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작고한 무용가 Trisha Brown
정옥희_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

미국 포스트모던댄스의 대표적 인물인 트리샤 브라운이 3월 18일 80세의 나이로 숨졌다. 2013년 두 개의 신작을 마지막 작품으로 선언한 후 자신의 무용단을 떠난 그녀는 최근 여러 번 쓰러졌었다. 50년 이상 꾸준히 활동하면서 무용계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던 트 리샤 브라운의 예술세계와 함께 작업했던 무용수의 글을 통해 그녀의 예술흔적을 더듬어 본다. (편집자 주)


 




추모 기획(1) 트리샤 브라운의 예술세계


순수 움직임의 진화

  

 한 여성이 무대 위에 서 있다. 바글바글한 파마머리에 간편한 면티셔츠와 헐렁한 통바지를 입은 그녀는 관객들을 미소로 응시하고는 두 엄지손가락을 세워 뒤집는 동작을 반복한다. 어랏, 이게 춤이라고? 하는 반문도 잠시, 반복되는 동작 사이에 한 손을 내밀었다가 다리를 뒤로 밀었다가 몸통을 돌렸다가 하는 동작이 끼어들며 점차 복잡해진다. 지극히 단순한 동작이 쌓이고 더해지고 발전하면서 이내 패턴을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진다.
 트리샤 브라운의 초기 대표작인 〈축적(Accumulation)〉(1971)이다. 〈축적〉은 여러 측면에서 무용공연에서 기대되는 관습들에 저항하고 있다. 잘 훈련된 무용수, 뛰어난 테크닉, 음악 반주, 과장된 감정 표현, 내러티브, 의상과 셋트 등 이른바 현실과 다른 특별한 것으로서의 공연이 지닌 연극성(theatricality)과 수행성(performativity)이 모두 없다. 이러한 특성은 이본느 레이너의 〈노 선언(No Manifesto)〉(1965)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던댄스의 정신, 즉 모든 전통과 관습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과감하게 실험하고자 하는 자세가 그대로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레이너의 대표작인 〈트리오 A(Trio A)〉(1966)가 일상적이고 반-기교적 동작을 바탕으로 예측할 수 있는 프레이징을 모두 제거했다면 〈축적〉은 일면 느슨해 보이는 외견 속에서도 수학적이고 분석적이되 관습적이지 않은 구성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트리샤 브라운의 안무적 특성이다.

 

 



 미국 포스트모던댄스의 대표적 인물인 트리샤 브라운이 지난 3월 18일 80세의 나이로 숨졌다. 2013년 두 개의 신작을 마지막 작품으로 선언한 후 자신의 무용단을 떠났으며, 최근 여러 번 쓰러진 적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소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 이상 꾸준히 활동하면서 무용계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그녀의 별세 소식은 안타깝기만 하다.
 1936년 워싱턴 주 에버딘에서 탄생한 트리샤 브라운은 오클랜드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1961년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당시 젊고 야심찬 무용가들인 이본느 레이너, 스티븐 팩스턴, 루신다 차일즈, 데보라 헤이, 더글라스 던 등을 만나게 되었다. 존 케이지, 머스 커닝험, 로버트 던 등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저드슨 댄스 씨어터와 댄스 유니온 등의 단체를 결성하여 활동하며 발레와 현대무용이 구축한 극장적 관습들을 타파하여 순수하고 일상적인 움직임으로 되돌아가려 노력했다.
 반주 음악, 내러티브, 의상과 셋트, 테크닉, 그리고 과도한 감정 표현 등을 제거하고 일상적이고도 지적인 춤을 만들어내려 했던 이들은 미국 포스트모던댄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트리샤 브라운은 1962년 저드슨 댄스 씨어터의 창립과 1970년 댄스 유니온의 창립에 모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인 1970년 자신의 무용단도 결성하여 이후 꾸준히 활동하였다.

 

 



 50여년 이상 활동하여 1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한 예술가의 작품경향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특히 트리샤 브라운은 극장 공연의 관습을 철저히 배제했던 초기 작품부터 바흐나 슈베르트의 클래식 곡을 포함한 음악과 무대장치를 활용한 후기 작품에 이르기까지 작품성향이 다양하며, 야외나 미술관에서 공연하는 것 외에도 오페라를 작업하거나 아예 시각예술가로서 활발히 활동하는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기에 더욱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샤 브라운의 안무적 특성을 꼽자면 그녀가 강조했던 “순수 움직임(pure movement)”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브라운에게 있어 움직임이 순수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타진해 볼 수 있다.

 첫째, 저드슨 댄스 씨어터 시절인 브라운의 초기 작업은 이른바 “도구적 춤(equipment dance)”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도구의 특성을 직설적이고 단순하게 반영했다. 〈건물의 벽면을 걸어 내려오는 사람 (Man Walking Down the Side of a Building〉(1970)은 그야말로 몸에 줄을 달고 건물의 벽면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작품이었고, 〈지붕 작품(Roof Piece)〉(1971)은 뉴욕 소호의 10개 블럭에 위치한 12개의 건물 옥상 위에서 무용수들이 서로를 보며 움직이는 작품이었다. 이처럼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때로는 업무를 처리하듯 무미건조하게 움직이는 작품들은 “순수한 움직임”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둘째, 브라운은 “순수 움직임”을 즉흥에서 찾기도 했다. 스티븐 팩스턴의 동료로서 즉흥의 가치를 인식한 그녀는, 그러나 즉흥을 완성된 작품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즉흥에 기반한 정교한 안무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대표작인 〈설정/재설정(Set/Reset)〉(1983)에서 무용수들은 관습적이고 인위적인 동작을 나열하는 대신 즉흥하듯 자유롭게 춤춘다. 그러나 이는 즉흥 자체가 아니라 즉흥으로 발견된 순수한 동작들을 다듬고 외우고 재구성하여 정교한 안무구조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즉 즉흥의 존재성이 아니라 그 효과를 가져온 이 작품은 날것으로의 움직임이 지닌 활기와 역동성을 정교한 안무구조로 만들어낸다.

 

 



 셋째, 지적이고 분석적인 그녀의 안무는 외견상 느슨하고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나타난다. 흔히 “릴리즈 테크닉”이라고 묘사되는 트리샤 브라운의 움직임은 발레나 현대무용의 수직성과 직선에서 벗어나 몸의 한 곳의 움직임이 나머지 부분으로 전파되고 반향되며 움직임이 곡선적으로 확장되는 특성을 나타낸다.
 특히 척추를 유연하게 사용하며 온 몸의 공간을 골고루 활용했으며, 은퇴 직전까지 직접 작품에 출연하여 춤추었던 그녀는 이 독특한 움직임을 “최소 저항선(the line of least resistance: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유머러스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이처럼 “순수 움직임”을 강조했던 브라운은 점차 포스트모던댄스의 극단적 성향에서 벗어나 극장춤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반주음악, 의상과 셋트를 사용하고, 야외나 대안공간이 아닌 극장무대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반주음악의 사용에 대하여 “관객들의 기침 소리에 지쳤다”라고 얘기했다고도 전해지지만, 진지한 대답이라 볼 수는 없다.
 이러한 급진적 선회에 대해 일각에선 아방가르드 정신의 포기나 타협,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역할 소진이라 보기도 한다. 즉, 모든 것이 춤이 되고 어디서든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타협이나 소진보다는 예술가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트리샤 브라운은 50년 이상 활동하며 “순수한 움직임”을 엄격하고 배타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느슨한 움직임과 면밀한 구성의 결합으로 진화시켰다. 〈축적〉에서 보이듯 브라운의 몸과 움직임은 느슨하고, 이완되고, 일상적이다. 아카데믹한 테크닉 원칙과 기교의 결여는 자칫 평범하고 일상적인 신체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수학적이고 건축적인 구성이 정확하고 면밀하게 짜여 있다. 이러한 일상성의 지적인 구성은 초기 작품부터 후기 작품까지 관통하는 축이라 할 수 있다. 춤의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이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은 포스트모던댄스가 소수의 실험에 그치지 않고 무용계의 패러다임을 변환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나아가 예술가로서의 입지에서 볼 때 극장으로의 복귀는 입지가 좁은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영역을 고수하기보다 주류 시장인 극장춤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을 이행하려 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는 뉴욕의 씨티 센터나 휘트니 뮤지엄, 영국의 새들러스 웰즈 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특히 프랑스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트리샤 브라운의 서거가 유독 안타까운 이유는 그가 끊임없이 정진하는 예술가였다는 점이다. 그녀의 초기작인 〈건물의 벽을 걸어 내려오는 사람〉, 〈지붕 작품〉, 〈축적〉은 이른바 포스트모던댄스의 대표작이 되었고, 그녀 자신은 포스트모던댄스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하고, 새로운 예술가들과 작업하고, 새로운 영역과 관심사로 개척하며, 매우 오랫동안 무대에서 직접 춤추었으며, 심지어 때론 자신이 쌓아온 업적과 명성과 모순되더라도 새로운 시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른 성공에도 불구하고 조로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까지 노쇠하지 않는 예술가 정신이야말로 트리샤 브라운이 오래도록 기억될 이유일 것이다.

정옥희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 학사 및 석사,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춤의 전통적 담론들이 포스트모더니즘 및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재편되는 방식을 다룬 논문을 국내외 주요학술지 및 국제학회에서 발표해왔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겸임교수이며, 미국 무용학술지인 Dance Chronicle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