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심소(心韶) 김천흥 10주기 추모의 글
자애로운 미소로 시대의 병통 위무하며 구원
김영희_전통춤이론가
 지난 한 세기 우리의 현대사는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격동의 세월이었다. 굵직한 사건만 돌아봐도, 한일합방과 3‧1독립운동, 해방과 정부수립, 6ㆍ25전란과 남북분단, 4ㆍ19혁명과 5ㆍ16 군사정권, 광주민주화운동과 88서울올림픽 등등, 그야말로 숨 가쁘게 휘몰아쳐간 격랑의 시대였다.
 사회의 풍조나 가치관 역시 상전벽해로 환골탈태돼갔다. 전통적인 농본사회가 급격한 산업사회로 바뀌어 가고, 서정적인 농촌문화는 삭막한 도회적 일상성으로 환치됐으며, 인륜에 바탕을 둔 유교적 가치관은 자본주의적 물질만능의 풍토로 뒤바뀌어 갔다. 이 같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시대인들은 합당한 대안 없이 표류하며 삶에 대한 힘겨운 갈등과 회의에 빠지기 일쑤였으며, 물질적 풍요와 반비례하는 행복지수를 힘겹게 떠메고 살아야 했다.
 바로 이 같은 시대배경이 심소선생 무악예술과 인생역정의 무대이자 토양이다. 결코 태평연월의 호시절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뚜렷한 가치관을 공유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고뇌하고 체념하는 시절이었다.
 이 같은 세태 속에서 심소선생은 소극적으로 ‘사의 찬미’같은 엘레지나 부르고 있지 않았다. 해금으로 무용으로, 아니 생불(生佛)같은 자애로운 미소로 시대의 병통을 위무하며 구원해왔다. 같은 시대를 동행한 많은 민초들이 심소의 청아한 가락에 시름을 잊었고, 단아하고 정갈한 심소의 춤사위에 너나없이 동고동락의 희열을 나눴으며, 세사의 달관으로 빚어진 심소의 온유한 미소에는 강퍅(剛愎)한 세상도 금세 생기를 띠며 봄볕처럼 화사하게 밝아지곤 했다. 

 


 시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고[詩言志], 노래는 말로 표현한 생각을 길게 읊는 것[歌永言]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나 정서를 언어나 노래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한계상황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수지무지 족지도시(手之舞之 足之蹈之)의 몸짓이다. 어설픈 췌언(贅言)을 버리고 무궁한 침묵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무용의 세계, 곧 침묵의 세계는 상호소통의 궁극적 묘책이자 대도(大道)이며 지고한 예술의 경지이다.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경우처럼, 백 마디 설명이 필요 없다. 눈빛 하나 몸짓 한 동작으로도 만물을 수렴하며 천하를 설파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사 돌이켜보니, 심소선생의 해금은 음악이 아니었고 심소선생의 춘앵전은 무용이 아니었다. 음악이되 음악이 아니고 무용이되 무용이 아닌 그 너머의 세계, 곧 심소의 인생이며 우주관이자 철학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달관의 체로 걸러지고 정제되어 순수무구한 동심의 세계로 응축된 화룡점정의 원형질이 곧 심소선생의 미소세계이다. 분명 심소의 미소는 심소예술의 이데아이자 메타포어가 아닐 수 없다. 가섭(迦葉)같은 지혜로운 후학들이 있어, 정재무악의 진수인 심소미소(心韶微笑)의 정체와 미학세계를 온전히 풀어내고 널리 펼쳐갈 수 있으면 우리네 삶은 한층 풍성한 살맛으로 싱그러워질 것이다. 

 


 ‘손만 들어도 흥이다. 발만 옮겨도 멋이다.’ 심소선생은 그렇게 무애(無碍)의 춤으로 풍진세상을 어루만져 주셨다. ‘눈빛만 닿아도 자애롭다. 표정만 보아도 화평하다.’ 심소선생은 그렇게 천진무구한 자비심으로 곤고한 중생을 보듬어주셨다.
 이제 심소선생은 이승의 소풍을 마치고 아득한 피안으로 떠나셨다. 하지만 심소의 사뿐한 춤사위와 동심의 미소는 파란 창공의 흰구름 밭에 보허(步虛)의 춤으로 새겨져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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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뜨락의 처용랑


최종고_서울법대 명예교수, 한국인물전기학회

 세대적으로나 전공적으로나 도저히 가까울 수 없는 심소 김천흥(1909-2007) 선생님과 이 땅에서 인정을 나눌 수 있었던 특이한 인연을 서거 10주년을 맞으며 새삼 감사하게 느낀다.
 돌이켜보면, 심소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7년인가 하와이 호놀루루에서였다. 그 무렵 나는 하와이대학에 교환교수로 있은 후 비교적 자주 갔는데, 거기의 한국학연구소(Center for Korean Studies)에서 ‘김천흥문고’를 발견하였다. 김천흥이란 전통무용가 성함도 처음 알았는데 뜻밖에 그곳에 친히 오셨던 것이다. 90세 노인이 비행기를 타고 오신 것도 놀라운데 사뿐사뿐 나비처럼 걸으시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춤을 추면 저렇게 건강해지는구나.’ 생각했다. 잠깐 인사를 드린 후 서울서 한번 뵙겠다고 했다.
 귀국해 어디 사시는가 알아보니 뜻밖에 우리 아파트 앞의 임광아파트에 사시는 게 아닌가! 당장 찾아뵈니 아드님 내외와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 집도 윤석중 선생님과 옆집이니 겸사겸사 놀러 오라고 하셨다. 얼마 후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나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선생님 앞에서 춤을 추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두 발이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아니한다. 선생님은 부채로 “발을 떼라”며 탁 치시는데, 그 청천벽력이 나를 혼비백산하게 하여 어찌 췄는지도 모르게 땀만 쫙 흐르는 몇 분으로 끝났다.
 내가 이 일을 감행한 것은, 그래도 순종황제 50세 생신연에서 춤을 추신 ‘조선의 마지막 무동(舞童)’ 앞에서 춤을 췄다는 사실 자체가 내 일생의 영광이요 평생의 화제임에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호놀루루의 할라 함(Halla Pei Huhm) 무용소를 몇 번 들랑거리며 한국교민들이 전통춤을 익히는 것이 좋아 보여 어깨너머로 따라해 본 것 뿐이었다. 나는 그때 심소 선생님이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시고 웃음이 많으시지만 전공면에서는 철저하시고 적당히 넘기시는 법이 없으신 어른이라고 느꼈다.
 내 서재에 우연히 일본 교토에 가서 아라시야마(嵐山)에 있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기념관에서 미소라 모형사진 옆에 서면 꼭 실제로 함께 찍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을 책장에 얹어놓고 있었다. “이건 미소라와 함께 찍은 것이예요”라고 하니 정색을 하시며 “그럴 리 없지. 거짓말이지”하시는 것이다. 작은 일에도 이렇게 정확하신 어른이시구나 하고 느꼈다.
 그때부터 친해져서 회고록 『심소 김천흥 무악70년』등 저술들을 듬뿍 선물로 받았다. 그저 춤만 추시는 분이 아니라 면밀히 연구하고 정리하는 선비임을 알게 되었다. 회고록도 매우 자상히 인생의 발자취를 적어서 개인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악계와 무용계의 역사를 알 수 있도록 잘 정리 수록되어 있었다.
 나는 하와이대학의 전기(傳記)연구소(Center for Biographical Research)에서 배워 2000년부터 한국인물전기학회(Korean Biographical Society)를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데, 한국인의 전기학의 관점에서도 이 책은 매우 뜻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되었다. 선생님은 자서전이 아니라 회고록이라 부르시며 맨 끝마디까지 매우 겸양하게 이렇게 적으셨다. “이렇게 86세의 늙은 몸이 세 가지의 국은(國恩)을 입으며 남은 여생을 즐겁게 보내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라 생각하고 깊이 감사드리며 아직 못 다한 일을 계속하려고 마음 깊이 다짐하고 있다.”
 이 뜻 깊은 회고록을 10주기에 보완하여 낸다 하니 후손, 후학으로서 정말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와이대학에서 알게 된 주디 반 자일(Judy Van Zile) 교수가 『한국춤의 관점들(Perspectives on Korean Dance)』(2001)이라는 귀한 책을 내었는데, 거기에도 심소 선생님에 대해 ‘한 공연예술가와 스승으로서의 김천흥(Kim Chun-hung: Portrait of a Performing Artist and Teacher)’이라는 논문이 실려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심소선생님과 면담하여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여 세계 학계에 알리고 있다.

 


 나는 1998년엔가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심소 무악 80년 기념 공연에 초대되어 처음으로 선생님의 춤추시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았다. 화문석 위에서 추시는 <춘앵전>이란 춤이 얼마나 압축적이고 미학적인가 느껴졌다. 저런 춤을 한번 배워보았으면 하는 동경도 생겼다.
 그런데 그날 내 마음을 더욱 사로잡은 상념은 어쩌면 저렇게 심소선생님이 처용을 닮으셨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나는 처용을 보았을 리 없고 평생 좋아하면 닮아지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리얼한 독특한 무엇이 느껴졌다. 사실 우리 한국인과 한국 역사 속에 외부적 요인과 영향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은 종래 매우 드물었다. 모든 것을 단군배달의 후손으로 한국 자생설로 설명하는 것이 한국학의 기조였다.
 그렇지만 최근 20여년 사이에 한국의 다문화사회화(多文化社會化)와 함께 동서문화 교류사가 비로소 크게 조명되고 있다. 베이징이 아니라 경주가 실크로드의 종착역이자 출발점이라는 사실이 역사학적으로 크게 조명되고 있다. 얼마 전에도 경주에서 고대 페르시아인의 토우(土偶)가 출토되었다. 나는 심소 선생님이 한국 땅에 오셔서 한 세기를 사시다 가신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깊은 뜻이 깃들어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우리 후학들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심소 선생님은 내가 법학교수라고 젊은 학생들과 당신의 제자들의 연구태도에 대해 걱정하시는 문제를 상의하시기도 하셨다. 서울대 음대에 오셔서 좌담을 하시는 데도 가서 그간 장학금도 내어 오신 사실도 알게 되었다. 후세대에게 전통무악을 남기시려는 뜻을 익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심소 선생의 무악의 세계를 좀 알게 되어 2016년 3월 25일에 제109회 인물전기학회를 ‘김천흥의 생애와 무악’이란 제목으로 개최하였다. 최해리 한국춤문화자료원 이사장의 발표로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관 세미나실에서 가졌다. 발표장으로 가는 길에 양혜숙 이사장 등 모두 명인뜨락에 들러 나의 졸시(拙詩)를 심소 선생님 흉상 앞에서 낭독하고 화환을 바쳤다.

 


  나는 국립국악원에 가까이 살기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뒤뜰 명인뜨락에 와서 김천흥 선생 흉상 앞에서 유튜브로 <춘앵전>을 잠시 따라 추기도 하고, 안비취(1926~1997) 명창 흉상 앞에서 경기민요를 따라 부르기도 한다. 명인뜨락에는 심소 외에도 동리 신재효(1812~1884), 금하 하규일(1867~1933), 괴정 김영제(1883~1954), 오당 함화진(1884~1949), 소남 이주환(1909~1972), 죽헌 김기수(1917~1986), 벽사 한영숙(1920~1989), 비취 안복식(1926~1987) 등 아홉 명인의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 이 중 몇 분에 대해서는 심소 선생님이 직접 노력하셔서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뒷면들을 보면 ‘국악명인 동상건립위원회 김천흥’이란 명의의 글귀가 박혀있다.
 이곳에 올 때마다 우리의 전통음악과 무용을 지키고 발전시킨 어른들을 이렇게 기념하는 것이 매우 뜻 깊고 아름답게 보인다. 덕분에 국악을 생각하고 풍류를 즐기며 산다는 것이 행복하고, 문외한 후생이지만 이렇게 인도해주신 심소 선생님에게 충심으로 감사한다. 한국인은 고래로 가무를 즐기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세계도 요즈음은 상당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선배들이 이루어놓은 기초를 바르게 계승발전시켜 나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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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韶 김천흥 선생님의 昭笑를 기리며


김경진_심소김천흥무악예술보존회 사무국장

 2017년 8월 18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심소 선생님의 10주기를 기념하는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8월 들어 이상스럽게 국지성호우가 그칠 줄 몰랐던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행여 10주기 추모행사에 차질이 생길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는데 10주기 기일이자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당일에는 날이 맑아 기쁜 마음으로 기념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음악, 무용, 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들이 선생님의 10주기 추모행사에 기꺼이 발걸음을 해주셨다.
 내가 ‘심소 김천흥 무악예술보존회’의 사무국장직을 맡은 지가 올해로 딱 10년이 된다. 2008년 심소 선생님의 추모1주기이자 탄신100년 행사를 치른 후 행사 결산을 넘겨주시며 김영숙 선생님께서 “김선생이 심소김천흥기념사업회 사무를 좀 맡아보는 게 어떻겠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걱정이 앞서는 마음으로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열심히는 하겠습니다”라고 얼떨결에 대답한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나는 심소 김천흥 선생님의 직계 제자는 아니다. 어찌 보면 심소 선생님의 제자도 아닌 사람이 왜? 어떻게 10년씩이나 보존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심소김천흥기념사업회는 심소 선생님의 유족과 그의 제자들이 선생님의 예술정신과 예술활동을 기리고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심소김천흥기념사업회’가 발족이 되면서 선생님이 남기신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귀중한 자료들의 활용을 위해 ‘춤문화자료원’도 같이 발족이 되었다. 춤문화자료원 역시 심소 선생님의 제자인 김영숙과 최해리가 발족한 단체이다.
 2008년 두 단체가 발족해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심소 김천흥 무악예술보존회(전 심소김천흥기념사업회)’와 ‘춤문화자료원(현 사단법인 춤문화자료원)’은 책출간과 공연, 전시 등 많은 사업을 진행했다. 나는 심소 선생님의 제자인 김영숙 선생의 제자인 셈이다.



 

 내가 심소선생님을 처음 뵌 기억은 20년 전으로 1997년 정재연구회와 일무보존회가 창단되고, 정재연구회의 창단공연을 하던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재연구회 창단공연 프로그램이 <종묘제례일무><춘앵전><가인전목단>’등의 정재였는데 김천흥 선생님께서 공연 리허설을 봐주셨던 기억이 생생하고, 넉넉한 웃음과 농담으로 회원들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정재연구회]와 [일무보존회]라는 이름도 김천흥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걸로 알고 있다. 그 후로도 성균관의 석전대제와 종묘대제의 행사가 있는 날에는 심소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1997년 이후 2004년까지는 정재연구회와 일무보존회의 공연과 행사가 있을 때에는 꼭 잊지 않고 찾아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2005년 3월29일 심소 선생님의 생신 전날 김영숙 선생과 최숙희 선생 그리고 나를 비롯한 정재연구회 회원 몇 사람이 심소 선생님 댁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심소 선생님이 편찮으시다는 얘기를 듣고 병문안을 갔던 걸로 기억한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간간히 공연장이나 행사장에서 뵈면 항상 날렵하시고 목소리도 카랑카랑 하셨었는데, 그 날은 유독 목소리에 힘도 없으시고, 기운이 없어 보이셨다. 앉아계시는 것도 힘드신 것 같아서 잠시 얼굴만 뵙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아,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줄게 이거밖에 없어” 라고 하시며 ‘우리춤이야기(김천흥 글, 최숙희,하루미,최해리 엮음)’ 책에 친필 서명을 해서 방문한 우리들에게 직접주시며 “앞으로 잘 부탁해~” 하고 눈웃음을 지어보이셨다. 지긋이 웃어주시는 그 웃음에 나는 잠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다같이 선생님께 건강회복하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생전의 김천흥 선생님은 뵙지 못한 것 같다.
 내가 굳이 김천흥 선생님과의 인연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심소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10년 동안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생신과 기일, 스승의 날을 꼭꼭 기억하며 챙겼었는데, 보존회의 사무국장으로서 의무적으로 챙긴 것이 아닌 2005년 3월의 심소선생님의 마지막 생전모습과 “앞으로 잘 부탁해~”라는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앞에서 자문한 “심소선생님의 제자도 아닌 사람이 왜 ‘심소 김천흥 무악에술보존회’ 일을 맡아 10년이나 했어?”에 대한 자답이기도 하다.

 

 

 심소 김천흥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1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가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것은 결코 종교적인 신봉도 아니요, 예술적 신격화는 더더욱 아니다. 단지 그의 삶 자체가 자신의 입신보다는 예술이 먼저였고, 처지가 딱한 예술인이 있다면 두 말 않고 아무 대가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평생을 재물에 욕심내지 않고 검소함의 생활화로 오히려 제자들이 황송할 만큼 많은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심소 선생님이 모아두신 자료는 후학들을 위해 국립국악원과 국립예술자료원, 국립무형유산원에 기증되어 예술자료로 활용되고 있고, 2008년 춤문화자료원에서 정리하고 목록화한 심소 김천흥 선생님의 2,400점의 자료가 2012년 11월에 국가지정기록물 제10호로 지정되었고, 2017년 8월25일에 대전의 국가기록원으로 이전되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명언이 바로 김천흥 선생에게 해당되는 말인 것 같다. 선생님이 남기신 100년간의 기록들이 후대에 길이남아 또 다른 예술의 꽃으로 피어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짐작컨대 심소 선생님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는 선생님의 미소는 그 안에 담긴 예술에 대한 열정과 순수함이 아닐까 한다. 나 또한 진정한 心韶(마음의 풍류)를 찾기 위해 열정을 다할 것이다. 앞으로도 심소 선생의 예술정신이 잘 전승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할 것이다.
2017.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