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삼라만상 온갖 것을 테마로 박물관은 가능하다. 고래(古來)로 그랬다. 게다가 프라하, 런던, 산마리노, 경주(慶州), 공주(公州), 개성(開城)... 들처럼 도시 전체를 박물관으로 치는 경우도 흔하다. 이 와중에 유독 춤박물관은 드물다. 많을듯한데, 실은 그렇지 않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고, 스페인 세비야(플라멩코박물관)에 있고, 독일 쾰른에 있고, 미국 뉴욕주에 있다. 그외 어디에 있을까. 이 세상에 춤박물관은 4군데뿐이란 말인가? 세상 천지에 춤이 있다고들 하는데, 춤박물관은 왜 없다고나 할 만큼 적을까. 춤은 찰나에 머물다 사라져야 하는가.
1990년대 초 미국엘 가서 춤박물관이 있다는 걸 알았다. 당시 미국 여행 목적은 미국 예술춤계를 살피는 것. 그때 세계 (예술)춤계는 다른 문화예술분야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유럽이 양극을 이루고 있었다. 그 이전 1940년대 이후 70년대까지 세계 춤계는, 생각건대, 발레를 제외하면 사실상 미국 일극(一極) 체제였다. 여름 한 철 뉴욕을 거점으로 해서 ADF(아메리칸 댄스 페스티벌, 1934년 창설된 85년 역사의 현대춤축제) 개최지 노스캐롤라이나, 제이콥스필로우(1942년 세워진 77년 역사의 미국 최초 춤전용 극장) 소재지 매사추세츠 등지를 주유(周遊)하던 중, 어디선가 전단 같은 인쇄물에서 미국 국립춤박물관을 홍보한 것을 보았다.
미국국립춤박물관 전경 ⓒ김채현 |
그 춤박물관이 뉴욕시에 있었다면야 물론 갔었겠지만, 온갖 박물관이 있다는 뉴욕시에 있지 않았다. 춤박물관이 있다는 곳은 뉴욕주 Saratoga라 박혀 있었다. 사라토가 전투라는 것은 들어보았지만, 지명은 생소했고 발음마저 사라토가로 해야 할지 새러토가로 해야 할지 헷갈렸다. 90년대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먼저 뉴욕, 그 다음 워싱턴, 그 다음 LA,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시카고, 그 다음 알라스카, 시애틀, 플로리다, 마이애미, 라스베가스, 텍사스, 그 다음 애리조나, 오하이오 정도의 지명들로 연결되는 나라였다. 지금 20대 정도 세대라면 잘 믿기지 않을 사실이다. 그런 지명들에 비해 사라(?)새러(?)토가는 낯설었다. 좀 길게 뉴욕에 머물긴 했어도 나름 일정이 빼곡한 터에 생소하고 헷갈리는 그곳에 가볼 여유는 사실 없었다. 구글 지도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어서 거기는 그냥 뉴욕시에서 꽤 먼 뉴욕주 북쪽의 산골두메라는 짐작에 그쳤다.
좀 막연한 곳에 춤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은 늘 마음 한켠의 희망 사항으로 잠수타다가 미국에 갈 적에는 마치 유령처럼 기억에서 얼핏 되살아나곤 하였다. 그러기를 근 30년, 뉴욕시에서 꽤 먼 그곳은 솔직히 너무 멀었으므로 나의 여행 목록에서 번번이 최종 탈락한 나름 불운의 사라(?)새러(?)토가였다. 그러다 근래 몇 해 사이 체력이 가능할 때 가봐야 한다는 결심이 점점 굴뚝같아졌고, 마침 올 연초 뉴욕시 맨해튼에서 제롬 로빈스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관찰할 겸해서 만사를 미루고 사라(?)새러(?)토가로 향했다.
읍(邑)이나 면 규모의 초미니도시 새러토가(공식 지명: 새러토가스프링스)는 초미니도시답게 단출한 곳이라 고속버스나 열차로 몇 시간 걸려 도착하고 나면 춤박물관 가기는 쉽다. 택시를 이용하면 되니까. 뉴욕주 맨 아래에 뉴욕시가 있고 거기서 같은 뉴욕주의 새러토가는 북쪽으로 고속도로로 몇 시간거리이다. 뉴욕주 하나의 면적만 남한의 1.5배 크기이니 과연 미국은 넓다.
뉴욕의 호텔에서 새벽에 출발했는데 거길 도착하니 벌써 한낮이다. 물이 좋아서 새러토가스프링스라 했다하고 휴양지로 이름난 이 미니도시의 한겨울은 한적하였다. 중간 기착지인 새러토가 정류장에 내리는 사람은 몇 안 되고 그래도 붐빌 줄 알았던 대합실마저 텅비었다. 내린 사람들을 지인들이 빠르게 픽업해가고 나 혼자 남는다. 마침 밴급의 중형 택시가 딱 1대 서 있고, 기사는 타라고 한다. 타야겠는데 흡연이 필요하니 기다려줄 수 있겠는가 물으니, 기사는 행여 승객을 놓치면 어쩌나 싶게 승차하고 흡연해도 좋다는 화통한 제안을 날린다. OK. 막상 타고나니 실내 흡연할 기분은 그냥 물러서버렸다.
미국국립춤박물관 공식 시그널 |
미국국립춤박물관 전경 |
산골 두메답게 뉴욕에서는 안 보이던 눈이 여기엔 지천이고 눈이 수북한 박물관 입구에서 택시가 내려다준다. 첫눈에 옆으로 길죽하니 늘어선 단아한 모양새의 단층짜리 흑갈색 집채가 주변 수풀 경관과 상큼한 찬 공기와 더불어 감싸온다. 집채 앞의 툭 트인 광장에 서 있는 것만으로 휴양이 되는 기분이다.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익숙한 자연사박물관 식의 거대 박물관이나 석조·콘크리트 박물관과는 전혀 딴판이어서 조촐한 춤의 세계로 초대받았다고나 할지. 그러면서 자그마한 이 집채 속에 콘텐츠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일말의 의구심도 일었다.
박물관 본관에 들어서면 밝고 화사한 로비를 거치게 된다. 로비에는 1950년대에 인체를 변형하거나 은폐하는 현대무용을 개척한 알빈 니콜라이 서거 25주년 기념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 로비는 지난 30년간 여러 주제의 춤 전시회를 제공하였다.
미국국립춤박물관 본관 로비 |
그 옆 전시관에서는 ‘Gender Neutral’(젠더 중립) 이름의 테마전이 있다. 몬테 카를로 트로카데로 발레단이 2013년에 발레단 자료를 춤박물관에 기증한 것을 기념해서 2018년에 마련한 전시회다. 남성무용단이되 성별 구분된 의상과 장식을 무시하고 남녀 역할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은 몬테 카를로 트로카데로 발레단이다. 이 발레단을 비롯하여 여러 무용가들의 유사한 활동상에 초점을 맞추면서 춤에서 성별에 관한 고정 관념을 되짚고 생각해보도록 한다.
‘춤과 젠더 중립’ 전시회 |
‘춤과 젠더 중립’ 전시회에 소개된 마크모리스무용단 |
옆 전시관엘 가면 춤추는 프레드 아스테어가 관람객을 맞는다. 미국에서 춤은 영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성영화 시대에도 그랬고 유성영화 시대 초창기 때부터도 그랬다. 1950년대까지 춤과 영화는 사실상 공존 공생 관계였다. 이 ‘영화 속의 댄서들’ 테마전은 2014년 이래 상설전으로 열리고 있다.
‘영화 속의 댄서들’ 상설 전시관 |
그 옆 전시관의 사진전은 좀 이색적이다. 사진집 〈Dancers Among Us〉를 출간했던 조던 매터의 다른 책 〈Dancers After Dark〉를 주제로 해서 무용수들이 야심한 대도시에서 꿈꾸는 특이한 자세나 환상적 면면들을 시간대 별로 찬찬히 보는 즐거움이 있다.
무용가의 하루를 재구성한 전시물 |
말 그대로 쿠바가 낳은 불세출의 지젤 알리시아 알롱소의 〈지젤〉 주역 데뷔 75주년을 기념하여 춤박물관은 2018년 기념전을 열었다. 알롱소는 10대 후반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1943년 23살의 나이에 아메리칸 발레 씨어터에서 지젤로 데뷔하였다.
알리시아 알롱소 〈지젤〉 특별전 |
다시 로비로 나오면 ‘명예의 전당’이 있다. 미국 춤에 기여한 인물들을 기리는 전시관이다. 1987년에 개관하였다. 수십명의 기라성 같은 무용인들의 초상이 금색 알루미늄 사진판으로 새겨져 그들의 공로를 기억한다. 그 초상사진들은 해마다 불어나고 있다.
미국국립춤박물관 ‘명예의 전당’ |
‘루신다 차일즈’ 특별전 |
유리창 자연채광을 이용한 전시 |
그 옆 전시장은 개별 무용가들을 기리는 특별전을 해마다 바꿔가며 열고 있다.
미니공연장 리기씨어터, 2014년 개관 |
춤 새싹들의 실습 교육을 위한 배려 |
뉴욕시티발레 단원들이 기증한 토슈즈 모음 |
댄스 슈즈 모음 |
미국 국립춤박물관은 한 마디로 미국의 춤 역사관이다. 여기서 춤은 예술춤, 대중춤을 구분하지 않는다. 춤으로서 미국의 문화예술에 기여한 활동은 춤박물관 소장 및 전시 대상이 된다. 전반적인 전시 내용으로 미루어 20세기 이래의 활동에 국한되며 미국 민속춤이나 해외 다른 나라 춤들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 한 곳의 춤이라도 실속있게 관리하자는 것이 기본 방침으로 짚어진다.
미국 국립춤박물관은 1987년에 정식 개관하였다. 애당초 전시관들만 갖춰 출발했고 극장과 실습장을 구비하고 무용인들과 단체들로부터 기증을 받는 등 규모를 알차게 키워왔다. 게다가 그 첫 출발선상에서는 폐가처럼 낡고 버려진 건물과 인근 공유지만 제공받았을 뿐이고, 공공 지원금은 확실히 전무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지난 30여년간 여러 개의 전시관에서 열린 전시회는 200건 정도 된다. 전시 내용을 보면 상당히 충실한 박물관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 전시회를 한 해도 빠짐없이 그만한 회수를 거듭해서 열어온 역량과 안목이 부러움을 산다. 그것도 새러토가라고 하는 산골 ‘오지’(奧地)에서 말이다.
박물관에 들어설 때 자그마한 이 집채 속에 콘텐츠가 얼마나 있을까 했던 의구심은 관람 중에 어느덧 사라진다. 미국 국립춤박물관은 수집품들을 덩그러니 나열하고 박물관이라 자처하는 식의 맥빠진 곳이 아니었다. 멀리서 사는 이방인이 좀체 접근하기 힘든 원거리 오지에 위치한다는 점 말고는 관람객의 기대에 부합한다. 주변 경관은 물론 무엇보다도 수집품들을 이리저리 엮어 내놓는 해설·해석·평가의 솜씨가 가히 수준급이다! 잠정 결론, 미국인이 아니라 적어도 춤 전문인이라면 죽기 전 한 번은 들러야 할 곳.
춤문예 권위자 겸 미국 예술춤진흥 리더였던 링컨 커스타인이 서술한 ‘미국국립춤박물관의 의의 그리고 지역 새러토가공연예술센터와의 관계’ |
필자 생각에, 새러토가는 (미국) 춤박물관의 상징이다. 인구 2만 남짓의 이곳 오지가 그만한 상징성을 획득한 데는 그만한 내력과 공력이 있었을 것이다. (계속)
미국국립춤박물관 본관에서 바라본 입구 |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