행복하게 자신을 표출할 수 있도록 한다며 이 모든 것들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미 데이브가 찍은 동영상을 봤었는데 그들의 집중력은 놀라울 정도여서 나도 놀랐었다.
 우리의 대화는 영화, 미술, 무용 그리고 와인, 음악까지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새벽까지 이어졌다. 갑자기 오리지널 영국식 영어가 잘 들리지 않아 헤맬 때면 너무나 재빠르게 나를 도와주는 아들 녀석이 있어 든든했다.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뒤로는 미국식 영어를 쓰는 아들과 영국식 악센트의 그들의 대화는 아주 유연하게 흘렀다.


 

 

 다음날은 영국 드라마 <닥터후>에 자주 나오는 웨일즈 밀레니엄 센터(오페라하우스)에서 하고 있는 뮤지컬 <싱잉 인 더 레인>을 보러갔다. 하필 이시기에 컨템포러리 댄스 공연이 없었는 데다 워낙 뮤지컬 팬이 아닌 나로서는 아무리 데이브의 초대라 해도 그 비싼 티켓으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뮤지컬을 본다는 게 썩 내키진 않았지만, <싱잉 인 더 레인>은 내가 워낙 좋아하는 영화였기에 라이브로 영화한편 다시 본다는 맘으로 기꺼이 데이브의 초대에 응했다.
 극장에 들어서자 지층의 켠켠처럼 굴곡을 이루는 위층으로의 객석이 특이했고 극장 외부와 내부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었다.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배우들의 춤과 노래, 연기가 너무나 환상적이었고 고전적인 탭댄스와 무대 전체에 뿌려지는 빗속에서 퍼지는 노래와 춤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엔돌핀을 팍팍돌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다시 한번 내용이나 장르를 떠나 웰 메이드 된 작품들은 언제 어떤 시기에 봐도 좋은 감동을 준다는 것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아들 유진이 세대에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까 의아했는데 유진이는 기립박수까지 치며 즐거워했다.
 밀레니엄 극장은 2004년 웨일즈의 예술적인 비  

전을 위해 '모두를 위한 무대'가 필요하다는 제안 하에 캐피타 퍼시 토머스의 건축가 조나단 애덤스가 참여했다. 이 극장의 독특한 모양은 웨일즈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인 단단한 대규모의 지층을 본딴 것이라고 한다. 과거 웨일즈는 철강 산업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웅장한 지붕에는 카디프 만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섞인 바람에도 부식되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샴페인 빛깔과 질감의 스테인레스 스틸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기울어진 지붕에는 2미터 크기의 글자로 웨일즈어와 영어로 두개의 문장이 씌어있는데 밤이면 그 유리로 된 글자에 불이 들어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그 두 문장 중 영어문구의 뜻은 "이 돌에서 지평선이 노래한다." 웨일즈어 문구의 뜻은 "영감의 용광로로부터 마치 유리처럼 진실을 창조해내다"라는 문장인데 웨일즈의 시인 귀네스 루이스의 시구라고 한다. 이 문구와 건축이 너무나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그 지역 예술가가 직접 그렇게 참여할 수 있도록 연계하는 콘셉트조차도 참 좋은 생각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국내 유명 대기업의 미술관이나 중요한 공공 건축물들을 볼 때마다 외국의 유명한 저명인사나 건축가들에게 맡기지 말고 그 돈과 에너지를 자국의 작가나 건축가들에게 배려해 줄, 그들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늘 아쉬워했었다. 이 극장 안에는 1852 객석의 규모극장과 250석 규모의 스튜디오 극장, 웨일즈 BBC 미술관, 웨일즈 BBC 오케스트라가 있으며 댄스 스튜디오와 리허설 홀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 다음날은 아들 유진이의 날이었다. 데이브가 함께 연주하는 동료 밴드들이 데이브의 스튜디오로 하나둘씩 모였고 즉흥적으로 음악을 골라 함께 연주하고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며 녹음 들어가기 전 워밍업을 했다. 틈틈이 자작곡을 고치고 연습하던 유진이가 자신의 곡을 그들 앞에서 선보이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데이브의 녹음실에서 녹음을 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더 전문적인 새비로드란 스튜디오를 빌려 놓았고 그 스튜디오의 주인이 직접 기타 세션을 도와주고 녹음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비틀즈의 전설적인 앨범 애비로드란 이름을 유머있게 바꿔 “새비로드”라는 간판의 이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비틀즈 멤버들과 요코 오노가 녹음실에서 릴렉스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사진과 링고 스타의 출생신고 원본 사진 액자들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스튜디오 주인 알이란 사람이 갑자기 너무나 친밀감 있게 포옹을 하는데 보니 댄스 언 볼캐노 영화 음악을 맡았었고 그 당시 내목소리로 나레이션을 녹음하기 위해 카디프에 왔을 때 녹음을 했던 그 사람이었다.
 유진이와 알이 각자 악기 연주를 나눠서 녹음하고, 유진이의 자작곡을 녹음하고 믹싱을 했다. 늘 웃으며 스위트 하게 이야기하던 유진이가 녹음실에선 어찌나 까탈스럽고 예민한지 수정하는 데만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알은 프로답게 끝까지 웃으며 명쾌하게 유진이의 데모음악을 완성시켜주었다.

 

 

 



 카디프 해안과 항구의 모던한 건축들과 시내의 오래된 건축물들 그리고 고성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웨일즈는 확실히 다른 유럽과는 달랐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세계 최고의 해안휴양지 중 2위를 차지했다는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게 전제조건이었던 만큼 어딜 가도 산책하기 좋은 자연과 해안가가 펼쳐지는 곳이었다.
 생물 진화론을 쓴 찰스 다윈은 웨일즈 전역을 여행하며 지질학자로서 자연을 관찰하는 훈련을 했고 1930년대 유명했던 시인 딜런 토마스도 빼어난 웨일즈의 환경에 영향을 받고 영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카디프 시내 중심에 있는 국립미술관을 둘러보며 입장권 없이 들어간 것 같아서 오늘이 특별한 날이냐고 물으니 무료라고 한다. 여행을 가면 박물관 미술관 입장료가 의외로 비싸서 독일이 참 그런 문화를 즐기기엔 저렴하구나 했었는데 웨일즈는 7개의 국립 박물관이 모두 무료라고 한다.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의 마무리는 좀 생뚱맞아 보이는 이야기로 마감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늘 여행을 떠날 때 책꽂이에 꽂힌 채 언제가 내손길이 닿아주길 기다리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 칸에서 한두 권을 빼간다. 이번엔 우연히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책이었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서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여행 중에 그 누군가와 동행을 해도 꼭 나만의 의식처럼 조용히 아침산책을 하고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뭔가를 끄적거리는 버릇이 있다. 이것이 집안이나 호텔방에선 잘 안된다. 웨일즈 여행 동안 틈틈이 카페에 앉아 읽은 이 책은 제목으로 봐선 전혀 이런 내용인줄 모르고 가져갔는데, 엄청 적극적이고 활달하게 살던 모리라는 사회학자 교수가 루게릭이란 병으로 죽어가는 생의 마지막 몇 달간 살아있음의 의미, 죽어감의 의미를 우울하지 않게 덤덤히 그러나 진솔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이 중요하다고 선전하는 무의미한 것들에 매달리지 말기를,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길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사회가 결정하게 두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삶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삶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너무 당연해서 공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늘 놓치고 살게 되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작년, 그래봐야 이제 겨우 두달 전 아빠를 저세상으로 보내 드리고 이미 17년 전 저세상에 있는 동생을 떠올리며 죽음이 머릿속에서 여러 갈래로 파장을 일으키며 화두를 던지고 있었던 나에게 이번 여행에 우연히 이 책을 책꽂이에서 빼어든 건 우연처럼 보이는 필연같다. 여행을 떠나면서도 사실은 슬픔과 회환 그리고 가슴속에서 풀리지 않는 것들이 있었는데 이국적인 바람을 쐬며 또 이 책을 읽으며 조용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갑자기 겪은 아빠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이 결국 죽음으로 향하고 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에게 이 책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가슴에 깊이 새겨진다.
 그동안 참 나 자신을 위해 바쁘게 집중하며 살았다. 이제부터라도 주변에 소중한 가족과 인연들에게 진심어린 배려와 사랑의 손길을 뻗으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가자. 나는 적어도 그렇게 살고 있는 줄 알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웨일즈 방문은 나와 아들 유진에게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되었고 데이브 데거스에게 감사하며 또 아들에겐 그동안 어쩔 수 없이 방목했던 미안함을 조금은 갚을 수 있었던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2014.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