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발레단을 떠나다-발레를 떠나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천재 소년 세르게이 폴루닌의 다큐 영화 〈댄서〉가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4월이 지나자, 30년간 시위 현장에서 춤을 춰 온 이삼헌의 다큐 〈바람의 춤꾼〉(최상진 감독)이 5월 18일 예술영화관 KU시네마테크에서 언론 시사회를 가지고 전국 개봉(2017년 6월 6일 17개 상영관)을 앞두고 있다.
이 두 댄서, 그것도 발레리노였고, 발레리노인 이들의 삶과 그 시대를 관통하는 춤 행위는 러시아와 한국이라는 다른 상황에서 달리 펼쳐지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어느 부분은 매우 닮은 모습으로 ‘춤이 어떻게 댄서의 몸을 뚫고 나오는가’에 대한 뚜렷한 답을 보여준다.
‘춤이 어떻게 댄서의 몸을 뚫고 나오는가’는 참 이상한 말이기도 하다. 몇 시간에 걸쳐 고민 끝에 찾아낸 문장이지만 ‘춤을 춘다’, ‘춤이 추어진다’는 아름다운 표현이 있음에도 이 문장이 나타난 것은 평이한 표현에는 담을 수 없는 상당히 사건적이고, 상당히 격렬한 춤의 탄생이 이 두 댄서에게서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댄서〉가 폴루닌이 꿈을 안고 영국 로열발레단으로 진출하면서 겪는 가족, 이별, 이민자로서의 갈등이 끝내 발레단을 떠나 자신의 춤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다뤘다면, 〈바람의 춤꾼〉은 어디에도 흥미를 못 느끼던 광주의 한 소년이 우연히 발레를 만나면서 열정과 재능을 인정받지만 고등학교 때 광주민주화운동을 만나면서 서울에서의 대학생활과 발레를 접고 거리의 춤꾼으로 탄생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폴루닌이 스타로 등극한 로열발레단을 떠나 ‘Take me to church'에 맞춰 솔로를 추게 되는 과정은 이삼헌이 발레를 더 이상 추지 못하고 작두를 타고, 깃발을 들거나, 흰 국화를 들고 죽음을 위로하는 춤을 추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의지와 비의지의 경계에서 두 춤꾼의 이 과정은 바로 ‘춤이 어떻게 시대와 상황에 의해 자발적으로 탄생 하는가’의 전형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춤꾼은 춤의 탄생지로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
문신-공황장애
춤은 다른 예술장르와 비교해서 고정된 물질적 실체를 갖지 않는 무소유의 존재성을 갖는다. 춤이 갖는 유일한 물질적 실체는 댄서이고 더 집요하게는 댄서의 몸이다. 보편적으로 그렇게 얘기되어진다. 하지만 춤이 뚫고 나온다는 표현에는 춤이 댄서와 어느 정도 독립적이어서 댄서도 자신의 의지로 춤을 막거나 춤을 끌어내거나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두 영화는 그 과정이 얼마나 많은 경련과 통증, 불안과 숨이 멎는 공황을 동반하는지 즉, 춤이 탄생하기 전 춤이 얼마나 몸을 잡아 먹을 듯이 거세게 용틀음 하는지를 노출시킨다.
무당이 되기 전 신에게 점지된 것의 증표로 이유모를 무병이 이와 흡사하다. 신을 받는 다는 것은 개인적인 한 세계가 깨어지고 신의 세계라는 다른 법칙이 한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이고, 여기서 개인의 법칙 속에 있던 몸은 아프고, 전율하고, 뒹굴고, 변형되어 마지막에는 작두가 두렵지 않은 신의 것이 된다.
가족의 가난과 자신에 대한 애정과 희생 그리고 그것을 잘 느껴온 따뜻하고 착한 소년 폴루닌의 세계는 엄마가 불법체류자로 더 이상 그의 곁에 머물 수 없을 때 깨지기 시작한다. 83학번인 이삼헌 역시 80년 5월부터 발레리노로서의 세계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여리고 따뜻한 내면세계가 외국의 제도적 규범과 만나 깨어지는 고통을 폴루닌은 술, 약물 특히 반복되는 문신의 ‘자학적 통증’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언론은 그것의 표면만을 핥으며 제도의 편에서 바라본다. 이삼헌은 군대에서 제식훈련 중 광주민주화운동의 공포가 되살아나 발병한 공황장애로 몸과 활동에 족쇄가 채워진다. 그는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점점 더 없어진다. 발레의 푸른 꿈은 사라졌고 그가 마주한 시대 속에서 그는 족쇄 채워진 자신의 몸으로 ‘아픔’을 달래고, 살고 살리기 위해 맨 땅바닥에 몸을 굴리며 ‘아픈 춤’을 춘다. 그의 춤은 자신이 느낀 아픔의 전율이 확대된 것의 다름 아니다.
시대를 들여 마시고, 토한 춤
그들의 폐는 남다르다. 이 두 발레리노가 발레에 재능은 인정받을 만큼 특별한 폐활량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체의 일부인 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카나리아는 이산화탄소에 예민하다. 그래서 산소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인간보다 먼저 죽는다. 그 작은 폐의 예민함이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죽음을 예고해준다.
카나리아처럼, 폴루닌과 이삼헌은 시대와 상황에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반응하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 지점이 그 능력을 알아본 어떤 선지자가 있다면 그들을 간택한 이유였을 것이고, 춤이라는 초월적 능력이 그들 몸에 머무는 이유일 것이다. 또 다른 많은 평범한 댄서들이 그 감각을 대충 혹은 적절히 수단시 하며 활용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이 둘은 절대 그러지 못하며, 그래서 춤이 중간에 사라지거나 박제되지 않고 탄생될 수 있는지 모른다. 시대의 공기를 들여 마시고 그것이 사람이 살만한 것이 아님을 느끼면서 고통에 헐떡이다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한 순간에 홀연히 다가오는 춤에 자신을 맡기는, 그런 길을 간 것이다.
폴루닌이 발레단을 포기하기로 하고 자신의 고향을 찾아 추운 우즈베키스탄의 쌓인 눈 위에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몸을 대자로 뻗는 장면은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의 사람다운 폐가 어디에 숨 막혀하고, 어디서 숨을 쉴 수 있는 기관인지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이삼헌은 짧지 않은 30년 동안 개인적 삶은 어디에도 정박시키지 못한 채 시위 현장이나 추모식의 부름을 받는다. 백남기 농민 죽음의 현장이기도 한 광화문에서 최근의 춤이 보여지다가 팽목항에서 울음을 삼키는 장면에 이어 그가 흰 광목의 민복차림으로 광화문광장에 두발 굳건히 서서 정면을 응시할 때, 그의 모든 배경이 흩어 스러지고 그만이 오롯이 남는 긴 장면 역시 그가 아파서 울더라도 그의 춤이 탄생하는 공간이 바로 부당하고 숨 막히는 그곳임을 잘 보여준다.
한 몸의 홑춤, 추어지고야 마는 현현(顯現)의 춤
가난한 시골 마을 소년이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재능 하나로 얻어낸 영국의 로열발레단에서의 성공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었을 것이나, 그는 춤을 포기하려는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마지막 춤을 친구에게 안무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춤은 하와이 숲속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곳에서 추어진다. 호지어의 락 ‘Take me to church' 에 추어지는 폴루닌의 춤은 그 자체로 제의가 된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듯 그 춤을 촬영하는 9시간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르던 눈물은 춤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유령의 모습이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폴루닌의 그 춤은 모습을 드러냈고, 카메라에 포착되었으며 많은 관객을 열광케 하였다.
긴 정신적 고통과 온몸을 바늘로 찌르며 겪어낸 몸의 아픔 그리고 개인적인 영화를 포기하는 결단의 끝에 폴루닌은 진정한 춤을 자신의 몸에 담는데 도달하였고 춤을 그만두기 위해 춘 춤이 오히려 그를 진정한 댄서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였다.
혹독한 발레의 훈련을 받으며 기쁨을 느꼈던 소년 이삼헌에게 제식훈련의 훈육은 훈육으로 느끼지도 않을 것이나 그에게 시대의 춤이 머문 뒤로는 어떤 훈육이라도 나타나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죽음의 반응을 하는 그런 몸이 되었다. 이삼헌의 춤에서 한복을 갖춰 입고 추거나, 굿의 형식을 갖춘 춤이 어색해 보이는 이유는 제식훈련을 거부하듯이 발레, 한국전통춤, 창작춤 등 그런 이름으로 형식화된 춤을 거부하는 어떤 지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선 순수한 울음의 춤이 몸을 지배하는 규범적인 춤을 거부하고 이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행기를 탈 수 없는 몸 때문에 ‘세계 샤먼 축제’에 초대에 응하기 위해 18시간 거리의 프랑스를 유라시아 횡단열차를 타고 20일 걸려 가는 길을 떠난다. 열차 안에서도 간간히 공황이 찾아오지만 그는 고려인 강제 이주의 철길 위,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땅 위, 기차 안, 바이칼 호숫가에서 쉬지 않고 춤을 춘다. 세계의 샤먼들이 모인 축제에서 그는 세월호 소식을 예기치 못하게 접하게 되고 샤먼들이 마음을 모아주는 가운데 베를 가르고 세월호의 혼령을 위로하는 진혼굿을 한다.
나는 영화에서 이들의 춤을 보며 이 춤은 안 추어질 수 없는, 추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춤’이란 생각을 하였다. 무대 위의 많은 공연춤이 만들어지고, 때를 정해 시간이 되면 관객은 보러가고 춤은 공연된다. 이 춤이 ‘약속된 춤’이라면 두 댄서의 춤은 자신을 규제하는 모든 것을 벗어나려 애쓰며, 춤꾼에게 고통스럽지만 제도를 벗어나는 결단을 내리게 하여 가장 규제가 적은 곳에서 그 춤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꿈틀꿈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춤이 감격스런 이유는 사람의 의지를 넘어서면서도 사람의 몸에 깃드는 논리적 모순을 가지면서, 인간의 의지와 약속을 초월하여 ‘있어야 할 곳에 현현(顯現)한다’는 것이다.
전설에서나 들었던 춤의 오래된 모습,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 출현한다는 그 춤을 우리는 운 좋게 이십대 천재 청년의 조각같은 몸과 30년째 그 춤을 추고 있는 굳건한 50대 아재의 몸을 통해 극장에서 우리의 가슴으로 옮길 수 있다. 어쨌든 좋은 시대다.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