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을 건져 올려 현재에 내려놓는 순간들이었다.
예술가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어렵고 중요한 것은 연속성과 연결성 있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 일이다. 대부분의 지원사업들이 신작을 지원하는 데 반해 레퍼토리 지원이 적은 시스템을 두고 보더라도 그렇다. 더불어 관객층이 두텁지 않은 실정상 하나의 작업을 여러 번 재공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절대 재공연 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오래 전 작업이 올해 2019년 다시 살아났다. 2015년 우크라이나 첼론카 현대무용 페스티벌에서 약 2개월 가량의 레지던시 결과물로 선보였던 〈Dusty Old Things〉를 멕시코의 아가베 페스티벌에서 현지 무용수들과 함께 재창작하게 된 것이다.
멕시코와의 인연은 2017년 예술경영지원센터의 한국-멕시코 커넥션 사업을 통해 멕시코 현대무용 페스티벌인 END에 리서처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당시 END 페스티벌과 더불어 멕시코 국립현대무용단인 CEPRODAC 을 방문해서 워크샵을 진행했었고, 교류의 일환으로 멕시코 예술가들이 2018년 PAMS 기간 한국을 방문하며 그 인연이 이어졌다. 2017, 2018년 두 해에 걸쳐 커넥션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발전시켜보자는 이야기가 오고 갔고 몇 번의 시도는 넘어지기도 했지만 올해 멕시코 측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술경영지원센터나 다른 한국 기관의 지원 없이 전적으로 멕시코 측의 지원만 받고 진행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위에서도 일회성 공연 사업 지원의 아쉬움에 대하여 언급하였듯, 예술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커넥션을 발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커넥션 사업을 통해 발전된 프로젝트가 기관의 별도 지원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신청한 지원들도 미끄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작업을 진행하게 되어 감사할 다름이다.
아가베 페스티벌 (정식명칭 AGAVE Intercambio Escénico)은 할리스코 주에 위치한 멕시코 제 2의 도시인 과달라하라에서 진행되었다. 과달라하라는 데낄라의 본 고장으로 페스티벌 이름인 아가베 AGAVE는 데낄라를 만들 때 주원료가 되는 식물이며 할리스코 주와 과달라하라를 대표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아가베 페스티벌에서는 전 멕시코 국립현대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던 Eleno Guzman과 한국의 SIDance에서 여러 번 작품을 한국에 소개했다는 Carlos Gonzales, 멕시코 END 페스티벌에서 네트워킹 시간을 가졌던 안무가 Jaciel Neri 등의 렉처가 이루어졌다. 렉처는 대부분 젊은 예술가들의 마인드셋, 안무적 관점을 제시하는 내용들과 예술가의 해외 진출에 대한 내용이었다.
페스티벌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가 교육과 네트워킹이다 보니 학생들 혹은 이제 막 첫 작업을 시작한 친구들의 작업을 보고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들도 있었다. 겨우 이들보다 몇 작품 더 만들어 본 것이 전부인 내가 과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할 때마다 나의 선생님과 멘토의 말들을 떠올려야 했다. 거기에는 아직까지 무겁게 남아있는 말들도, 여전히 자랑스럽고 뿌듯한 말들도, 작업을 할 때마다 다시 한번 곱씹게 되는 질문도, 마음에 새기는 말들도 있었다. 누군가가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 당장은 사라진다 해도 언젠가 한번쯤 떠오를 수 있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은 마음은 아마 나의 선생님과 멘토에게서 받은 마음의 기억인 것 같았다.
이외에도 주로 젊은 안무가들의 작업을 볼 수 있는 공연 프로그램들이 채워져 있었다. 낮에는 과달라하라 시내 한 가운데에서 춤 사진전과 워크샵이, 저녁에는 아름다운 밤거리를 배경으로 한 거리 공연이 이어졌다.
ⓒJaime Martín |
레지던시 첫 날, 무용수들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자리에서 아가베 페스티벌의 디렉터인 Jairo Heli Gracía 와 Betsaida Pardo Zepeda는 레지던시 작업 과정의 중요성에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과달라하라의 무용학교를 졸업하거나 졸업을 앞두고 있는 무용수들이 퍼포머로 참여했는데, 이러한 기관 사이의 교류가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점, 외국인 안무가와 작업이 처음으로 시도되는 점 등을 들며 무용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레지던시에 참여하기로 했었으나, 이 두 디렉터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적극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들과 나누어야겠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외국에서 현지 무용수들과 작업을 할 때면 늘 언어에서 오는 시간의 지연이 있다. 다행히 이번에는 페스티벌 디렉터 Jairo와 Betsaida가 이끄는 무용단인 Hikuri Dance의 무용수 Shalli가 어시스턴트로 작업에 참여하게 되어, 미리 한정적인 시간 동안 언어적인 부분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해결해 나갈지와 함께 작업 설명과 진행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퍼포머로 참여하는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Dusty Old Things〉는 기억에 관한 작업이다. 기억은 그것을 구성하는 자가 선택한 마테리얼의 집합이며, 어쩌면 기억이란 새롭게 창조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 동안 혹은 저장된 기간 동안 변형되는 방식,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에 관한 리서치로 '기억을 기억’하는 작업이다. 죽음에 관한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을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한 작업은 2015년 작업 이후 댄스필름인 〈Theory of Cremation〉으로 발전되었었고 이번 레지던시를 통해서 말 그대로 ‘기억을 기억하는’ 작업이 되었다.
정다슬 〈Dusty Old Things - the piece of you〉 ⓒJaime Martín |
레지던시는 2015년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는 시간 동안 2015년의 비디오를 한참 들여다보기도 했다가 그냥 지나치기도 했다. 나름 작업과 그 과정들을 잘 아카이빙해왔다고 생각했는데도 계속 기억을 더듬거렸다. 당시 함께 작업을 했던 무용수들의 얼굴과 이야기들, 함께한 시간들이 떠오르기도 했고 가라앉기도 했다
대부분의 장면들이 움직임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과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퍼포머들이 마테리얼을 직접 발전시키기 때문에 그 때와 같은 방법론을 통해 장면을 발전시키고 싶었다. 당시 작업 노트를 펼치고 장면이 어떻게 발전되었었는지, 어떠한 메소드를 썼었는지 복기했다. 공연 영상을 보며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던 혹은 아쉬웠던 부분들, 관객들로부터 받았던 피드백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유지하고 싶은 장면들, 버리고 싶은 장면들과 더불어 구성을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무용수들과 함께 새로 마테리얼을 발전 시켜야하는 부분들을 나누어 작업을 진행했다. 아직 안무가로서 조금의 커리어뿐이지만 그 안에서 가장 앞에 있는 작업 중 하나이기 때문인지 발전시키거나 버리고 싶은 장면들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났다.
정다슬 〈Dusty Old Things - the piece of you〉 ⓒJaime Martín |
무용수들이 노래를 허밍으로 부르는 파트는 그때도 지금도 유지하게 된 장면 중 하나인데, 이 장면 작업을 하며 당시 무용수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그들이 흥얼거리던 노랫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작업이 완성될수록 새로운 노랫소리가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나갔고, 그렇게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들이 얹혀졌다.
정다슬 〈Dusty Old Things - the piece of you〉 ⓒJaime Martín |
2015년 공연되었던 〈Dusty Old Things〉는 2019년 〈Dusty Old Things - the piece of you〉라는 제목으로 아가베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 과달라하라 시내의 극장 LARVA에서 공연되었다. 축제의 마지막 공연이어서인지 많은 관객들이 찾아 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움직임과 더불어 시노그라피와 의상이 주는 ‘한국스러운’ 인상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무대에서 들려진 이야기들에 대해 질문을 던져주었다.
‘the piece of you’라는 부제는 나의 기억을 떠올리며 만든 부제였지만 퍼포머들이 들려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 통해 그것은 시각에 따라 나의 이야기이기도, 당신의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퍼포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관객 중 한 명은 어딘가 묻혀졌거나 잊혀져 있던 아주 작은 기억을 떠올리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정다슬
독일 함부르크와 한국 서울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의 성질과 개인이 지니는 가치를 주재료로 하는 작업을 추구하고, 안무의 개념과 가능성을 넓히는 데에 관심을 두고 타장르와의 협업도 지속하는 중이다. 2013년부터 <춤웹진>에 비정기적으로 글을 게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