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기상악화로 환승공항에서 약 3시간 동안 연착되어 예정시간 보다 늦게 도착한 베를린 테겔공항.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돌풍이 함께 날 맞아주었다. 몇 번이고 회전비행을 하며 착륙을 시도할 때마다 착륙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작은 항공기의 맨 뒤 자석에 앉은 나는 난기류의 영향을 받아 들썩거림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한마디는 남겨야겠다는 심정으로 슬며시 핸드폰의 메모장을 열었다.
몇 글자 적진 못했지만 그사이 안전하게 착륙을 하는 순간 모든 승객과 승무원은 함성과 박수를 쳤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 제일 인상 깊은 비행이었다.
베를린에서의 레지던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예술가들의 도시 베를린
저녁 11시가 넘어서야 레지던시 스튜디오인 ZK/U(Zentrum für Kunst und Urbanistik)에 무사히 도착을 했다.
ZK/U는 1880년대부터 철도역사로 사용된 공간이 3인의 아티스트에 의해 2012년 예술공동체로 변화하여 현재는 정부로부터 공간을 지원을 받아 예술가를 위한 레지던시 지원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다. 3개월 또는 6개월 단위로 입주를 하는 이곳은 1층엔 개인 작업실이 포함된 6개실과 공동주방 메인홀, 테라스가 있고 2층엔 3개의 사무실과 7개의 개인 스튜디오가 있다. 1층에 있는 방으로 배정받은 나는 개인 작업 공간이 포함된 곳으로 좋은 편에 속한 스튜디오였다. 대부분 시각작가 위주로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곳이기에 무용공연 작품을 제작하기엔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ZK/U는 매주 목요일 새로 입주한 작가의 프레젠테이션 또는 오픈하우스가 진행하며 입주 작가들끼리 능동적인 협업 작업을 지원하며 다양한 예술활동이 벌어진다. 그간 만들어온 작품의 소개 방향을 최근에 올렸던 무용단 5주년 기념공연의 레퍼토리 작품으로 ‘2015 레퍼토리 Gray Code II’의 5개 기존 작품과 신작 1작품을 소개하기로 했다.
프레젠테이션 하는 날은 역할을 분담해서 진행한다. 프레젠테이션 팀, 요리팀, 청소팀으로 구분되고 입주한 작가, 예술에 관심있는 어느 누구나 자유롭게 참석 할 수 있다. 굉장히 캐주얼한 분위기에서 가볍게 저녁식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프레젠테이션은 시작되었다.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작품들 위주로 선정했던 5개의 작품 중 <사유의방Ⅳ: 소멸 그리고 교감>을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시연했다. 약 30분 길이의 솔로 작품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주관적 시선을 많이 드러내는 시리즈 작품이다. 침묵과 마주한 채로 존재하거나 또는 존재했지만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하여 이 모든 것들과 교감한다는 내용의 의식적 퍼포먼스이다.
동양적 의식 형식을 띄며 한정된 공간에서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소품들을 준비해 왔다. 20분 길이의 짤막한 작품이지만 공연이 끝나고 1시간 넘도록 작품에 대하여 토론했다. 참가자들은 동양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며 각자가 느낀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즐거운 분위기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마쳤다.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과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프레젠테이션 후 곧장 유태인 학살 추모 공원으로 향했다. 나에게 독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과 영화 〈피아니스트〉인데, 대학살, 국가폭력 등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2,711개의 비석으로 이루어진 추모공원을 맨 처음 찾게 되었다. 비석의 개수는 크게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지 않다. 베를린 곳곳에 돌아다니다 보면 희생자의 이름과 날짜가 새겨진 비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함께 공동작업을 하기로 한 동료 김동욱 안무가와 베를린에서 정착중인 학교동문 강요찬과 함께 독일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져 우리 셋은 곧바로 폴란드 여행을 계획했다. 새벽 일찌감치 자동차를 렌트해서 출발했다. 베를린에서 약 500km 떨어진 곳에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있다. 약 6시간에 걸쳐 수용소에 도착했지만 유럽의 겨울은 해가 짧기에 오후 3시면 문을 닫는다. 다음날 오전 8시 개장에 맞춰 수용소에 입장했다. 차가운 아침공기, 이른 시간의 적막함 속에서 조용히 수용소 구석구석 관람을 했다.
끔찍했던 순간들이 연상될 정도로 학살한 장소를 그대로 보존하고 또 자신들의 만행을 그대로 드러내고 지원하는 독일.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하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제롬 벨의 〈Gala〉 공연
나에게 제롬 벨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파리오페라극장에서 2004년에 올린 〈Veronique Doisneau〉이다. 곧 은퇴를 앞둔 발레리나가 트레이닝복만 입고 등장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제롬 벨은 춤을 추지 않는 안무가로 불릴 정도로 급진적이고 형식적인 현대공연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 작품들의 저변에 깔린 메시지는 소수의 부당한 대우와 평등하지 못한 사회 구조와 이를 바라보는 다수의 시선을 날카롭게 비웃듯이 유쾌하게 작품으로 그려내는 걸 알 수 있다.
이번에 관람한 작품 〈Gala〉 또한 그러한 배경을 깔고 진행된다. 약 15분 동안 영상으로 다양한 극장 무대인 프로시니엄, 돌출형, 원형 등에서부터 최신식 스타디움 사진이 슬라이드로 나열된다. 공연이 있을 무렵 꽤 추워진 날씨 탓인지 여기저기서 기침을 하는 관객들 속에서 억지로 기침을 참아내며 기침을 하는 관객으로 인해 극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따듯해진 분위기 속에서 공연은 시작되었다.
약 18명의 출연자가 출연하는데 그들의 출신은 누가 보아도 전문적인 댄서들이거나 연기자가 아니다. 5세부터 약 70대 의 다양한 연령대와 장애인, 전문댄서, 아저씨, 학생, 노인까지 다양한 출연자들이 무대에 오른다.
한명씩 무대 중앙에 나와 오른쪽과 왼쪽 발레 턴을 번갈아 돌고 들어간다. 그렇게 모든 출연자들이 한 번씩 한다. 전체적으로 작품은 하나의 움직임 컨셉트를 가지고 나열된 형식으로 진행된다. 출연자 중에 발레리나가 나와 쥬떼를 뛴다. 그리고 모든 출연자들도 따라한다. 관객들의 웃음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참여하는 출연자들은 단순히 커뮤니티 댄스 형식의 일반인들의 참여보다 그 형식을 뛰어넘어 그들은 작품에 충분히 몰입되어 있었다.
무음에서 그룹즉흥, 한 명의 리더의 움직임 따라하기, 각자 음악선곡 후 자기가 선택한 안무의 음악이 나오면 무대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면 다른 출연자들은 진지하게 따라 춤을 춘다. 이렇게 나열된 형식에서 춤을 출수록 모호했던 작품의 메시지는 강력하게 드러난다. 난 이 작품에서 평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바라보게 되었다. 전문적인 댄서만이 춤을 출수 있는 게 아니라 어느 누구나 자기의 표현을 춤이라는 도구로써 표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보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없는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순간에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것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