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휴먼스탕스 한국-말레이시아 교류사업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는 것, 오래된 이야기를 지킨다는 것
정다슬_안무가

새로운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고, 오래된 이야기를 지킨다는 것은 기대보다 어렵다. 휴먼스탕스와 함께한 3월의 쿠알라룸푸르는 자연스럽게 쉬웠고, 익숙하게 어려웠다.
 2018년 여름 잠깐 한국에 귀국했을 당시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서울아트마켓 PAMS가 진행되고 있었고, 조재혁과 김병조가 공동 대표로 있는 휴먼스탕스의 마켓 참가를 도와주었다. 당시 팜스에는 휴먼스탕스의 2015년 작업인 〈현일〉 이 무대에 올랐고 공연을 관람한 말레이시아 이너 스페이스 오브 댄스 Inner Space of Dance 무용단(이하 ISD) 의 초청장을 받게 되었다. 덕분에 대표 조재혁과 워크샵 진행을 도운 박이표, 뮤지션 배호영과 신원영 그리고 어시스턴트를 맡은 필자까지, 우리는 3월 따뜻한 말레이시아로 함께 떠났다.
 약 10일간의 투어는 공연 이외에도 컴퍼니 무용수들과의 작업, 학교와 한 개 기관의 워크샵으로 촘촘하게 짜였다. 이는 휴먼스탕스를 초청한 우메쉬 쉐티(Umesh Shetty) 의 영향이었다. 카탁을 포함한 인디안 전통 춤과 민속 무용으로 단련한 후 호주와 런던에서 서양 춤을 배우고 돌아온 우메쉬는, 말레이시아 무용계에 새로운 형식의 춤을 선보이기 시작한 선구자로 꼽힌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최승희를 떠올리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현재 말레이시아의 아스와라 대학교(National Arts Academy Malaysia / ASWARA)에서 강의를 하면서 ISD의 예술 감독이자, 예술 센터인 템플 오브 파인아츠(Temple of Fine Arts, 이하 TFA)의 감독을 겸하고 있어 사실상 우리는 그와 연계되는 모든 기관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말레이시아 이너스페이스오브댄스무용단(Inner Space of Dance) 무용수들과의 창작 작업 ©정다슬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 - 함께

10일 간 매일 휴먼스탕스의 조재혁 안무가와 ISD의 무용수들의 작업이 이어졌다. 예술감독이자 안무가인 우메쉬의 신작에 새로운 영감을 넣고자 하는 요청에서 만들어진 시간이었다. 우메쉬가 만들자고자 하는 작업은 종교적인 신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전래동화인 흥부놀부처럼 말레이시아나 인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릴 적부터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 관점에서 바라보는 작업이었다. 흥미진진하지만 한편으로는 섬뜩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이야기는 마치 천일야화처럼 매일 조금씩 이어졌다.
 한 여성이 겪게 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안무가는 욕망과 의무,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스스로가 원하는 것과 사회가 원하는 것 사이의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우연인지 우메쉬의 작업은 말레이시아에 초청된 〈현일〉과도 비슷한 지점에 놓여있었다. 조재혁 안무가 역시 〈현일〉을 통해 인생에서 던져지는 수많은 선택과 갈등을 이야기하고자 했었기 때문이다.
 인도 전통 춤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아이디어와 테크닉을 접목시키는 우메쉬,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안무를 이어가는 조재혁의 만남이 필연적이라고 느껴졌다. 전통적 뿌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지를 뻗어내고자 하는 지점, 단단한 뿌리와 그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다는 것이 참 닮아 있었다. 리허설이 끝나고 나면 우메쉬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미지의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으로서의 고단함을 종종 토로했고 조재혁 안무가는 동감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은 어디서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천천히 적어나갔다. 하루에 몇 시간씩 새로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움직임을 만들고, 더위를 식히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가고, 닮은 점과 다른 점을 나누며, 새로운 이야기가 켜켜이 쌓이고 적혔다.




 

ASWARA 인디안 무용공연 ©정다슬





오래된 이야기를 지키는 것

리허설을 진행한 TFA 는 6층으로 구성된 예술센터로 ISD 가 상주하며 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5, 6층에는 스튜디오들이 꽉 들어차 있는데 크고 작은 스튜디오에서는 노래부터 인디안 악기들, 다양한 인디안 춤과 현대무용까지 다양한 종류의 수업이 이루어진다. 아주 어린 학생들부터 성인까지 장르와 상관없이 폭넓은 예술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다양한 예술이 공존하는 장소임에 틀림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신전’ 이라는 이름이 조금 거창하게 들렸다. 하지만 알고보니 TFA는 말 그대로 신화같은 이야기가 녹아 내려있는 장소였다
 TFA 의 입구에는 어떤 남자의 초상이 크게 걸려있는데, 그가 바로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에 예술의 신전을 세운 인물이었다. 약 40년전, 말 그대로 맨 땅 위에서 커튼으로 구역을 나누어 춤 수업을 시작하고 그렇게 십년, 이십년 그리고 삼십년이 흐른 후에야 지금의 TFA가 건물의 모습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현재 TFA를 이끄는 3명의 감독 중 한 분인 마랄 선생님은 TFA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었다. 돈이 없어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TFA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춤을 추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예술에 대한 집념과 그가 일구어 낸 소중한 공간 덕분인지 많은 TFA의 학생들과 ISD의 무용수들이 구루 (Guru 힌두교 및 타 종교에서 섬기는 정신의 스승, 신성한 교육자)로 섬기고 있었다.




 

TFA 디렉터 우메쉬와 마랄 선생님 ©정다슬




 ISD 의 무용수들과 함께 이야기할 때면, 그들은 ‘내가 그녀/그로 부터 배운것은…’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와 그녀는 구루부터 친구까지 늘 다른 사람을 지칭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배운 것, 전해 받은 것에 대해서 어떤 흔들림도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춤 테크닉이 아니었다.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춤을 출 것, 계산하며 춤추지 말 것, 춤을 추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할 것 등 정신적 수양과 지혜, 춤을 추는 마음가짐이 바로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나가고자 하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뻔하고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자주 어쩌면 매일 잊어버리고 있다.






 

ISD 무용수들의 쇼케이스 ©James Quah Dance Photography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

휴먼스탕스의 〈현일〉은 아스와라 국립 아카데미의 극장에서 진행되었다. 공연 준비를 하면서 가장 고되었던 것은 무대 세팅이었다. 〈현일〉에는 아쟁과 장구, 징까지 한국의 전통악기가 라이브로 연주되는 만큼 음향이 작업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무대 감독과 음향 감독을 한국에서 따로 섭외해가지 않고, 현지 공연장의 기술자들이 셋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느껴지는 어려움이었다. 한국어에서 영어로 그리고 다시 말레이시아어로 원하는 바를 전해야했고, 대답 역시 말레이시아에서 영어로 그리고 다시 한국어로 전해졌고, 뮤지션으로 참여한 신원영과 배호영의 도움으로 만족스러운 음향 셋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는 단순히 〈현일〉 공연으로 출발했지만, ISD 무용수들과 시도한 것들을 공연 프로그램에 넣어 관객들과 공유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은 공연 며칠 전에 ISD무용수들의 쇼케이스, 〈현일〉 그리고 관객과의 대화까지로 확장되었다.








 

〈현일〉 ©James Quah Dance Photography




 일방향의 공연이 아니라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무용수들이 서로 공유한 것들, 함께 춤 춘 이야기를 더 많은 관객과 나눈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우메쉬 안무가가 준비하고 있는 신작의 출발점으로 혹은 휴먼스탕스가 바라보는 그의 작업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향후 만나볼 우메쉬의 결과물에 대해서도 흥미로움을 유발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ISD 무용수들의 쇼케이스와 〈현일〉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관객들의 질문은 대부분 조재혁 안무가의 영감과 그가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에 관한 질문이었고 우메쉬와 조재혁의 만남에 대해서도 많은 관객들이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많은 관객들이 무용 전공자이어서 그랬을지, 한국 춤과 인디안 춤이 모두 민족 무용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일지 어떤 관객과의 대화보다 편안한 시간이 이어졌고, 말레이시아에서 춤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춤을 추는 마음과 정신에 대한 이야기가 공유되었다.




 

(오른쪽부터) 우메쉬 셰티, 정다슬, 조재혁, 박이표 ©James Quah Dance Photography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 - 따로

이번 투어는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다. 아마 조재혁 대표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에게는 휴먼스탕스의 작업을 처음으로 해외에 선보인 기회였다. 때문에 그는 이가 부서질 정도로 악 물고-실제로 응급실과 치과에 다녀왔다-최선을 다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냈고, 이번에 써내려 간 한 줄 뒤에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낼 포부로 가득 찼다.
 필자는 그동안 안무가이자 퍼포머로 활동하는 것 그리고 가끔 글을 적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프로덕션 매니저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경험을 하였다. 타인의 작업을 홍보하고, 계획을 짜고, 만나고, 헤어지고, 소개하고, 소통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안무가로서 말을 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하는 일에 익숙했다면 말레이시아에서의 나는 조재혁과 우메쉬의 사이에서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서서 말을 듣고 말을 전하며 중간자가 되어있었다.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적극적 듣기를 실행하며 부족하지만 꾹꾹 눌러서 새로운 이야기 한 줄을 써낸 시간이었다.

정다슬

독일 함부르크와 한국 서울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간의 성질과 개인이 지니는 가치를 주재료로 하는 작업을 추구하고, 안무의 개념과 가능성을 넓히는 데에 관심을 두고 타장르와의 협업도 지속하는 중이다. 2013년부터 ​<춤웹진>에 ​비정기적으로 글을 게재하고 있다. ​

2019. 04.
사진제공_정다슬, James Quah Dance Photography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