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기획취재_ 한국춤비평가협회 2019 여름 포럼(1) 현장스케치 및 발제문
“오늘의 춤 창작경향과 비평 2”

한국춤비평가협회(회장 채희완, 이하 춤비협)가 2019 여름 포럼을 7월 12일 서울 동숭동 소재 예술가의집에서 개최했다. 포럼을 통해 춤계 안팎의 여러 사안들을 제기하고 공론화해온 춤비협은 국내외 춤창작 경향을 논의하자는 취지로 지난해 가을 포럼에서 유럽과 동남아의 춤창작 경향을 살펴보았다. 이번 2019 여름 포럼에서는 한국창작춤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국내외에서 활동의 폭을 확장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오늘의 춤 창작경향과 비평 2”을 주제로 한국창작춤 현장을 조명했다.
 춤비평가 김채현은 “국내 춤 동향과 전망을 위한 화두”를 발제하였다. 다원화 경향이 완연한 국내 춤 흐름의 특징적 변화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며 향후의 전망을 짚기 위한 화두로서 제시했다.
 춤비평가 권옥희는 “한국 창작춤의 경향” 발제에서 최근의 국내 춤 흐름을 하이브리드(혼종)과 비선형적 공간연출이라고 진단하는 동시에 창작윤리에 벗어난 혹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안무가의 창작태도에 대해 지적했다.
 춤비협 2019 여름 포럼에는 이세승(쌍방), 이재영(시나브로 가슴에), 장혜림(Ninety9 Art Company), 최원석(모므로움직임연구소) 등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안무가를 비롯해 임소영 국립현대무용단 사무국장, 곽아람 국립현대무용단 기획팀장, 이유진 문예위 공연지원부 과장, 김수연 서울무용센터 매니저, 장승헌 춘천아트페스티벌 예술감독, 무용컬럼니스트 김미영, 공연컬럼니스트 김민관. 김명현 무용연구가 등 무용관계자 50여명이 자리했다. 춤비협에서는 회장 채희완과 운영위원 이종호, 김채현, 장광열, 회원 이만주, 김영희, 이지현, 권옥희, 김혜라, 송성아가 참석했다.
 패널과 함께 하는 토론 내용은 춤웹진 8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한국춤비평가협회 2019 여름 포럼 현장 ⓒ춤웹진




 

■ 발제문 1  

국내 춤 동향과 전망을 위한 話頭 
- 화두 17가지

 

김채현_춤비평가 


국내 춤에서 다원화의 경향이 완연하다. 1990년대 중반 조짐을 보인 이 경향은 이제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이는 또한 범세계적 흐름이기도 하다. 다원화는 춤의 내용과 형식에 걸쳐 두루 나타난다.
 원론적으로 말해, 개개인의 자율적 감성과 판단이 기본인 예술에서 다원화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다원화는 사회의 민주적 운영과 직결되므로, 범세계적으로 예술의 다원화는 사실상 20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서구에서 다원화는 모더니즘 이후의 현상으로 조성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한국에서 다원화는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현상이다.
 다원화는 일목요연한 정리를 벗어나는 속성이 있다. 그래도 다원화를 가급적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것은 춤 연구와 비평은 물론 창작에서도 기본 과제이다. 이를 위한 방편으로서 현재 주도적인 춤 흐름을 주목하고, 이를 축으로 다원화 양상을 정리하는 방법을 상정할 수 있겠다. 그러나 향후에도 지속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도적인 춤 흐름을 특정하기는 무리로 보인다.
 차선책으로서, 다원화의 흐름 가운데서도 특징적인 변화들은 지적될 수 있다. 이 변화들은 다원화의 흐름을 견인하며 또 다른 변화를 유도해내는 역할을 하면서 거듭 다원화를 촉진한다. 그리고 최근의 변화들은 그 이전의 변화들과 연관되어 있고, 때문에 지금의 춤 흐름을 판별하는 데 있어 이전의 변화와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편의상 지난 20년간의 춤 흐름을 두 단계로 나누어 특징적 변화들을 조망하며 향후의 전망을 짚기 위한 화두로서 제시한다.

 




“국내 춤 동향과 전망을 위한 話頭”를 발제하는 춤비평가 김채현 ⓒ춤웹진




I. 최근 5년 이전의 변화 결과

1. 해외 교류의 자유화
-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그리고 바로 그 전해의 민주 헌법 쟁취의 큰 성과로서 정부 허가가 필요 없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개시되었다. 무용인들의 해외 연수, 유학을 비롯하여 해외 무용인들 및 단체들과의 교류 역시 이때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일상과 사회 전부문에 걸쳐 해외여행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물론 문화예술에서도 이는 보편적 현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국내 춤에서 교류 활성화 차원에서 국제화 활동으로 중시되던 단계를 거쳐 세계를 조망하고 나름대로 접촉하는 교류의 자유화로 정착되었다. 즉, 무용인들이 해외 춤의 동향과 정보를 파악하고 춤을 상상하는 데 있어 큰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2. 여가 사회의 도래
- 1990년대에 한국 경제는 호전됨과 동시에 규모가 커졌고, 1997년의 IMF 사태에도 불구하고 높아진 국민 소득을 기반으로 한국인들은 레저 활동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향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90년대 말 이후 10년간의 민주 정부를 비롯하여 역대 정부는 국민의 예술 향수 증대 및 예술의 기반 구축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이는 일상 생활, 여가 활동을 접목하는 춤을 촉진하고 사교춤과 거리춤, 어번춤 등 춤의 다변화를 유도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사교춤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며, 일반인들 사이에서 춤은 재인식되었다. 사교춤에 관한 부정적 시각이 1980년대까지 팽배했던 반면에, 1980년대 이후 예술춤의 활동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술춤의 활발한 활동은 일반인들이 춤 전반에 대해 갖던 부정적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핵심 요인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3. 춤 인프라의 개선
- 2000년 무렵 춤 창작에 종사하는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관측되었다. 동시에 예술춤 공연을 뒷받침하는 환경(무용수, 극장, 지원 시책 등)이 대폭 개선되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결과가 파급된다. 먼저 증가하는 창작 활동을 반영하여 크고 작은 정례 춤 행사들이 기획되며, 또한 예술춤 공연은 봄과 가을에 집중되던 관행을 벗어나 연중 상시적으로 열리게 되며, 보다 결정적으로 이는 독립(indie) 안무가·무용수가 출현하는 토대가 된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향후에 춤의 다원화 경향을 촉진하게 된다.

4. 독립 활동가들의 대두
- 1990년대까지 한국의 예술춤 활동에서 주축을 이룬 대학 동문 단체들의 행사는 2000년대에 들어 급격히 퇴조하였다. 이와 동시에 교수직과 창작자를 겸하는 사례도 현격히 줄었다. 프리랜서 또는 독립 활동가들이 늘어나는 추세는 대학 동문 단체들의 퇴조를 부채질하였다. 춤계에서 사용된 ‘독립’의 의미는 다른 예술계에서 사용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 내지 지원으로부터의 독립과 아방가르드적 개념을 내포한 예술계의 ‘독립’은 한국 춤계에서 동문 단체나 공공무용단과는 거리를 둔 ‘개별’ 무용가의 활동 성향에 방점을 찍었다.

5. 혼성 경향의 수렴
-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예술계 전반에서 양식의 다변화와 독립 예술인들의 출현이 뚜렷한 흐름을 보였다. 그리하여 여러 예술 분야들이 뒤섞이는 혼성(hybrid)의 경향이 예술춤에도 파급되어 양식의 변화를 촉진한다. 당시 진행되던 이상의 여러 요인들과 국내외 춤 교류의 증대와 아울러 혼성의 경향은 점진적으로 춤에서 양식과 작업에서의 다변화(多邊化)를 자극하게 된다.

6. 양식의 다변화와 보수적 3분법의 소멸
- 2000년 이후 한국 예술춤의 흐름은 단적으로 양식이 다변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중심성은 특정 테크닉의 위주의 창작 관행을 동요시켰다. 양식의 다변화가 진척되는 이 시기의 춤은 모던 댄스, 코리언 댄스, 발레의 3분법을 벗어나 넓은 의미의 현대춤(contemporary dance) 시대를 열어왔다. 춤 다변화 흐름에서 발레 분야는 한국무용 및 현대무용 계열에 비해 매우 뒤처졌다.

7. 양식의 다변화 1: 한국무용 계열
- 이 시기에 한국무용 계열에서는 전통적 춤사위를 재현하는 방식을 벗어나는 작업이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였다. 무대에서 춤 공간은 중심 지점에 연연하지 않는 식으로 분산되고 스토리텔링 위주의 보수적인 구성은 희석(稀釋)되며 전통적 춤사위 이외의 움직임이나 테크닉이 유입되었다. 다시 말해, 한국무용은 해체되면서 한국적 미적 특질을 가시화하거나 현대적 감성에 근접하는 새로운 경향을 갖는다.

8. 양식의 다변화 2: 현대무용 계열
- 현대무용 계열에서는 무엇보다도 마사 그레이엄 류의 모던 댄스가 퇴조하였다. 여기서 현대무용 계열이 다원성을 구가(謳歌)하는 발판이 마련된다. 춤 움직임들의 혼성 또는 절충이 뚜렷해지고 주도적인 테크닉이 없다는 뜻에서 포스트모던적 경향이 뿌리를 내렸다. 이와 아울러 작품 구성에서 콜라주와 혼성 스타일의 구성이 증대하며 즉흥이 유입되고 몸에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인체 감각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늘어났다.


II. 최근 5년간의 변화 양상

9. 장르 경계의 해소
- 춤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국무용 계열의 작품과 현대무용 계열의 작품을 구분하는 일은 의미를 잃었다. 춤 현장의 이런 경향에 영향을 받아 국립무용단이나 국립발레단에서도 전통적 또는 고전적 춤사위를 벗어나 현대무용 또는 현대춤과의 융합 또는 절충을 꾀하는 시도를 선보인 바 있다.

10. 몸의 춤 소재화
- 움직임, 테크닉들의 기계적 연결을 탈피하여 몸을 춤의 소재로 뚜렷이 채택하는 경향이 대두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몸을 다양한 기호로 변주하는 작업과 움직임을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결합하는 작업으로 대별된다. 특히 전자의 작업은 춤 수행의 주체로서 몸을 부각시킴으로써 기존과 아주 다른 시각을 제기하며 몸의 다양한 양상을 주목하고 문제시하는 경향을 띠므로 앞으로 폭이 넓어질 가능성이 크다.

11. 새로운 공간의 출현
- 서울무용센터,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 플랫폼엘 등등의 갤러리 공간이 새로운 춤 공간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문화비축기지(서울 상암동)가 개장(2017년 가을)하여 춤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들 공간은 가변무대 또는 이동무대를 제공하면서 예컨대 퍼포먼스 스타일의 연출을 자극한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은 춤과 다른 장르의 결합을 촉진하고 있다. 새 공간의 출현은 물리적 공간 자체의 증가 차원을 훨씬 능가하는 의미를 갖는다. 프로시니엄 스테이지로부터 블랙 박스로, 또 화이트큐브로 확장되는 춤 공간은 춤의 여러 변화(창작 방식, 관람 방식, 새 내러티브와 매체 발굴 등)를 자극하는 요인으로 주시될 필요가 크다.

12. 퍼포먼스 스타일의 대두
- 퍼포먼스 스타일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품들은 무대/객석의 이분법을 탈피해서 포스트드라마의 추세 및 수행성의 시각에 힘입어 더불어 무대-객석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선으로 진전된다. 여기서 작품은 고정되지 않은 유동적 관계 속에서 전개되며, 부수적으로는 몸의 물질성이 부각된다. 퍼포먼스 스타일은 기존 안무 방식을 동요시키고 부분적으로는 의문시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안무를 확장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비단 퍼포먼스 스타일을 택하지 않더라도 춤 공연에서 선형적 스토리텔링은 퇴조하고 내러티브가 우위에 놓이고 있다. 이 경우 공연이 내러티브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전달할 방식을 갖춰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된다.

13. 커뮤니티댄스의 모색
- 춤에 관한 인식 변화, 춤의 다변화, 여가 및 복지 사회의 도래 등의 요인에 힘입어 커뮤니티댄스가 등장하였다. 일부에서는 커뮤니티댄스를 사회와의 연관 내에서만 고려하는 부작용이나 맹점이 없지 않다. 아무튼 질병의 치료, 심신의 치유, 커뮤니티와의 공감, 춤 영역의 확장과 같은 측면에서 커뮤니티댄스는 갈수록 다양하게 모색된다. 다문화를 포용하는 측면에서 커뮤니티댄스는 흔하게 활용되고, 심지어는 아기띠 댄스까지 시도된다.

14. 커뮤니티댄스의 응용
- 극장 내 무대/객석 이분법 위주의 공연을 탈피하는 경향은 커뮤니티댄스를 응용하는 흐름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는 커뮤니티댄스에 속하는 무대 공연, 커뮤니티댄스의 방법을 응용한 무대 공연으로 나눠진다.

15. 사회 이슈와의 동행
- 사회 이슈를 외면하지 않고 작품과 활동에 수렴해들이는 무용인들이 늘고 있다. 춤이 사회 이슈와 동행하는 현상은, 일례로 80년대 상황과 비교해보면, 매우 자연스런 일이 되었다. 먼저, 1997년의 IMF 사태를 계기로 한국 사회의 주요 원리가 돼버린 신자유주의는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하는 참으로 피폐한 세상을 불러들였다.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을 고발하거나 환기하는 작품들은 드물지 않다. 또한, 젠더 불평등에 맞서는 기존의 흐름에 더하여 #미투 운동은 피해자의 입장에 초점을 맞춘 작품을 등장시킨다. 성소수자의 시각을 담은 작품도 이 범주에 속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의 인권 회복 운동과 대통령 탄핵 운동 그리고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사찰 진상 규명 운동에 다수의 무용인들이 동참하였고, 일부의 무용인들은 작품으로 응답하였다.

16. 공공무용단과 독립무용가의 위상 변동
- 공연 작품 측면에서 공공무용단은 성과 면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맴돌며 공공무용단의 존립 이유가 여론의 도마에 오른 것은 2010년대 중반 이래의 현상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춤 현장에서는 공공무용단에 대한 기대감이 저하하고 상대적으로 독립무용가들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는 감이 있다. 이는 2000년대 중반 이전의 춤계와 비교하여 지금의 춤계가 매우 달라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17. 국제 교류의 상시화
- 춤 국제 교류가 일상화된 시대이다. 교류의 의미도 과거에 머물러선 곤란하다. 2000년 이후 유럽 지역 무용인들과 교류가 진척되었고, 2010년 이후엔 아시아 지역 무용인들과의 교류가 진척되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미국 무용인들과의 교류가 주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최근에는 아시아 및 유럽 지역 무용인들과의 합작(콜라보)과 레지던시 작업이 잦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와 동시에 국내 무용수들의 해외 무용단 진출이 뚜렷하며, 국내 공연작의 판권을 해외에 판매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한국이 춤 수입국에 머물지 않고 수출국이기도 하다는 기대감은 늘어간다. 이제는 문화의 충돌보다는 문화의 ‘섞임’으로 초점이 옮겨가는 양상을 보이며, 이 같은 현상은 한국의 춤 흐름을 더 자극하고 다양성을 촉진할 것은 물론이다.  

(본고는 2018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 심포지엄 발제문을 대폭 손질하여 개고되었다.) 





 

■ 발제문 2  

한국창작춤의 경향 
- 하이브리드(혼종), 비선형적 공간연출, 춤의 창작윤리- 
권옥희_춤비평가


Ⅰ.머리말

상상력의 부재였다.
올해 ‘창작산실’ 심사와 지역의 현장에서 본 춤들은 주제를 역사에서 얻거나 안무가의 짧은 사유나 단순하고 평범한 사건들에서 착안한 이야기, 혹은 사회적으로 흥미로운 사건들의 이미지를 결합한 서사 구조의 기초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춤 이미지를 덧입히는 정도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작품에 이질적 요소를 섞어 넣는 하이브리드가 대세로, 이미 춤 창작의 방법을 넘어 목적이 되어 있는 듯하다. 하이브리드란 것이 단순하게 혼합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혼합 이후 가치를 높인다는 것에 방점이 있는데 ‘가치’에 방점이 찍힌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러한 추상적이고 애매한 창작태도는 결국 작품에 내재한 힘과 의미를 약화시키고 왜곡되게 한다. 정신이나 가치. 문화사 등 초역사적이고 물화된 개념으로 자신들의 비역사적 태도를 은폐하고 위장하는 관념론적 작품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춤 작가(예술가)는 자신만의 춤 의식과 철학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작품은 자신의 정신이고 작가의 춤언어는 사실만 말하는 가치중립적인 과학자의 언어와는 달리 미래의 예술세계를 열어가는 가치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차원의 가치를 꿈꾸고 있는.

 춤을 사유하고 조직, 구축하는 방식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상상력의 빈곤에서 비롯된 이 오류에 관한 논의를 해보고자 한다.

 




“한국창작춤의 경향”을 발제하는 춤비평가 권옥희 ⓒ춤웹진




Ⅱ. 시노그라피, 비선형적 공간연출

과거 춤을 해석하는 잣대로 지금의 춤 해석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공간연출에 관한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춤 무대에 적용되면서 춤에 관한 경계가 허물어지고 융복합이니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 디지털 아트와 같은 현대예술을 읽어내는 개념어가 난무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춤은 무용수의 움직임을 포함한, 무대에서 보이는 모든 것이다. 춤에서 ‘시노그라피’를 주목하고 있다. 무대의 공간연출을 총칭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 시노그라피는 춤추는 몸뿐만이 아니라 정적인 공간, 그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빛, 형태, 질감 등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시노그라피는 하이브리드의 시대를 대변하는 춤에 있어서 가시성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변용과 창조를 이루어내고 있다. 영상과 조명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로 하나의 공간을 해체하여 다시점을 제시하고, 부분을 확대한 것 같은 비선형적 공간연출로 하나의 무대 공간을 큰 주제에 묶기도, 파편화된 공간이 혼재성을 가지게 되는 등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무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춤추는 몸의 움직임을 넘어 공간연출로 확장되면서 무수한 미학적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춤에서 가장 중요했던 현존성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 이것은 무용수에 의해 주도되는 실제적 공간이 아닌 동시적 공간의 비선형성으로 상징적 의미를 생성하는가 하면파생되는 이미지는 춤의 해석에 있어 확장된 경험을 하게 한다.

 이미 낭만발레에서 나타난 공중이동 장치로 인한 공간 변형, 발레 뤼스의 오리엔탈 룩, 로이 퓰러의 슬라이드를 활용한 영상효과로 인한 공간의 상징성, 그리고 우연성 기법을 통해 구성의 혼재와 맥락의 순차적 전개를 거부한 머스 커닝엄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공간에 관한 사고를 변화시켰다. 이후 콜라주 형태로 공간과 구성을 조작한 피나 바우쉬의 춤 이미지는 독립적으로 형태화되어 통합적 의미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조명, 음향, 무대연출, 움직임에 반응하면서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공간연출은 현대에 들어와 더 정교해면서 (조명)빛과 빛이 품은 색과 이미지로 관객과 소통한다. 절대적인 것이 없는 이 시대에 상상력을 동반한 새로운 춤이 생성되는 것, 고무적인 현상이다.
 아쉽게도 우리 춤 현장에서 본 대다수의 작품은 영상과의 단순한 조합에 그칠 뿐 작품에 크게 영향을 미치거나 파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더 아쉬운 지역무대의 혼종 춤. 프로시니엄 무대에 빈번하게 오르는 힙합은 기성적인 것, 구시대적인 사상과 문화와 마주했을 때 오는 감정 감각들을 표출함으로서 해소시키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 표출이다. 그렇기 때문에 힙합 댄스는 기존 무용에 반하는 의미, 또한 차별적인 대우를 비꼬는 형식으로서 아카데미나 극장이 아닌 길거리, 뒷골목, 공원, 광장 등에서 춘 춤으로 몸을 통한 주체적인 저항의식을 기반으로 즐거움과 유희로 이 춤이 가지고 있는 저항의식이 음악, 춤, 문화와 만나야 빛난다. 그런데 힙합댄스의 온갖 춤을 섞어 프로시니엄 무대에 오른 뒤 하이브리드적 무대라고 한다. 물론 파생된 형태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진화해간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시 말해 춤 주체가 타 장르에 의해 영향 받고, 변형되며, 확장을 거쳐 변이되는, 그것이 소통의 과정이다.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것으로, 그것이 초창기 힙합댄스의 원형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형되었다고 하더라도 힙합댄스는 단순히 비트가 강한 음악에 맞추거나 보여주기 위한 것들에 대한 절제 혹은 관객들의 요구에 맞춰 생겨난 춤이 아니다. 정제되어 있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즉흥적이면서도 원초적인 춤이다. 순수 춤 무대의 구성과 형식을 그대로 흉내 내면 안 되는 이유다. 주체적으로 춤에 대한 본질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가치 있는 춤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누구도 일러주지 않는 것 같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대되며 새로워지는 무대에 관한 모든 지식을 스스로 탐구해나가는 것, 안무자 스스로 자신의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 창작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Ⅲ. 춤의 ‘창작윤리’

우리 안무가들은 과연 당대의 정신사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으면서 작품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사유를 춤으로 구축하고 있는 이들일까? 혹은 춤 권력을 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남의 춤 기법과 연출을 도용하는 (예술로)타락한 이들일까?

 춤은 미적 대상이고 윤리는 선(善) 의 문제이다. 양자는 그 가치의 차원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를 한꺼번에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자들의 ‘창작윤리’를 부제로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작품의 흐름과 경향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안무가의 춤 의식, 혹은 창작윤리에 관한 예술가의 태도와 그의 춤을 연결시켜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생각과 그것은 어느 정도 분리시켜 논의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른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저급한 춤 의식을 가진 안무가라도 뛰어난 춤적 재능으로 박수를 받을 수도, 저급한 춤 의식이 윤리적 해악의 요소로 남는다는 이유로 졸작이라 평가받을 수도 있다. 무용수나 안무가들의 춤적 재능은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겠지만 그것은 춤에 대한 어느 정도 일정한 형식적 기준이 통용되던 초기 춤의 기술(기교)적 적용에 한해서이고 화려한 기교로 감수성만을 건드리는 춤이 안무가의 손을 떠나 대중과 비평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그 시대 그 춤이 관객들의 집단 정체성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며 이제 그런 춤의 시대는 끝난 듯하다.

 춤은 사회적 윤리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춤 본래의 도구성을 거부하면서 춤 작품 밖의 어떤 현실이나 이념을 나타내는 도구가 아니라 춤(움직임)의 본질을 찾는, 춤 자체가 목적이고 실재라고.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춤(작품)이 어떤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고 춤 속에서 어떤 사회적인 발언이나 종교 혹은 작가의 사유, 사상을 읽어내려고 한다. 실제로 춤 속에서 정치를 읽고 사회와 경제 종교와 철학을 읽기도 한다.

 작품에 대한 논쟁은 이렇게 춤의 본질과 목적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에서 비롯된다. 대중과 비평가의 취향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작품, 혹은 비평가만 만족시키는 작품(그것도 소수의 눈이 밝은 비평가라고 치자).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일까. 이것은 다시 춤(작품)과 안무가(예술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 구체적으로 말해서 춤과 안무가를 따로 떼어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의로 발전시킬 수 있다.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은 예술가이고 예술가의 근원은 예술작품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춤 작품과 안무가를 떼어놓고 얘기할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필자는 ‘춤이 그 사람이다’고 생각하고 있다.

 안무가의 창작윤리가 요구되는 도용과 모방에 관해 말해보자. 단순모방과 의도모방이 다르고 혼성모방이 다르다. 의식적인 모방으로서 보는 사람이 그것을 패러디라고 인정해야 성립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혼성모방, 도용이 된다. 패러디는 원작에 대한 연구 없이 가져다 쓰면 안 된다. 하지만 연구할 생각은 1도 없이 가져와 자신의 창작인양 무대에 올리는 창작자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좋은 작품일 수가 없다.
 패러디는 기존에 있던 춤작품에서 가져와 새로운 의미를 재생산해야 한다는 데 방점이 있다. 앞서 얘기한 하이브리드와 같다.
 그런가하면 춤의 자기복제(재해석)는 과거 자신의 정서와 철학에 의해 만들어 넣었던 춤 동작이 현재의 것과 서로 포개지고 다르게 들어와 과거의 작품과의 다른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과거의 작품 속에 드러난 자아의 편린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므로 현재의 작품이면서도 과거의 어떤 정서가 현재의 그것과 겹쳐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것, 그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편차, 삶의 과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경우 그 춤과 연출이 가지고 있는 의미 혹은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로 살아나게 되고, 과거의 것이 현재의 것에 재현되면서 자신의 새로운 춤적 질서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레퍼토리도 마찬가지다. 안무가의 춤적 사유와 세계에 대한 해석의 자세가 달라지는 것, 말하자면 이런 작품을 통해 우리는 안무가의 사유와 상상력, 춤 의식 변화의 궤적을 알 수 있게 된다. 자기 복제, 패러디의 효용성이다.


Ⅳ. 알쓸잡. 긴장과 거리

쓸데없는 얘기 하나 더.
쓸모없어서(無用) 아름다운 것이 춤이다. 앞서 논의한 내용과 다른 가치판단이다. 춤(움직임)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미적 판단의 대상인 춤을 윤리적 판단의 언어로 재단하다보면 마치 꽃의 아름다움을 선악의 기준에 맞추려는 듯한 억지의 우려가 있을 수 있다. 우주와 삶의 비의(秘意)를 추는 춤(작품)을 안무가와 무용가의 윤리적 태도만을 기준으로 해서 평가하려는 것은 감성에 도덕적인 설명을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춤을 볼 때 동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동작 속의 그 내포를 읽는다. 다시 말해 무대, 음악, 조명과 함께 춤이 만들어내는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려고 한다. 보여 지는 움직임과 감춰진 의미 사이의 거리를 상상력으로 메우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예전에는 작품을 보고 그저 감탄하고 감동하면 되었지만, 지금의 춤은 안무자가 숨겨놓은 의미를(있다면) 읽어내야 하고, 안무자 또한 작품 속에 관객이 상상력으로 메워나가야 할 어떤 것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때 그 공간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을 유추할 수 있는데 그 공간이 너무 좁으면 긴장이 떨어지는 뻔한 작품이 되는 것이고, 너무 멀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작품 속의 긴장과 유추,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작품은 이런 공간을 긴장감 있을 정도로 유지해야 한다. 이런 공간과 거리 조정의 성패는 결국 작품의 성패로 이어진다.

 좋은 작품이란 무엇인가 하는 평가기준은 다양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긴장이 잘된 춤이라할 수 있다. 여기에서 긴장이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온갖 확장과 응축으로 충만한 조직체인 긴장감을 말한다. 그것은 통합된 전체 속에서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합하고 주제와 그 특정의 이미지를 잘 조화시켜야 한다. 일반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의미들의 조화나 갈등 속에서 안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지닐 때 긴장이 나타난다. 춤을 볼 때 느끼는 재미와 감동은 바로 이 대립되는 둘 사이의 긴장에서 온다. 모든 은유의 형식이 바로 이것이다. 안무가는 늘 작품 속에 들어있는 대립적인 요소 간의 유추를 가능케 하는 적정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거리가 주는 팽팽한 관계를 유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얘기하고 보니 별 쓸모없고, 공허한 말이다. 비평가가 긴장을 긴장이라 말하고 은유를 은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춤이 이미 만들어진 다음의 일이고, 안무가가 춤을 만들 때 은유니 상징이니 생각하며 춤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덧붙인다. 춤은 의미에 거리를 두기 때문에 춤 읽기와 해석은 보는 이의 경험이나 상상력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당연히 잘 못 읽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늘 주장하는 춤의 유일하게 합당한 영역이 있다. 아름다움이다. 춤 동작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던지는 주제를 풀어놓는 춤의 구조에서, 혹은 메시지의 묵직함에서 영혼이 고양됨을 느껴서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이건 그것이 최상으로 구현되었을 때는 보는 이들의 감수성이 예민한 영혼을 자극할 것이다. 사회를 고발하는 내용이건 개인적 사유에서 오는 고통이건 마찬가지다. 모든 감정의 고양된 상태를 말함이다. 긴장과 거리를 구축하고 있는 작품에서 느끼는 흥분과 고양의 정도는 얇고 천박한 역사의식, 옳지 않은 처세술로 생산한 작품과는 다르다.


Ⅴ. 맺는말

춤 작가들이 춤을 만들고, 무용수들이 춤을 춘다. 둘을 동시에 하는 이도 있다.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결국 사람한테 답이 있는 것이다. 춤의 경향과 관계없는 얘기를 늘어놓은 이유이다.
 춤비평가는 안무가가 믿는 ‘춤’에, 그 춤이 내포하고 있는 불확실한 ‘진리’에 내기를 걸 수밖에 없다. 비루한 춤 현장. 이제까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듯이 앞으로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최선의 상태로 여겨진다.
 작가와 무용가의 타락은(창작윤리) 비평의 무능에 있다고 생각한다.





 

2019. 07.
사진제공_춤웹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