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관계는 다른 말로 하면 만남이고 교류이다. 우리는 마치 독립적이고 독존적인 개인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도 타자와 만나거나 교류하지 않는 순간은 없다. 그것이 공기나 음식, 물이라면 훨씬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관계가 ‘생성’하는 생명의 재료들을 통해 삶을 이어간다.
존재의 원리가 이러한데 우리가 대화와 나눔 보다는 충돌이나 고립을 선택하는 건 현대사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관계성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거나 관계를 분리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바로 그 지점이 좋든 싫든 동시대 예술이 딛고 선 상황이라고 말한다. 꽉 막힌 채 실존적 현실보다는 이상적이고 목적론적인 것을 강조하여 우리의 혼을 빼는 어떤 생각사이에 ‘틈’을 만들어 주는 것, 그 생성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한다.
작년 6월 프랑스의 국립극장인 파리의 샤요극장에서 〈혼합〉의 초연이 있던 날, 가득 찬 프랑스 관객의 호기심과 긴장감은 팽팽했다. 파리인이 사랑하는 안무가 조세 몽탈보가 우리 국립무용단과의 작업을 ‘포커스 꼬레’ 주간에 함께 올리는 상황이 여러 가지로 안성수 감독의 〈혼합〉과 맞물렸다. 몽탈보의 작업이 밖의 시선이 우리춤과 섞이는 것이었다면, 안성수의 작업은 안에서 자신의 것과 남의 것을 어떻게 섞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무가는 그것을 제목에서부터 거침없이 드러냈다.
첫 4분 정도 ‘춘앵무’ 원형 그대로의 의상과 춤도 압도적이었지만, 내가 이 작품이 하나의 획을 긋겠구나하고 느낀 건 칼춤의 칼이 등장할 때였다. 몽탈보는 우리 춤자산을 쭉 훑어 보면서 부채를 선택하고 그것을 붉은색과 흰색 등으로 바꿔가며 중요한 오브제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것이 시종일관 소란스럽고 가벼웠다.
반면, 안성수 감독은 국내 어느 안무가도 현대적으로 다룬 적이 없는 칼을 꺼내어 휘두름으로써 그 빛과 소리를 과장되지 않게 사용해 차분하면서 예리하게 마음의 깊은 지점을 향해 들어갔다. 공연이 끝났을 때 프랑스 관객은 자신 마음속에서 건드려진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의 언어로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쩔쩔맸다(물론 무언가를 느꼈고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고 하는 그들의 수준과 태도에 경의를 표한다).
〈혼합〉은 우리춤 원형을 보여주고 그 원형이 발레와 서양 현대춤 원리와 어떻게 섞여가는 지를 리트머스 시험지가 물들어가듯 농도를 점증시키면서 보여준다. 눈여겨 봐야할 건 다른 춤의 언어와 방식이 혼합되는 장소인 무용수의 ‘몸’과 그 혼합의 정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춤’이다. 살아있는 몸에서 음악이 달라짐에 따라 어떻게 형식화된 하나의 춤이 다른 춤과 혼합되는지 보는 것은 눈을 뗄 수 없는 실험장면에 가깝다. 그리고 이 혼합의 정점에서 춤이 어떻게 ‘빈 공기’가 되는지 발견할 수 있다.
등산은 산과 산을 오르는 사람이 관계하여 산은 산의 어딘가를 내어주고, 사람은 산의 어딘가에 도달하여 풍광과 공기를 마시면서 산 아래에서와는 다른 상태가 된다고 풀어볼 수 있다. 〈혼합〉은 우리가 오롯이 춤을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우리는 〈혼합〉의 농도를 따라 살아서 생성되는 춤과 함께 그 정상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 정상에서 마음 어딘가 새로운 무엇을 느낄 것이다. 그 시간 후 여러분이 그 공기의 질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찾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 모든 언술은 춤이 준 선물이므로.. * 〈혼합〉 프로그램북에서 재게재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2011년 한국춤비평가협회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최근 비평집 『춤에 대하여』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 왕성한 비평 작업과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강사, 서울무용센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