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텔레비전 모니터 앞에 부처상이 놓여있다. 그리고 모니터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부처. 순간적인 아이러니로 표현된 단순성과 함께 거울이라는 주제를 통하여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적 무가치한 허영을 고발함과 동시에 불교의 순수한 원초적 정신의 본질을 꿰뚫고 천재는 선禪적인 사유와 직감을 결부시키며 무한감을 만들어낸다.
백남준 선생의 대표작중 하나인 〈TV부처〉와 첫 만남의 잔상은 어느 날부터 찾아온 예술을 빙자한 나의 맹목적 행위에 대한 의구심과 삶의 낭비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예술적 행위가 지속되어야 할 명분을 갖게 하였다.
이처럼 무한감이 감도는 작품을 만드는 것. 자아로 자신의 세계를 소유하기보다는 타자와의 관계가 성립되는 장 속에서 세계를 느끼고 존재를 확인하는 것. 그것을 위한 '도정' 작업의 반복은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 초심을 되새기며 주력해오던 60~70석 규모의 소극장공연은 공간(공연장 컨디션)에 대한 이해와 또 작품이 지향하는 성격과 장의 관계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하였다. 어쩔 수 없이 제약된 공간 속에서 소극장의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이번 아르코소극장에서의 공연은 마묵무용단에겐 몇 년 만에 메말라있던 대지에 내린 단비 같은 것이었다.
4개의 Scene으로 구성한 〈누워있는 선〉은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 속에서 품게 된 ‘존재의 겸허함’에 대한 자문 같은 것이다. 이는 변화하는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 느끼는 자화상일 수도, 또는 디지털시대에 부닥친 과거형 인물의 상황 이야기 일수도 있다. 어려움은 특정한 상태의 것이 아닌 삶속에서 부닥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고난을 통하여 새겨진 상처는 물리적 폭력의 흔적일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세계와 절연상태에 머무르고 마는 심리적 상처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 또한 가해자이자 수동적인 피해자임을 알게 된다면 이것이 자본으로 길들여진 우리네 모습일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니면서 거기에 있는’ 존재의 어긋남으로부터 표현의 갈증은 시작된다. 그리고 표현행위는 이 같은 암시를 위하여 이미지 파편들의 순환적 이야기구조를 반복하게 된다.
<누워있는 선>은 “거울을 통하여 자기 성찰적이며 자기를 출발점으로 하여 ‘삶’의 통로를 바라다보는 이의 이야기이다”라고 우기고 싶다. 서구문명의 영향권에서 인간의 무가치한 허영을 고발하는 나르시시즘의 상징적 거울이 아닌 어느 사원의 제단에 걸린 순수한 원초적인 정신을 상징하는 거울이다.
작품에서 춤추는 몸은 온화하고 부드러워서 다른 것과 잘 조화되는, 자연합일의 심성에서 연유한 전통의 미를 의식하고 있다. 몸은 춤추는 몸의 습관으로부터 일탈, 표현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한계성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며 오브제를 만난다.
사물에 대한 성찰은 그 시대를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이라 할 수 있겠다. 사물과 만나는 것은 몸 자신만이 아니다. 몸과 사물이 갖고 있는 흔들림의 폭이 겹치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장소와 만난다. 표현은 그렇게 몸과 오브제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