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박용구(朴容九) 선생은 2016년 4월 6일 경기도 파주의 요양병원에서 향년 일백 두 살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1914년 7월 2일 풍기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이라는 참극을 겪은 20세기 한반도의 척박한 예술적 토양에서도 음악·무용평론가, 극작가, 연출가로 활동해 온 지식인이다. ‘박용구를 기억하는 어깨동무 모둠잔치’는 생전에 그를 기억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고인의 1주기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편집자 주)
■ 현장 스케치_ 박용구를 기억하는 어깨동무 모둠잔치
두 눈 부릅뜨고 세상을 직시한 영원한 르네상스맨
정리_김유리
모처럼 미세먼지가 씻겨 내려간 2017년 4월 6일 오후. 맑고 선선한 날씨가 차분하고 엄숙한 오늘의 분위기에 한층 더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다. 예술가의 집 다목적홀에서 진행되었던 예술평론가 박용구 1주기 추모행사 ‘박용구를 기억하는 어깨동무 모둠잔치’는 시작 전부터 분주하였다. 박용구 선생을 기리는 첫 추모행사인 만큼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주최측에서는 프로그램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었다.
행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한 눈에 보기에도 남다른 경력을 지닌 분들이 하나둘 행사장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박용구 선생의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렇게 자리가 하나 둘 채워지고 있었다. 이 분들의 더 큰 스승이었을 박용구 선생을 생각하니 그가 어떤 분이었는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새삼 행사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대 한 가운데 놓인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박용구의 흑백 사진은 무심한 듯 덤덤한 듯 추모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박용구 선생님을 이 자리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날 사회를 맡은 장광열(춤비평가)의 개회에 가름하는 말과 함께 《음악과 현실》《교양의 음악》《흙비》《오늘의 초상》《20세기 예술의 세계》《바리》 등 선생이 지은 저서와 생전 선생의 모습과 업적이 영상을 통해 흘러나왔다. 특히 부인의 생신날 노래를 부르는 박용구 선생의 목소리는 100세를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아우라가 넘쳤다. 노래는 아주 묵직했고 그 울림은 더없이 진솔했다. 영상 편집자 김채현 교수는 “문화예술계에서 최장수하신 분의 기록을 제가 찍어놓고 보여드릴 기회가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유족대표로 당초 박용구 선생의 딸인 재불 무용가 박화경씨가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공연 일정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보내온 인사말 서신을 춤비평가 이지현이 읽었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 예민한 청력을 지니셨었고, 미적 시각 또한 무척 개인적 취향이 독특하셨고, 무엇보다도 춤을 사랑하셨고, 미녀들을 알아보시는 데에 거침없이 표현하시곤 하셨지요. 한국 문화계에서 찾기 힘들 만큼 현실에 타협하지 않으시고 본인의 의지대로 세상을 사시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간관계의 수직구조를 넘어서서 어버지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셨지요. 어느 순간 제가 좀 철이 들어 왜 어느 기관에서 보수를 받으며 가르침을 주시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냥 알아듣고 할 사람들을 위해 그냥 준다"고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현실적으로 걱정되고 어머니께 참 가슴 아픈 대답이었지만 전 아버지의 뜻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뒤이어 여러 평론가들이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담론을 이어갔다.
“박용구 선생님은 탈출가이십니다. 절대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셨어요. 첫 평론집에서부터 당시 거장들을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음악평론가 이상만)
“평창동에서 선생과 같이 살았습니다. 나는 선생님을 한국의 유일한 지성인으로 모셨습니다. 자기 전공 하나에만 빠지지 말고 예술 전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옳다는 선생님의 말이 저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발레 대본 등 창작은 물론, 21세기를 준비하는 모임 ‘영고21’을 꾸리는 등 돌아가실 때까지 늘 새로움을 추구하셨습니다.” (연극평론가 이상일)
“안나 파블로바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추모행사에서 세르게이 리파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Far more than beautiful 아름다운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신묘불가측. 저도 박 선생님을 박학다식이라는 좁은 틀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은 우주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타협을 거부하는 반항아였음에도 ‘어깨동무라야 한다’며 사회의 갈등을 풀 통합을 얘기하셨습니다. 평생 화합을 얘기하던 분이 아니어서 그 뜻을 더 귀중하게 새겨야 합니다. 선생은 현재보다도 미래를 사신 분입니다. 박용구 선생님의 뒤를 이을 평론가는 없어요. 당신도 추종자가 없었듯이 추종자를 만들지 않으셨죠. 모든 평론가는 '자기 예술을 가져가야 한다'고 강조하셨거든요". (무용평론가 이순열)
추모행사를 더욱 빛내기 위해 현대무용가 홍신자를 시작으로 추모 공연이 이어졌다. 그녀는 장미꽃잎을 흩뿌리며 무대로 천천히 몸을 옮겼다. 역동적이진 않지만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춤사위와 자꾸만 위로 뻗는 손은 선생님께 부디 잘 살펴 가시라고 안부를 묻는 듯했다. 손끝 하나에, 높이 쳐든 고갯짓 한 번에 그를 향한 그리움이 담겨있었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마지막 모습에 박용구 선생은 대답을 해주었을까?
뒤이어 선생님의 수줍은 미소를 기억한다는 배우 박정자는 기품있는 목소리로 선생의 저서《어깨동무라야 살아남는다》서문을 포함해 책자에 남긴 글을 낭독했다.
그리움을 담아보겠다는 국악인 박윤초는 시창을 한 수 읊었다.
“형식 없음으로 형식을 이루는 것에서 노닐라”
“눈 뜨면 안보이고 눈 감아야 보이네. 눈 감아야 보이면 소경되어 지리라.”
대가들의 공연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3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공연이었지만 굉장히 강단 있고 압도적인 무대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행사는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후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다들 박용구 선생의 사진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살아있는 선생님을 대하듯 조심스레 그의 주위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각 예술분야의 저명한 인사들이 담긴 귀한 사진이 이렇게 또 탄생했다. 훗날 이 사진도 문화예술계의 역사에 남을 기록물이 되지 않을까 지레짐작해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추모행사가 진행되었지만 그의 업적과 에피소드는 끝도 없이 뿜어져 나왔다. 무려 한 세기 동안 예술계 전반을 풍미했던 그를 몇 시간 안에 논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술인들이 추억하는 박용구 선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박용구 선생님은 점잖으시고 저력 있으면서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분이셨어요. 예술만을 위해 애쓰신 게 아니라 사회적 변화에도 많이 애쓰셨고, 유니세프를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유니세프 문화예술인클럽 사무총장 박동은)
“선생님 좋아하시는 분들 다 모아놓으시고 한 분만 빠지셨네요. 박용구 선생님과 저희 아버지(작곡가 김순남)께서는 절친이셨습니다. 그래서 1985년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년 새해에 세배를 드리러 갔는데 갈 때마다 2시간이 넘도록 주옥같은 좋은 말씀을 들려주곤 하셨지요.” (성우 김세원)
“제가 영국에서 막 돌아왔을 때 현대무용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기에 나는 최청자 같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국제행사가 있으면 저를 우선으로 추천해주셨던 것 같아요. 100세 생신을 맞이해서 한참동안 즐겼던 얘기, 잔정과 사랑을 주셨던 기억이 나고 그 은혜로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나 그 생각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현대무용가 최청자)
“선생님은 늘 사무실에 와서 말씀하셨습니다. 바하는 이미 지나갔고 현대음악을 들어야한다.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작곡가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을 맨날 뵙고 질문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김원)
유니버설발레단의 문훈숙 단장이 창작발레 <심청>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고인의 발레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회고하면서 발레 <심청>의 동영상을 감상하고 이어 공연 후에 무대 뒤로 찾아와 출연자들을 격려하는 박용구 선생의 생생한 모습을 공개했다.
“창작발레 <심청>은 유교적, 불교적 관념을 포함한 인간 본연의 모성 본능, 희생정신을 세계에 알리려고 하였고, 이런 보편성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생님 대본 덕분이었습니다. 저희 발레단이 3년간 <심청> 월드투어를 마치고 2013년 5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할 때 99살의 선생님께서 직접 관람하셨습니다. 공연 뒤 저희에게 ‘나이도 있고 하니 더 늦기 전에 꼭 구경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여러분의 기량이 오래전에 봤을 때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모두가 프리마 발레리나, 프리모 발레리노를 해도 괜찮을 정도로 좋아져서 아주 놀랐고 감개무량했다’고 말씀하셨어요.”
“박용구 선생님처럼 철저하게 반항하신 분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까닭은 사회체제뿐만 아니라 자연 질서에 대해서도 반항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70세 이후로도 30년을 계속 젊으셨습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멋있고 성공적인 반항이셨습니다. 사회체제, 현재체제, 자연에 대한 반항. 예술을 한다는 자체가 하나의 반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연세대 교수 최정호)
“제가 박용구 선생님을 흠모한 주된 이유는 소신대로 지향한 사회를 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과 동시대를 살아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음악펜클럽이 모여서 매운탕을 먹을 적에 갑자기 옷을 훌훌 벗고 물가에서 수영을 하셨을 만큼 그렇게 건강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이처럼 심신이 건강하셔서 저렇게 많은 일을 하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음악평론가 한명희)
“선생님은 한번도 ‘옛날에’라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오늘, 내일, 미래를 얘기하십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큰 배움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젊음의 동경도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미래를 보는 선생님의 혜안이 정말 좋은 배움이었습니다.”(연극연출가 손진책)
“제가 미국에서 돌아와 국립극장에서 공연했을 당시 이게 야만인이지 무슨 춤이냐며 무용계에서 전부 저를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박용구 선생님께선 한국일보에 ‘한국 무용역사에 기록을 남길 만한 무용의 신세대가 태어났다’라는 평을 쓰셨어요. 저는 그 글을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선생님은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그냥 그대로 열심히 하라며 힘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때의 격려가 우리나라 현대무용을 발전시킬 격려처럼 느껴졌고, 제가 흔들리지 않고 무용계를 이끌어 이 자리에 와 있는 것도 선생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정신적인 평생의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현대무용가 육완순)
“선생님이 90세 당시 우리나라의 부채춤이 타락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애 말년에 춤의 행태에 대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에 대해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과제가 남아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춤비평가 채희완)
“선생님은 문화예술계에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동아무용콩쿠르 자문위원으로 심사를 보셨는데 갑자기 소리치시며 “심사위원 자체가 엉터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과연 그런 선생님이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선생님의 그 같은 비판정신을 저희도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무용가 김화숙)
“저의 기억에 선생님은 굉장히 따뜻하셨고 저를 항상 토닥여주셨어요. 칭찬보다는 조언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저에게 “목의 움직임을 조금 고쳐야겠네”라며 조언을 해주셨는데 이 한 마디 조언이 한 발레리나를 바꿔놓았습니다. 예술이란 아름답구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참 많이 느꼈습니다. 또한 한국 예술계를 위해서 많은 영감을 주셨고, 예술가는 오픈마인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강수진)
“제가 사진을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곧 있으면 서울로 도달하게 된다며 조금만 버텨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국립무용단을 주제로 사진을 찍은 것이 대통령상을 받았고, 그때부터 무용사진을 찍었습니다. 저 사진(행사 당시 메인 사진)은 35년 전 펜클럽 가실 때 찍은 것입니다. 사진은 이렇게 역사를 남기는 것입니다. 사진으로 선생님을 기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사진작가 이은주)
“모두 느끼다시피 박용구 선생님은 위 20세기 중후반에서부터 21세기 작년까지 참으로 거인이셨습니다. 박용구 선생님은 우리 모든 분야의 큰 어른이셨습니다. 박용구라고 하는 문화예술계의 거장, 그 분이 겪은 여러 가지 경험을 연구한다면, 창조의 실마리를 뽑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흩어져 있는 선생님의 자료를 모아서 그 자양분을 뽑아 후손들에게 전해줄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지식산업사 대표 김경희)
박용구 1주기 추모행사 운영위원회와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약 100명에 가까운 인사가 참여해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했다.
국악인 황병기, 연극평론가 이태주, 무용가 김숙자 김명순 김평호 정혜진, 강현두 전 서울대학교 교수, 영화배우 안성기,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 단장, 정재옥 크레디아 대표, 이창기 마포문화재단 이사장, 현정주 김재연 전 KBS PD, 평론가 진옥섭 송현민, 이종호, 권옥희 김영희, 방희망, SPAF 사무국장 유인화, 전 한예종 무용원장 허영일, 박용구 선생이 다녔던 평양고보 동문회장인 선우현봄 회장과 주중괄 총무, 출판인 김종규, 언론인 손준현 강일중 이은영 김인아, 임소영 국립현대무용단 사무국장, 국립발레단 김현아 유니버설발레단 라선아 팀장, 공연기획가 강신구 장승헌, 조복행 전 하남문화예술회관 관장, 오페라 연출가 장수동, 고대성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사무국장, 이찬주 이찬주춤자료관 대표, 박용구 선생의 1주기에 맞추어 선생의 박용구 선집을 출간한 출판사 수류산방의 임직원 등이 참여했다.
이날 행사는 한국춤비평가협회와 박용구1주기 추모행사 운영위원회가 주최를 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과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가 협력기관으로 참여했다. 운영위원회는 김경희(출판인), 이상만(음악평론가), 이상일(연극평론가), 이순열(춤비평가), 이은주(사진작가), 장광열(춤비평가) 6명의 추진위원들로 구성되었다. 행사 프로그램의 ‘박용구를 기억하는 어깨동무를 모둠잔치를 마련한 사람들’에는 아래 사람들이 적혀 있었다.
김경희(남) 이상만 이상일 이순열 이은주 장광열(추진위원)
강석희 강수진 김경희(여) 김동길 김선희 김세원 김 원 김용원 김윤철 김채현
김태원 김화숙 김혜식 남정호 문훈숙 박동은 박만규 백병동 손진책 신갑순
안성기 오태석 이강숙 이건용 이병옥 이종상 이종호 이태주 채희완 최정호
최청자 최태지 한명희 황병기 홍신자 (이상 가나다순)
한편,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대표 장광열)는 선생의 1주기를 추모하는 박용구 예술평론집을 5월에 발간할 예정이다.
□ 朴容九
• 문화예술평론가, 예술인. 경북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 출생. 호는 입사(笠史).
• 1930년 광주학생사건으로 인해 평양고등보통학교 퇴학, 1936년 니혼대학교 예술과 중퇴. 1937년 니혼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음악잡지 《음악평론》 기자를 지냈다.
• 1940년부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8·15 해방 직후에 최초의 중등 음악교과서인 《임시중등음악교본》을 펴냈고, 1948년에 최초의 음악평론집 《음악과 현실》을 발표했다.
• 좌우익의 갈등과 매카시즘의 폭력을 피해 1950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서 고마키발레단 문예부장을 지내며 일본 최초의 창작발레 <니치링>의 대본을 집필하는 한편, 배우좌에서 연출수업을 했다. 1960년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귀국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 1967년부터 예그린악단의 단장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로 평가받는 <살짜기 옵서예>를 기획하고, 발레 <백조의 호수> 전막공연을 초연하는 등 종합예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사와 공연을 기획했다. 또 건축가 김수근이 운영하던 『공간』지의 주간으로 소극장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 1980년 이후에는 희곡, 무용, 오페라의 극본을 여러 편 집필했으며, 1981년 무용평론가 조동화 등과 함께 한국춤평론가회의 전신인 무용펜클럽을 결성했다. 88서울올림픽 개·폐막식 시나리오 등도 집필했다. 안은미의 <심포카 바리><춘향>, 유니버설발레단의 창작발레 <심청> 등 무용대본을 집필했다.
•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무용 및 음악 평론과 신작을 발표했다. 2001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춤비평가 장광열과 함께 대담집 《20세기 예술의 세계》(지식산업사)를 발간했고, 2013년에는 백수(白壽)를 맞아 신작 《먼동이 틀 무렵》을 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