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기획연재_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9)
오늘의 불림
채희완_춤비평가

탈춤에는 독특한 극적 표현양식의 하나로 ‘불림’이라는 것이 있다. 

   말 뜻대로 장단을 청하여 부른다는 것인데, 놀이꾼이 몸짓과 함께 짧은 글귀의 말을 외면 잽이(악사)가 받아 풍악을 잡아주고 그리고선 춤추게 된다. 춤추자면 불림을 해야 하고 이것이 있고서야 춤의 반주음악이 나온다.(이는 단가나 판소리에서 아무런 전주도 없이 창자가 먼저 몇 마디 운을 떼면 북 고수가 이를 알아듣고 그제서야 북을 잡아 장단을 맞춰주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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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춤의 불림에는 흔한 예를 들자면, 봉산탈춤에서 ‘낙양동천 이화정’ ‘흑운이 만천 천불견’ 이라든가 양주별산대놀이에서 ‘금강산이 좋단 말은 풍편에 넌즛 듣고’ ‘녹수청산 깊은 골에 청룡화룡이 꿈트러지고’, 송파산대놀이에서 ‘나비야 나비야 청산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가자’, 은율탈춤에서 ‘저 물레 파도는 뉘 파도’ ‘소나무 장작은 왜장작’, 들놀음이나 오광대에서 ‘청노새 청노새’ ‘음박캥캥’ ‘망했네 망했네 양반집이 망했네’ 등이 있다. 시 구절이든 일상 말이든 짧은 사설과(사설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음률과 몸짓이 하나로 어우러진 불림은 그 자체가 시이자 노래이며 음악이고 춤이다. 가히 음악과 노래와 춤이 한 몸뚱아리라는 악가무 일체의 살아있는 단적인 예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이 짧은 한 대목이 극의 내용을 총괄하고, 춤과 음악과 더불어 이끌어 엮고 달아 맺었다간 어르고 풀어 나아가게 하여 놀이에 굴곡과 매듭을 주고, 또한 앞길을 예시해준다.
   또 어떤 불림은 봉산탈춤의 취발이처럼 ‘감돌아들고 풀돌아든다’나 ‘낑고랑 깽고랑’, ‘양반들의 ’건, 건드러지게 치라네‘, 영감 할미의 ‘반갑고나 얼쑤’하듯이 극 내용을 지휘자처럼 연출자처럼 앞서 지시하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장단을 풀어 의성어로 엮어내 ‘절-수- 절-수- 지화-허자 쪼르르’(양주별산대놀이의 옴중 염불장단)하거나 ‘음-박 캥-캥(’들놀음과 오광대의 굿거리 장단), ‘덩-덩 덩더르쿵-’(봉산탈춤 마부의 굿거리 장단), ‘캥마쿵 캥마쿵 캥마쿵 캥-캥’(봉산탈춤의 미얄할미 자진굿거리 장단), ‘떵기 떵기 떵더쿵 떵 떵 떵더쿵’(양주별산대놀이 도끼누이의 무당 장단)하고 장단을 부른다. 좀 더 심할 때는 ‘쳐라 쳐라 처얼 철, 처-리 절수-’(양주별산대놀이의 취발이 타령장단)하고 능굴 칠 때도 있고 간단히는 ‘쳐라-’(양주별산대놀이의 샌님 세마치장단)하고 한 마디로 부른다. 말이 없는 묵언의 배역들은 손바닥 장단으로 불림을 한다. 양주별산대놀이나 봉산탈춤, 강령탈춤의 노장춤에는 부채짓을 하여 굿거리장단으로 바꾸거나 염주를 벗어들고 염주를 놀려 타령장단으로 바꾸기도 한다. 이런 때는 극적 내용의 전환을 할 때여서 마치 궁중악에서의 박(拍)과 같은 노릇을 한다. 

   이런 극적 구실과 함께 불림에는 춤출 장단을 스스로 고르는 자유로움이 있는 것이다. 염불, 타령, 굿거리, 자진모리, 당악 등 장단이나 빠르기는 물론이고 사설의 내용도 그때그때마다 제 뜻대로 정할 수 있다. 이런 자의적인 현장성이 탈춤의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열린 구조를 이루게 하는데, 이에서 즉흥성과 흥겨움, 푸근함과 여유가 비롯된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하게는 불림이 춤추는 이에게 신명을 불러내 준다는 점이다. 불림으로 한껏 신을 감아 올려 다시 풀어내는 춤을 보면 보는 이에게도 어깨짓이 절로 난다. 보는 이의 속 깊이 숨은 신명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이때의 짧은 사설은 이미 신을 받아 모시는 하나의 주문이며 기도이자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신을 불러 말씀을 전하는 무당굿에서의 공수와도 같은 힘을 과시한다. 보는 이는 이 불림 한 마디, 몸짓 하나에 모두 굴복하고 신명의 사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숨겨져 보이지 않는 신명을 깨우치는 일은 곧 신명을 은폐시킨 살을 없애는 일이다. 오늘날 어떠한 불림이 있어 숨어 잠자는 신명을 깨울 것인가. 오늘날 어떤 놀이꾼이 있어 이 땅의 살을 제거하는 사제가 될 것인가. 자신이 하늘임을 깨닫는 이마다 누구나 신명의 사제인 것이다.
   이를 온 몸으로 일해 내는 것이 오늘날 시인과 음악인, 소리꾼과 춤꾼에게 짐지워진 과제이다.
 

채희완
현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장.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
2019.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