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공공하는 몸- 프롤로그〉를 마치며
시간을 바라보는 시간
정경미_드라마트루그

회백색 콘크리트 벽돌로 둘러싼 30평 남짓의 공간, 길게 늘어뜨린 하얀색 알루미늄 블라인드가 비교적 높은 층고위에 매달려 천천히 회전한다. 낮은 조도 탓에 시야는 조명에 기대어 확보되고 어스름히 깔린 조명 사이로 상반신을 탈의한 세 명의 여성이 각기 다른 형태로 굳어있다. 커튼을 열고 들어서자 조각상처럼 굳어진 몸을 마주한 관객은 생경함이 가시기도 전에 착석 없는 공간임을 확인, ‘자유롭게 이동하며 관람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적힌 안내문에 따라 자유롭게(자유롭지 않지만) 이동하며 몸을 관찰하거나 분위기에 적응해 나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서서히 움직이던 몸은 반쯤 누운 자세에서 숨을 크게 몰아쉬기 시작한다. 들숨과 날숨이 교차될 때마다 흉곽을 중심으로 몸 전체의 선과 형태 변화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저 숨을 쉰 것 뿐 인데 급격한 움직임으로 체감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세 명의 퍼포머는 각자의 위치에서 아주 느리게 자리를 고쳐 앉아 관객을 응시한다.

 

   위 내용은 ‘플랫폼엘 라이브 아츠 프로그램 2018’ 당시 초연된 〈공공하는 몸_프롤로그〉 중 첫 장면을 짧게 묘사한 글이다. 퍼포머의 과잉된 느린 움직임은 시각적 ‘가독성’을 높여주는 장치로서, 몸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하고 몸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바라보게 하는 의도로 연출되었다.


 
 


ⓒ조현우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보고 있는 시간. 

   바라보면서 흘러가는 시간.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간.

   바라보면서 다른 응시를 유도하는 시간.

 

   그 시간에 대하여, ‘그 시간’이 갖는 유일무이한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만남

 

필자는 문화예술교육분야에 종사하는 예술교육자다. 

   관객으로서 공연을 감상하고 주변 사람들과 시시콜콜 공연 평을 나누는 정도의 지식과 정보력을 갖춘 ‘관심 많은 관객’ 정도일 뿐, 엄밀히 말하자면 무용 씬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정다슬 안무가와의 끈질긴 인연 덕분에 ‘관심 많은 관객’의 선을 넘게 되었고 그 계기가 이번 〈공공하는 몸- 프롤로그〉 작업의 드라마투르그 역할이었다. 그에게 참여 제안을 받았을 당시, 무척 기뻤으나 한편으론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엄습했다.

   주제나 들어보자 싶어 주제를 물었고 ‘공공성에 관한 몸’을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온전히 나의 몸은 나의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있었고 사회 안에 짙게 깔린 행동방식을 다양한 갈래로 들여다보고자 했다. 유럽에서 오랜 기간을 활동해 온 아시아 여성 안무가가 숱하게 감지하고 체감했을 법한 본인의 에피소드를 수화기 너머로 살뜰히 들려주었고, 듣는 동안 그가 품고 있는 대상화에 관한 의문에 호기심과 공감이 갔다. 평소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관심사와 맞물렸던 점이 참여의 요인이긴 했으나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건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라는 확신의 찬 정다슬의 목소리였다.



 

과정의 시간

 

정다슬 안무가와의 동행은 퍼포머 섭외부터 시작됐다. 퍼포머와의 미팅 시 질문의 형태와 선호하는 캐릭터를 통해 안무가의 주안점을 눈여겨보고 작업의 방향을 짐작해갔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전시나 공연을 보면서 감상이나 감상에 꼬리를 무는 다양한 생각들을 공유했다. 함께하는 과정의 시간과 비례해 공유될만한 많은 이야기가 축적되었다.

   듣고, 듣고, 말하고 들었다. 듣고 말할수록 각자의 위치가 명확해지기도 흐려지기도 혼란이 가중되기도 했지만 시간을 함께 하고 서로를 알아가고 있음에 초점을 뒀다.

   작업에 착수했고 예상대로 작업의 형태는 모래성처럼 쌓고 무너지고 휩쓸려갔다.

   다시 쌓고 무너지고 휩쓸리는 순서가 매 순간 반복됨 속에서도 공고히 되는 형식, 방법을 차근차근 건져 올렸다. 과정의 시간은 우리에게 견뎌내고 전개할 수 있는 꾸준한 인내와 추진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 장면의 충돌 

   안무가는 조각상 장면을 통해 직접적으로 몸을 바라보게 하고 바라보던 몸이 관객을 바라봄으로서 바라보고 보여지는 관계의 전복을 가시화 시켜보고자 하였다. 그리고 운동성과 역사성을 관통하는 소재로서 작동할 수 있는 국민체조를 주된 머티리얼(재료)로 활용해 보았다. 그러나 국민체조 장면이 조각상 장면과는 전혀 다른 무드를 지닌 탓에 흐름을 방해할 것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은 안무가의 안무 방법과 순서에서 자연스럽게 발생되는 근본적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장면간의 간극을 좁혀 갈 방안, 혹은 완전하게 한 장면을 심도 있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하여 의견들을 나누며 논의했고 과감하게 두 장면을 모두 다뤄봄으로써 3부작 중 프롤로그답게 총체적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였다. 

 

   ​- 언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갈래의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퍼포머의 경험에서 도출된 대상화에 관한 다양한 텍스트를 수집했다. 텍스트는 관객과 직접 눈을 맞추거나 조용히 다가가 귓가에서 속삭여졌고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닌 텍스트를 다듬고 수정하면서 통합된 형태로 나아갔다. 첫 장면 텍스트는 나, 당신, 저기, 저 여자, 이 남자 등을 지목하고 “내가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 동시에 일어나는 바라봄을 언어로 관객에게 건네며 물리적 바라봄을 대상화에 비유해 보고자 하였다.         

 

   ​- 변형

   국민체조 특성 상 변형이 주는 의미는 유효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속도, 반복, 위치의 변형을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느리거나 아주 빠른 속도로 동작을 실행하여 긴장과 수축을 유도해보거나 정지 동작과 빠른 동작을 함께 배치하여 동작의 성격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주로 제자리에서 이뤄지는 수직적 운동이라는 움직임 특성을 반영하여 1978년부터 진행된 포프엘의 “기어가기”를 주목, 효과적 변형의 가능성을 확장해 보았다. 포프엘의 기어가기는 수직성에 대한 비판을 제안한다. 수직성은 “정치권력의 야만성, 그리고 경찰, 군대, 관료제와 같은 규제의 수단이 지닌 야만성과 맺는 친밀한 연계성”에 키네틱한 비판을 제시한다.(Lefebvre 1991: 287) 이 점은 우리나라의 국민체조가 만들어지고 보급되던 유신체제 시기와도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어 수평적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고 작업과 관련해 논의되었다. 지금껏 구축해 온 구성안에서 수평적 움직임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국민체조의 수직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국민체조와 수평적 움직임은 여전히 고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 사라짐

   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의 대하여’는 대상화의 사라짐을 논한다. 그는 “인간은 명명하고 개념화하면서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데 그 사물은 명명되는 순간, 사라지고 루이스캐럴 체셔 고양이의 형상처럼 흔적을 남긴다”고 말한다. 그 부분에 공감했고 집중했다. 대상화 된 사물은 명명된 그것으로부터 비켜가 스러지지만 흔적을 남긴다는 점에 착안하여 우리 눈앞에 인지된 대상화 된 몸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 그려보고자 하였다. 그것은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필요로 했고 안무가와 실현 가능성을 논할 수 있었다. 발을 구르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는 상태에서 암전이 된다거나 퍼포머를 향해 스모그머신을 뿜어 신체의 형상을 사라지게 한다. 혹은 블라인드가 내려가고 청각적 이미지가 서서히 물러가는 듯한 이미지를 첨부하여 극중 내러티브로서 발전시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재정, 장소 등의 여건을 염두 해두고 풀어갈 문제였다.

 

 
 

  

ⓒ조현우




   ​- 통과와 차단

   프란츠 카프카 ‘법 앞에서’는 대상화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르조 아감벤의 ‘법 앞에서’에 대한 해석이다. 아감벤은 법이라는 문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법의 문 앞에서 죽어간 시골 남자에 대하여 기존 철학자들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시골 남자가 결코 법 앞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기존 법의 효력을 멈추게 한 다시 말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보고 “시골 남자의 모든 행동이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해서 결국 문을 닫도록 하려는 인내심 가득한 고도의 전략으로 볼 수 없는지” 질문한다.(HS 65/131) 그리고 시골 남자의 시도는 성공한다. “법의 문을 영원히 닫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HS 65/131) 

   여기서 ‘법 앞에 문’은 율법, 권력의 의미로 환원된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대상화의 개념 또한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로부터 발생한다고 봤을 때, 아감벤의 해석을 대입해 보고 싶었다. 블라인드가 대상화의 상징적 표상으로 작동됨과 동시에 ‘대상화의 문’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문은 계속 열려 있지만 오히려 닫혔을 경우 무력화된 의미, 즉 대상화의 효력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음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해 논의와 시도가 이어졌다. 

   블라인드의 창살은 열리기도 닫히기도 하면서 빛의 통과와 차단을 조절한다. 사적인 몸이 대상화 될 때, 블라인드의 문은 효력이 발생하는 관문의 의미로 장치시키고 통과와 차단을 조절해보는 것이다. 실제로 블라인드 창살의 열고 닫힘을 실행하였고 우리가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다르게 미미한 변화만이 느껴졌다. 또한 블라인드가 고정되지 못하고 매달린 상태였기 때문에 능숙한 조절이 불가능했다.

   ​- 역할 

   드라마투르그로서 매끄러운 서사구조를 위한 관련된 서적 수집, 모든 사유를 대상화와 연관지어 보면서 대상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과 상징을 유추하고 작품의 상징적 필연성을 구현하고자 했다면 안무가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실험적 실현을 통해 파생될 이야기는 열어두고자 하는 방법론적 접근법의 중점을 두었다. ‘안무가와 드라마투르그의 차이가 여기서 비롯되는구나’고 느꼈다. 이런 상황을 어렴풋이 예상 했지만 차이는 실제로 일어났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재밌었다. 지나고 보니 접근방식의 두드러진 차이로 빚어진 충돌은 작품을 더욱 입체적이고 풍부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 방법적 고찰

   방법으로 접근한 방식은 상징적 필연성의 실현보다 더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더 활짝 열려있었다. 의도되지 않음은 오히려 다른 상징을 의도한다. 여전히 고민의 연속이다.

   ​- 듣는 행위

   ​과정의 흐름을 관찰하고 경청했다. 드라마투르그의 보고 듣는 행위는 스스로를 위한 행위기도 했지만 안무가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행위였다. 안무가는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꺼낼 수 있고 다시금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답을 찾아 나갈 수 있었다. 듣는 이가 탁월한 해법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듣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렇게 한올 한올 채워져 완성된 결실은 과정들의 총합들로 드러났고 그러모은 과정의 시간은 결과의 무엇보다 소중했다.                              



 

기다린 그 것

 

〈공공하는 몸-프롤로그〉는 플랫폼엘에서 주관하는 ‘플랫폼엘 라이브 아츠 프로그램2018’에 선정되어 2018년 10월26일부터 28일까지 세 차례 공연과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의 ‘창작실험–과정과 공유’로 2019년 2월16일 쇼케이스 방식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플랫폼엘 초연 이후, 관객의 반응을 민감하게 수집, 관객의 다양한 의견들을 들을 수 있었고 그 중 우리도 문제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국민체조 장면과 조각상 장면의 동떨어진 이질감과 국민체조 장면의 의미 없는 변형에 관한 의견이었다. 4개월 뒤 올릴 쇼케이스에 대비해 다시 고민했다. 장소 여건상 퍼포머 탈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국민체조 장면을 심도 있게 다뤄보는 것에 힘이 실렸다. 기존의 리서치가 주로 대상화에 포커싱되었다면 이번엔 주로 국민체조에 집중되었다. 국민체조의 방식, 움직임 성격, 역사적 프레임을 통합해 텍스트를 만들고 국민체조의 동작을 파편화 시켜 조각의 성질을 띄는 형태로 연출했다.      



 

  

ⓒ조현우, 2018 공연예술 창작산실




   ‘국기에 대한 경례’ 음악에 맞춰 천천히 내려오는 블라인드는 대상화의 상징적 표상으로 작동하고 간격을 두고 다양한 높낮이로 설치된 8개의 블라인드는 퍼포머를 드리우며 관객의 시야를 방해하거나 편집시켰다. 또한 현장에서 이뤄진 나레이션을 통해 프레임의 작동을 가시적으로 드러냈다.  

   쇼케이스는 무사히 마무리 되었고 간단하게 이뤄진 관객과의 대화는 3부작으로서의 나아갈 방향에 참고자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동시대 춤에 대하여

 

   멈춰있음과 말하기, 그리고 국민체조는 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춤은 무엇이고 더 나아가 동시대의 춤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필자는 동시대의 춤을 ‘춤 스스로 춤의 경계를 허물고 만물의 모든 움직임을 포괄하여 자유로운 공공적 몸의 회복을 촉구 하는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춤은 더 이상 무용수의 전유물이 아닌 모두의 것이고 이미 우리는 각자의 몸을 갖고 ‘사회적 안무’ 속에 살아가는 무용수이지 않은가.

   한 개인의 몸은 사회 안에 머무는 동안 ‘사회적 안무’ 속에 살아가고 그 ‘사회적 안무’는 모든 개인을 포괄할 수 있는 유연함을 추구해 나가는 것, 춤이 갖는 진보성은 이 지점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공공하는 몸-프롤로그〉는 우리 몸의 축적된 ‘사회적 안무’를 복기해봄으로써 시대 속에 우리를 반추하고 나아가 자유롭고 유연한 공공적인 움직임의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공공하는 몸-프롤로그〉과정과 공유  ⓒ2018 공연예술창작산실




과정 – 기다림 – 도래를 기다리며

 

앞서 언급한 공연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시간이 흐른다’를 음미해본다. 

   감각의 이정표는 기척도 없고 굳어진 몸처럼 굳어버린 것 같은 공간은 시간에게 시선을 뺏긴다. 그런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은 현재를 견뎌내고 도래할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관객은 굳어진 퍼포머를 통해 각자의 다른 시간을 산다.

 

   시간을 겪는 것,

   시간을 겪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무엇인지 모른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그 시간들을 우리는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필자가 작업에 참여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 그 기다림의 시간일 것이다. ‘과정의 시간’ 동안 마주하고, 내려놓고, 뒤엉키고, 골똘하고, 침묵하고, 지루하고, 간절하고, 답답하고, 즐거웠던 기다림은 시간에 촘촘히 덧대지고 결과물에 고스란히 녹아있더라. 돌이켜보니 과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되었다.

   그랬다. 효율은 제멋대로 늘어진 시간의 진가를 알지 못한다.

정경미

인간에 관심을 두고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무용.동작치료를 전공하고 현재,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동 예술치료를 맡고 있으며 놀이하는예술가, 꿈다락토요문화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문화예술교육 컨텐츠를 기획, 실행하고 있다. ​ 

2019. 03.
사진제공_조현우, 공연예술창작산실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