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그 누구든 어떤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을 때 자료는 잉태된다. 그런 마음이 실물로 구체화되면 자료 또한 탄생한다. 태어난 자료가 명작이라면 그 생명은 심지어 영원할지 모른다. 다만 명작도 자료가 보존되지 않는다면 실체 없는 허상에 불과하게 된다. 허상은 허상일 뿐이며 허상으로 실체의 가치를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크다.
춤은 흔히 찰나의 존재라 말해진다. 예술춤이건 생활춤이건 추어진 춤의 실물은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춤뿐만 아니라 나의 몸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그 실물이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 유사한 예로서, 행위예술의 실물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을까? 나의 몸으로 행하는 모든 것의 실물을 그대로 보존하려면 몸으로 행함은 그 형상으로 머물거나 그 형상을 반복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 생명의 중지를 내포하는 ‘몸 행위의 실물 보존’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춤의 특수성은 이러하며, 그것은 춤의 한계가 아니다.
찰나의 존재를 실물로 보존할 수는 없으나, 지금껏 실물을 알리는 대안으로서 많은 시도가 이뤄졌고 또 시도되고 있다. 춤에선 무보화, 사진 기록, 동영상 기록, 문자 기록 등이 그러한 노력을 뒷받침해왔다. 춤의 실물은 아니더라도 실물에 근접하는 실체를 가급적 온전하게 갖출 필요가 있다. 찰나의 존재가 허상을 벗어나 제 실체로써 가치를 유지하도록 하는 길은 있는 것이다.
춤 자료를 토대로 춤의 실체를 갖추려는 작업이 가장 활발한 곳은, 필자의 판단으론, 미국이다. 2019년 상반기 <춤웹진>에 몇 회 소개된 춤박물관뿐 아니라 특히 춤 자료를 전면적으로 보존하고 이용하는 작업 또한 미국에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어 왔다. 미국에서 춤의 자료화 작업은 크게 둘로 이뤄진다. 하나는 특정 자료의 수집과 전시에 치중하는 국립춤박물관이며, 다른 하나는 뉴욕의 공연예술도서관의 작업으로서 단적으로 춤의 모든 자료를 엄청나게 수집하고 체계화해서 모든 사람이 활용하도록 돕는다.
뉴욕공연예술도서관 스페셜 콜렉션 열람실 ©김채현 |
올해 3월 <춤웹진>에서 잠시 언급되었듯이 뉴욕공연예술도서관은 이런 곳이다. 춤·음악·연극 분야를 망라하는 이 도서관은 소장 자료 규모(50만 개의 문건 모음 폴더, 450만 점의 사진 등)를 기준으로 오늘날 공연예술 분야 세계 최대급 도서관이다.
1994년 제롬 로빈스가 생전에 자신의 자료 일체를 이 도서관에 기증한 것을 계기로 춤 부문의 모든 자료(장서 4만4천권 등)는 그의 이름을 내세운 ‘제롬 로빈스 댄스 디비전’이라는 분류 제목 아래 관리되고 있다. 이 도서관은 또한 종이 신문 스크랩, 포스터, 인쇄물, 의상과 무대 디자인 세부 구상도뿐만 아니라 연기, 안무, 연구자 등 무용인들의 육성과 동영상(2만5천점)도 소장한다.
뉴욕공연예술도서관에서 확인하는 제롬 로빈스의 육필 메모 ©김채현 |
뉴욕공연예술도서관에서 대출받은 제롬 로빈스 파일 ©김채현 |
뉴욕공연예술도서관은 출입하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어 한 마디로 춤을 연구하거나 춤 동영상과 사진, 무용인들의 육필 흔적까지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접근이 가능하다. 9·11 이후 현관 로비에서 아주 간단한 검색을 거쳐야 하는 것을 빼놓고는. 신분을 정확히 기재하면 도서관 출입증도 발급받아 귀중한 자료를 제한된 시간과 위치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확인할 수 있다.
뉴욕공연예술도서관 스페셜 콜렉션 열람실 입구 ©김채현 |
사라지는 찰나의 춤 실물을 못내 아쉬워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에 가급적 가까이 접근할 실체를 제시하는 것이 현명하다. 창작자의 마음에서 잉태된 자료는 무대화를 거쳐 비평과 역사화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통해 하나의 실체로 남는다. 이에 비추어 사라진 춤이 살려지지는 않으나, 종이 신문 스크랩, 포스터, 인쇄물, 의상과 무대 디자인 세부 구상도, 온갖 관련 메모, 연기, 안무, 연구자 등 무용인들의 육성과 동영상, 비평이 갖추어진다면 그 실체는 거의 완벽하게 구현될 것으로 믿는다. 세계 최대라 자타가 공인하는 이곳에서 뉴욕 중심의 웬만한 춤예술은 ‘생생하게’ 연구될 수 있다.
뉴욕공연예술도서관 ©김채현 |
자료가 있어도 없다든가 있어도 보여줄 수 없다든가 하는 경우를 여기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 같다. 뉴욕공연예술도서관을 이용하다 보면 죽은 자료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료관을 지향하는 의도가 실감날 것이다. 뉴욕에 갈 적마다 들리는 이곳을 지난 여름에도 방문하였다. 갈 적마다 업그레이드되는 이곳에선 그때마다 춤이, 어떤 창작자가 업그레이드되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춤 자료는 재탄생함으로써 춤, 창작자, 춤분야 전체를 업그레이드시킨다. 그래서 메모 쪽지 하나도 소홀히 해선 안 될 일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