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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의 두 번째 해외투어
GOBLIN PARTY의 〈은장도〉가 뉴욕 Japan Society에 초청되어 2019년 1월 4일, 5일 공연을 올렸다. 〈은장도〉가 데려다준 두 번째 나라는 미국 뉴욕이었다. 3년 전 봄, 대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4명의 어설픈 무용수들이 고블린파티에 모여 〈은장도〉라는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 해외까지 나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작년 Aerowaves 유럽 현대무용 플랫폼에 처음 초청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눈물 날만큼 기쁘고 감동적이었다. 먼 유럽 땅, 불가리아까지 무거운 박스 소품을 들고 갔지만 힘든 줄 모르고 감격스러워 부푼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그런 와중에 Aerowaves에서 우리를 기억해준 사람이 있었다. Japan society의 예술감독 Yoko Shioya로 부터 뉴욕에 〈은장도〉 공연을 초청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럽에 이어서 아메리카라니, 꿈만 같았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이번 투어에서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설렘에 또 다른 기대를 안고 한 해가 끝나기도 전에 한국을 떠났다.
작품 〈은장도〉
작품 〈은장도〉는 2016년 8월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초연되었고 그 후 현재까지 20분, 60분 작품으로 재연되어 왔다. ‘은장도’는 두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 번째는 한국의 옛 과부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몸에 품고 있던 칼 '은장도'이다. 이는 작품 속 인물들의 감정적 동기가 되어준다. 그리고 우리가 작품을 위해 선택한 두 번째 은장도의 의미는 네 명의 여자들이 살아가는 가상의 섬 '은장도' 이다. 이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되어준다. 여자들만 남아 있는 섬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자들은 여성 그 이상의 다양한 인간의 모습으로서 섬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부드럽다가도 억척스럽게 변하며, 투박하지만 예리한 칼날 같은, 수줍어하면서도 잔뜩 화가 나있는 모순된 감정을 지닌 여성의 인간들이 존재한다. 여자 무용수들이 몸에 ‘과부’라는 캐릭터를 입혀 ‘여성성’ 아래 감추어진 강요와 모순, 시대적 성향 아래 여성들이 가진 공통된 감성, 사회가 만들어낸 ‘여성’이 남몰래 가진 호기심과 타고난 인내심 아래에 억압된 자유 등, 먼 역사 속의 ‘여성’과 현대의 ‘여성’의 만남을 통해 발생하는 흥미로운 해프닝을 찾아나가는 작품이다.
고블린파티 〈은장도〉 |
해외에서의 〈은장도〉
3년 동안 꾸준히 국내 관객들에게 선보였던 〈은장도〉는 대사, 합창, 랩 등의 다양한 요소와 춤을 접목한 새로운 시도를 이끌어낸 무용작품이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외국인 관객들에게 선보일 때면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공연이 끝나면 외국인 관객들은 작품 안에서의 말했던 대사와 합창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궁금해 했고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며 혹여나 이해하기 힘든 한국말의 대사들이 그들이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아쉬운 마음이 들어 이번 투어를 떠나기 전,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런 걱정들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고민을 하던 중, 〈옛날 옛적에〉라는 작품이 해외 투어를 갔을 때 작품 속의 한국말로 된 대사들을 유창하진 않지만 짧은 영어대사들로 바꾸어 작품을 선보이니 외국인 관객들의 만족도가 훨씬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 〈은장도〉 또한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말의 대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작품에 넣기로 했다.
작품 속에서 대사를 도맡아 하는 무용수 이연주는 긴 영어 대사를 외운다고 꽤나 고생을 했다. 드레스 리허설까지 틀리기를 반복하던 대사는 공연이 되니 빛을 발했다. 작은 유머를 겸비한 대사들에 관객들은 즉각적으로 호응을 해주셨고, 공연이 끝나고는 더 이상 작품 내용에 대해 물어보기 보다는 우리의 작업 과정과 ‘고블린파티’라는 그룹에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셨다. 비록 원어민처럼 자연스럽지 않았지만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은장도〉의 이야기가 한 뼘 더 관객들에게 잘 스며들 수 있었던 것 같다.
뉴욕의 극장
뉴욕에 도착을 하고 난 후 1월 1일, 2일은 14시간의 시차를 몸이 이겨내질 못해 단원들 모두가 몽롱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따로 연습할 공간이 없어 숙소에서 간결하게 순서를 맞춰보고 공연 하루 전 1월 3일, 극장에 가서야 진득한 연습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무거운 박스 소품을 택시에 싣고 뉴저지에서 맨해튼의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에 들어가는 첫 날인만큼 설렘과 긴장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막상 공연장에 들어서니 걱정이 사라졌다. 무용수들은 새하얀 댄스 플로워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대를 처음 본 순간 모두 〈은장도〉를 위한 공간 같다며 입을 모았다.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무대는 보는 사람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무대가 낯선 우리들을 위해 감독님은 무대에서 충분히 리허설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셨고 덕분에 여유 있게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처음이라 낯선 공간이었지만 극장의 분위기와 사람들 덕분에 따뜻한 기운을 느끼며 리허설을 진행했다.
〈은장도〉의 리허설에는 특히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맞추어 나가야한다. 작품에 담겨진 합창, 랩, 대사 등이 관객과의 소통에 있어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합창의 소리가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는지, 마이크를 통해 전하는 랩과 대사가 음악과 함께 잘 어우러지며 나오는지 체크하며 현지에 있는 감독님들과 꾸준히 소통을 했다. 함께 간 김진우 감독님, 공동안무가 임진호, 지경민 선생님 모두가 함께 음악, 조명 등을 꼼꼼하게 체크하며 첫 번째 리허설을 무사히 마쳤다.
이 극장의 특별한 점이 있다면 무대 위의 댄스플로워를 굉장히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었다. 작품과 잘 어울리는 하얀색의 바닥이었는데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색깔이 입혀진 물을 바닥에 쏟는 장면으로 인해 바닥의 색이 변질 될까 감독님들은 신경을 곤두세우셨다. 바닥이 끈적거리지 않게 당도가 없는 음료수를 담아 쏟아보고 난 뒤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지막 장면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감독님들의 예민한 반응에 살짝 풀이 죽기도 했지만 극장을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태도가 극장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 또한 극장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끔 만들었고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해주었다. 극장에 매일 같이 나오는 스태프들이 그들의 공간과 물건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가져야할 태도가 아니었을까. 예민했던 바닥과의 싸움을 뒤로하고 극장에서의 기술 리허설을 성공적으로 끝낸 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극장의 문화
작품으로 해외 투어를 갈 때마다 관광으로 볼 수 있는 겉모습의 나라 이상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을 몸소 느끼고 돌아오는 듯하다. 나는 운이 좋게도 어릴 때부터 해외로 여행을 다닐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작품으로 여행을 갈 때면 내가 가보았던 곳이어도 그 곳이 다시 새롭게 보였다.
우리가 갔던 나라는 미국이었지만 초청해준 곳은 Japan Society로서 극장에는 일본인 감독님들과 스태프들로 이루어져있었다. 극장에서는 일본어, 영어, 한국어 3개 국어가 극장 안을 메우며 더욱 국제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투어를 갔던 김진우 무대감독님은 현지의 무대 감독님, 조명 감독님과 영어로 소통을 하며 〈은장도〉가 더 빛나게끔 만들어주셨다. 진우 감독님은 본인 특유의 위트를 잃지 않았고, 덕분에 처음 만난 해외의 감독님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예민한 상황을 구렁이 담 넘듯 잘 넘어가며 웃음이 가득할 수 있었다. 현지 무대감독님과 극장을 둘러보니 미국의 거창함과 더불어 일본의 꼼꼼함이 곳곳에 묻어나있는 공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무용수들이 모두 겁이 많아 되도록 리허설을 많이 가지려는 편이라 자연스레 극장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극장에 계신 스태프 분들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곤 한다. 다행히 깨끗한 공간과 준비해주신 음료와 다과, 따뜻한 말투 등의 작은 배려들이 우리가 편안하게 극장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셨다.
공연이 끝나고의 작은 리셉션 파티에서는 뉴욕투어를 도와주신 이영찬 선생님이 함께 해주셨다. 무대 위 공연을 함께 준비했던 스태프 분들과 관객들의 작품에 관한 질문에 유창한 영어로 작품 〈은장도〉와 고블린파티를 소개해주셨고, 낯을 많이 가리는 단원들 곁에 항상 머무르며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셨다. 긴 시간 이야기를 하며 뉴욕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고충, 공연 등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행을 다니며 바라본 뉴욕은 높고 큰 건물에 많은 인종이 살고 있는, 나와는 멀리 떨어진 세계로 느껴졌지만 뉴욕의 극장에서 지내며 현지 사람들과 함께 지낸 뉴욕은 모두가 힘을 합쳐 공연을 만들어가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세계였다.
무대 위의 〈은장도〉
다행히 어느 정도 시차적응을 한 상태에서 공연 날 1월 4일, 아침이 밝았다. 극장이 맨해튼 중심가에 위치해 있어 우리는 미국 드라마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을 느끼며 극장으로 향했다. 재공연을 자주 했었던 20분의 길지 않은 작품에도 무대 위에만 가면 처음 작품을 만난 듯 동료들과 함께 맞춰야할 부분이 많았다. 옅은 긴장감과 함께 리허설이 끝나고 공연을 위한 준비를 했다. 꼼꼼하게 몸을 풀고, 의상을 입고 임진호 선생님, 지경민 선생님, 성은언니, 경구, 연주와 함께 고블린파티의 작은 의식을 진행했다. 공연 전마다 공연과 무대에 대한 감사, 서로를 위한 기도 등을 위한 짧은 우리만의 의식이 있는데 3년 동안 은장도를 하며 뉴욕까지 오게 된 시간들이 스쳐지나가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공연이 시작되고 우리는 대기실로 향했다. 작년 처음 해외에서 공연을 할 때에는 4명 모두 손을 벌벌 떨며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며 대기했었는데 1년 사이 성숙해진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덤덤하게 긴장을 받아들이며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암전이 된 무대에 올라가기 위해 4명이 모두 손을 잡고 무대 옆에 섰다. 말이 없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서로의 손을 꽉 잡으며 온전히 4명이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같이 연습했던 작품이 자리를 가득 채워주신 관객들 앞에 서니 또 다른 〈은장도〉가 되어 선보여졌다. 20분이 2분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경민 선생님, 진호 선생님과 함께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며 마무리 되었다.
뉴욕의 〈은장도〉, 안녕!
뉴욕에서의 일주일이 지나고 한국에 무사히 돌아왔다. 일상으로 돌아오니 뉴욕에서 한 공연이 더욱 꿈처럼 느껴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무용을 해온 나는 해외에서 작품이 초청되어 공연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가슴 깊이 되뇌었었다. 어쩌면 너무 어려운 일 인 것 같아 남들에게 말도 꺼내지 못했었다. 작년부터 두 번이나 이루게 되었지만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일이 일어나니 여전히 믿기지 않을 때가 많다. 작품을 만들어 국내, 국외 공연을 다니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제는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어디가 되었든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더 많은 꿈을 꾸게 된다.
ps. 뉴욕 투어를 도와주시고 함께 해주신 이영찬 선생님, 우리를 잘 보살펴주신 김진우 감독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안현민
고블린 파티의 단원으로 안무자 및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관객들의 시각을 넓힐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