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y

나의 〈여민락〉, 나의 질문: 몸 호흡에서 데이터의 생명까지
김효진_무용가

1. ‘춤추는 상자’라는 상상

〈여민락-2025〉는 ‘춤추는 상자(Dancing Box)’라는 오래된 상상에서 출발했다. 언제든 내가 원할 때 춤을 보여주고, 지친 몸을 풀어주는 움직임을 제안하며, 나의 동작에 반응하기도 하는 상자. 그 안에는 아름다운 춤과 유쾌한 춤, 내 몸을 돌보는 움직임까지 저장되어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상상을 해왔다. 일상에서 춤은 음악처럼 쉽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다. 음악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서든 재생할 수 있지만, 춤은 여전히 특정한 공간과 맥락을 필요로 한다. 춤을 즐기려면 집에서 혼자 추거나, 파티에서 어울리거나, 온라인 영상을 보며 커버댄스를 따라 하는 정도가 일상적 춤의 범위다.

나는 늘 궁금했다. "내가 일상에서 즐기고 싶은 춤은 무엇일까?" "일상 속에서 어떻게 춤을 즐길 수 있을까?" 그런 생각 끝에 떠올린 것이 바로 '춤추는 상자'였다. 마치 뮤직박스처럼, 아침에 일어나 내 기분을 말하면 오늘 하루를 열어줄 춤을 불러오는 장치 말이다.



김효진 〈여민락-2025〉 ⓒ김효진



2. 사라진 춤이 남긴 질문

1990년대 나는 음악가와 시각예술가들과 함께 극장, 갤러리, 야외 등 다양한 공간에서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을 했다. 그들과 함께한 작업에서 춤은 언제나 퍼포먼스를 이끄는 중심에 있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 기록을 돌아보면 춤은 늘 배경으로 남아 있었다. 음악은 음반으로, 시각예술은 작품으로 남지만, 춤은 그 순간의 공기와 몸의 긴장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가장 먼저 사라졌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라 춤의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질문도 있었다. 석사 학위 논문에서 나는 미디어 퍼포먼스를 유행에 따른 매체 놀이가 아니라, 삶을 인식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정의한 바 있다. 새로운 예술 형식인 미디어 퍼포먼스에서 춤이 다른 매체를 통해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지, 나아가 매체로 전이된 춤이 과연 춤으로서 존재하는지, 다시금 춤의 정체성 문제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문제를 피하려고 나는 "매체로 전이된 춤과 함께 춤 출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무대 위의 무용수와 스크린 속 무용수가 함께 춤추는 미디어 퍼포먼스 실험을 하기도 했다. 〈마담 프리덤〉(자유부인) 작품에서 인터랙티브 효과나 퍼포머로 무대에 등장하는 영상이 그런 예다.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춤과 다른 장르의 경계를 명확하게 느끼게 하며, 그 경계를 통해 춤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게 했다.


3. 두 번의 선언적 작업

내 작업 여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두 번의 선언적 작업이 있다. 첫 번째는 1998년의 이미지 시어터이고, 두 번째는 2006년의 미디어 퍼포먼스이다.

이미지 시어터는 아티스트 이윰과 함께 시작되었다. 무용과 미술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출발한 우리는 신체를 ‘이미지’로 연결하여 예술적 소통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무대를 텅 빈 캔버스로 바라보며, 신체에서 확장되는 움직임과 소리를 시각적 표현으로 전환하여 공간을 그리고 칠해 나간다는 ‘바디 드로잉’ 개념에 닿았다. 음악가 김동섭과 함께 첫 실험 무대를 올렸고, 1999년 후쿠오카 아트 트리엔날레 초청 퍼포먼스로 이어졌다. 특히 2000년 중화전 전면을 가득 채운 프로젝션 영상을 배경으로 한시간 동안 진행된 〈회전하는 원을 그리다〉는 한국 최초의 고궁 미디어 파사드 공연으로 기록되었으며, 춤이 극장을 넘어 도시와 건축,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두 번째 미디어 퍼포먼스 작업은 2006년 김형수 교수가 이끄는 연세대 영상대학원 미디어아트 연구팀과의 협업으로 시작되었다. 다양한 미디어가 하나의 무대에서 공연된다는 의미를 담아 ‘미디어 퍼포먼스’라는 장르명을 내세운 국내 최초의 공연이었다.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은 이를 ‘KBS쇼적인 아방가르드’라고 표현하였으며, 이후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2009년)에서는 춤과 음악, 영상, 그리고 패션까지 결합한 융합공연으로 무대는 실시간 CG, 3D 모델링, 뉴로이미징(neuroimaging)기술이 결합된 디지털 공간이 되었다. 춤이 희생양의 몸짓처럼 사라지는 동시에 미디어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의례적 퍼포먼스로 거듭나며, 춤의 사라짐이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다른 미디어로 전환되는 과정임을 실험하였다.

〈마담 프리덤〉은 10여 년간 4채널 영상, 인터랙티브 사운드, OLED, 홀로그램 등과 결합하며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한국무용, 현대무용, 소셜 댄스가 영화와 TV쇼 아카이브, 디지털 영상,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넘나들며 무대를 이끌어 간다. 2013년 에든버러 국제페스티벌(EIF)에서는 ‘가장 완벽한 퓨전’이라고 소개했고, 영국의 더 타임즈(The Times)는 이 작품을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무대”라고 평했다. 2014년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레드캣 공연에서는 공연기간 전석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선언적인 작업을 통해 춤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여민락, 질문의 진화 (2018–2025)

2018년 작업은 일상에서 멀어진 궁중음악 ‘여민락’을 즐기려는 노력으로 아주 느린 음악에 맞춘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궁중정재에서 자주 등장하는 염수, 거수, 팔수이무와 같은 동작을 차용하여 내 몸에 집중할 수 있는 긴 호흡의 움직임을 만들었고, 그 움직임은 단순한 퍼포먼스를 넘어 LED 스크린 안으로 춤의 공간을 확장시켰다. 이때 춤은 더 이상 공연의 순간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시 공간으로 옮겨지며, 움직임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Yeomillak 2018p - Ymap

2020년에는 발의 미세한 움직임을 8K 카메라로 포착하고, 55인치 모니터 16대로 구성된 멀티 채널 영상으로 설치했다. 춤추는 몸을 지탱하는 발의 근육, 힘줄, 그리고 피부를 통해 보이는 핏줄의 움직임을 다양한 시퀀스로 연출한 것이다. 이는 춤이 영상으로 전환되면서 원본 신체는 사라지고, 전환된 이미지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마치 구술 언어가 문자 언어로 바뀔 때 사라지는 것이 있듯이, 춤도 이미지와 텍스트로 해석되는 과정에서 잃는 것이 있는 동시에 새롭게 생겨나는 의미도 존재한다. 관객은 나의 발 동작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과 상상을 통해 그 발의 움직임에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만의 작품으로 완성해 나갔다.
Yeomillak 2020 - Ymap

2021년 《여민락》 작업은 음악의 한 장단을 정간보 체계에 따라 하나의 프레임이 64개의 프레임으로 반복 재생되는 방식으로 영상 안무를 구성했다. 이는 궁중 정재의 64인무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이었다. 음악과 발의 움직임은 ‘속도’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호 작용하며, 발은 음악의 흐름에 맞서거나 순응하면서 속도감을 드러냈다. 관객은 같은 프레임이 16개, 64개로 확장되는 이미지 배열 속에서 시간의 길이와 속도의 차이를 인지하고, 발의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음악의 숨결을 새롭게 체험했다. 이처럼 2021년 작업은 앞선 ‘일상’, ‘중심’, ‘균형’에 이어 ‘속도’라는 차원을 더해 《여민락》의 리듬을 시각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였다.
Yeomillak 2021 - Ymap

2025년, 나는 모션 캡처를 통해 나의 움직임을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했다. 물리적인 나의 신체는 사라지고, 추상적인 입자 캐릭터가 등장한다. 한국 춤은 완결된 동작의 멋뿐만 아니라, 동작과 동작 사이에서 흐르는 에너지가 만들어내는 매력도 크다. 그 에너지의 흐름과 증폭을 직관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나는 입자 효과를 선택했다. 입자로 표현된 캐릭터의 춤은 더 이상 재현된 춤이 아니라,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된 새로운 퍼포머의 춤이 된다.
Yeomillak 2025 - Ymap

2018년 긴 호흡의 발견, 2020년 균형의 의미, 2021년 속도와 시간의 재해석, 그리고 2025년 데이터가 된 춤으로 이어진 이 여정은 춤이 어떻게 새로운 형태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기획된 여정은 아니지만 매 순간 작업에서 생겨난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것이다.


5. 춤추는 상자와 미디어 퍼포먼스

〈여민락-2025〉는 단순한 데이터 축적을 넘어 자동 안무가 가능한 ‘춤추는 상자’를 구체적으로 구현해보려는 시도였다. AI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춤을 데이터로 만든다는 것은 춤의 본질과 고유성, 그리고 예술 작업의 소유권 문제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 역시 앞서 언급한 문제와 기술적 한계로 인해 AI를 바로 작품에 활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티스트 토크를 통해 AI와 〈여민락-2025〉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미디어 퍼포먼스로 진행된 〈아티스트 토크〉는 전시 작업에 관한 AI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전시 영상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의 설명을 들은 후, 무용수가 모션 캡처의 원본이 되는 춤을 직접 시연하였다. 이어 AI가 이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과정을 담았다. AI의 분석은 사전에 촬영된 동일한 안무와 무용수 영상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를 AI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연출하였다. 먼저 엔지니어가 프롬프팅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스토리와 콘티를 작성했다. 생성되는 데이터는 아티스트의 상세 정보나 작업 이력을 입력하기 전과 후로 구분하였고, 극장 로비나 카페와 같은 실제 장소를 구체적으로 세팅하기도 하였다. AI들의 텍스트는 한 줄 반응부터 춤사위 분석, 움직임 구조 분석, 사회문화적 비평, 그리고 깊이 있는 추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대화가 오가도록 유도하였으며, 챗GPT, 클로드, 젠스파크, 제미나이 등의 AI 도구를 사용하였다.





아티스트 토크 - AI ⓒ김효진



〈아티스트 토크〉에서 AI 캐릭터가 선보인 발화(發話)는 AI들이 나눈 실제 대화를 그대로 옮긴 부분도 있고, 인간과 AI가 서로 질문을 주고받는 구조로 각색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AI 캐릭터가 하는 모든 말은 분명 AI가 스스로 생성한 텍스트이다. 물론 AI가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에는 프롬프트 작성을 통해 특정 방향으로 AI의 생성 텍스트를 유도하는 나의 의도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논문에서 미디어가 퍼포머로서 무대에 참여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작업에서는 AI를 무대 위의 퍼포머로 초대했다. 아티스트 토크에서 AI는 무용수의 춤을 분석하고 비평했으며, 인간과 AI가 서로 질문을 주고받았다. 이는 미디어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퍼포머로 확장하는 미디어 퍼포먼스의 접근법을 AI에도 적용한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캐릭터, 즉 또 다른 퍼포머로서 무대에 오른 것이다. 현재 AI는 스크린과 음성으로만 나타나지만, 앞으로는 휴머노이드나 인터랙티브 캐릭터 형태의 AI 퍼포머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상상을 넘어 춤과 미디어, 그리고 AI 퍼포머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공연 언어가 시작되는 지점일 수 있다.



아티스트 토크 퍼포먼스 ⓒ김효진



6. AI는 춤을 이해할 수 있는가

AI는 춤을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아직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그 이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춤의 세계가 확장된다는 점이다.

AI가 춤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시대는 기술의 발전 덕분에 가능해진다. 하지만 나는 그 기술의 발전 방향이 결국 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춤이 지닌 찰나의 특성, 이내 소멸하는 속성,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호흡과 흐름의 에너지 같은 비물질적 특성이 데이터로 전환되는 순간, 기술은 기존의 좌표 계산 방식을 넘어선 새로운 알고리즘과 인터페이스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은 기술을 이끌어내고, 기술은 예술의 질문에 응답하며 함께 진화할 것이다.

언젠가 내 방 한편에 상상 속의 ‘춤추는 상자’가 놓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 내 기분을 말하면, 새로운 춤이 펼쳐질 것이다. 나는 그 낯선 춤에 놀라면서도 동시에 춤이 다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AI는 춤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우리는 춤을 어떻게 이해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질문이 존재하는 한, 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몸의 호흡에서 데이터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과 방법으로 춤을 즐기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효진

무용가, 미디어 아트/미디어 퍼포먼스 연출가, 와이맵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품으로 무용〈춤을 추며 산을 오르다〉(2005), 미디어 퍼포먼스〈마담 프리덤〉(2013), 미디어파사드〈석조전, 낭만을 상상하다〉〈2016), 미디어아트〈여민락-2020〉(2020) 등이 있다.​

2025. 10.
사진제공_김효진 *춤웹진

select count(*) as count from breed_connected where ip = '216.73.216.112'


Table './dance/breed_connected' is marked as crashed and should be repai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