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 추모 1주기를 맞아 내가 기억하는 박용구
대상을 받기에는 너무 젊고, 자칫 오만해질 우려가 있어서...
김화숙_원광대학교 명예교수
그러니까 박용구 선생님을 처음 가까이에서 뵈었던 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무용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연습과 창작에 몰두했었던 나의 30대 초반! 정열이 넘쳐흐르고 패기만만했던 시절이었다.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가 열렸던 1979년!
나는 <창살에 비친 세 개의 그림>(김복희김화숙현대무용단으로 참가, 김복희와 공동 안무)이라는 제목으로 무용제에 참가했었고, 결과는 대상(최우수상?)없이 네 단체에게 우수상이 주어졌다. 그 당시 심사위원은 18명이었고, 심사위원들이 최고작 두 편씩을 추천했었다고 한다.
시상식이 끝나고 누군가로부터 우리 작품이 최고점(18점)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 순간, 우리 두 사람은 심사위원장이었던 박용구 선생님 댁으로 향했다. 당돌하게 항의하는 우리들을 향해 선생님께서는 “대상을 받기에는 너무 젊고, 자칫 오만해질 우려가 있어서…” 라고 하셨으나 우린 작품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고 강하게 반론을 제기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런 우리들의 태도를 선생님께서는 그저 웃으시며 받아들이셨고, 조용히 우리들의 흥분을 잠재워주셨다.
이후 제3회 대한민국무용제(1981년)에 <징깽맨이의 편지>(김복희와 공동안무)로 참가했었고, 이 작품은 수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1983년 한국창작무용협회(회장:박용구)를 이끌고 계셨던 선생님께서는 일본무용작가협회 초청에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무용 작품으로 <징깽맨이의 편지>를 추천해주셨다.
평소에 칭찬에 인색하셨던 선생님이셨기에 참가 제안을 받았던 그 순간의 감격을 어찌 잊을 수 잊으랴! 덕분에 동경 도라노몽 홀에서 개최된 제2회 무용작가협회 작품전에 한국의 현대무용을 성공적으로 소개할 수 있었다. 이 공연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이유 중에 하나는 좋은 평을 받아 작품성을 인정받은 기쁨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직접 우리 단체를 데리고 가주셨고 이 작품의 작곡자이셨던 백병동 선생님, 그리고 시인 김영태 선생님도 함께 동행한 덕분에 우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평론가, 시인, 작곡자와 대화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고, 동경의 뒷골목들을 자유롭게 거닐며 춤 이외의 또 다른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또 선생님을 공식적으로 자주 뵐 수 있었던 건 ‘영고 21’덕분이었다. 선생님께서 대표로 계셨던 ‘영고 21’은 무용비평, 음악, 건축, 미술, 사진, 국악, 무용분야 등 다양한 예술 분야로 구성된 그 당시 최고의 예술인들과 격의 없이 대화의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던 모임이었다. 꽤 긴 기간 모임을 지속하면서 총체예술에 대한 선생님의 이상을 무대에 실현시키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지만, 후에 선생님께서는 새로운 21세기다운 예술양식으로 ‘심포카’를 제안하는 글을 남기셨다.
“김화숙씨는 광주민중항쟁무용삼부작 하나면 충분해! 예술가가 자신을 대표할 작품 하나 갖는다는 건 쉬운 일 아니니까” 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그 어떤 비평문보다도 크게 가슴에 와 닿았으며, 지방대학에 근무하면서 겪어야 했던 소외감(?), 혹은 불평등을 감수해야만 했던 내게 지금까지도 큰 위안으로 남아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광주민중항쟁무용삼부작은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1980년 광주를 무용화한 작품으로 5년의 긴 호흡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1부 <그 해 오월>(1995, 광주문예대극장)을 시작으로 2부 <편애의 땅>(1997, 자유소극장), 3부 <그들의 결혼>(1998, 토월극장), 그리고 1부 <그 해 오월>(1998, 오페라하우스) 재공연으로 예술의 전당 세 극장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1999년에는 무용 CD-Rom <오월의 눈물>(1999)을 출시하였다.
선생님의 모습을 마지막 뵈었던 건 선생님의 백수(99세)를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 순간에도 선생님의 목소리는 쌩쌩하셨고, 여전히 건강해 보이셨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장수비결을 냉수마찰과 물구나무서기 그리고 소식(小食)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이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그 누구와도 타협 없이 지조를 지키시며 철저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오신 자유로운 예술정신이야말로 선생님의 건강 비결이 아닐는지….
문화예술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허약해 보이는 요즈음!
해박한 예술지식과 날카로운 비평, 어느 곳에서든지 할 말은 하시는 선생님의 쓴 소리가 그리워지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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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 1주기를 맞아 내가 기억하는 박용구
삼대(三代)를 이은 교양… 국격과 더불어
김채현_한국예술종합학교 이론과 교수
접은 손수건을 브레스트 포켓에 꽂아 맵시 난 정장이 그림이 되면서 느리고 굵게 울려 퍼지는 금속성의 바리톤 육성, 나에게 전달된 박용구 선생의 기표(記標)는 그러하였다.
5권이 한 질인 《교양의 음악》을 선생은 50년 전 1966년 10월에 발간하였다. 서양의 성악곡, 관현악곡, 피아노곡, 현악곡, 교향곡을 각각 한 권에 모은 해설서이다. 국판보다 작은 46판 크기에 깨알 같은 글자들이 상하 2단으로 종조(縱組) 조판으로 편집되었다. 종로구 신문로에 소재한 창조사(創造社)가 발간하였다. 당시 선생은 서울시문화위원을 맡고 있었고, 이보다는 예그린악단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책을 나는 발간 9년이 지난 75년 대학 시절에 서울 명륜동의 중고서점에서 구입하였다. 한 권에 400원씩 모두 2000원인 정가는 65년과 지금의 물가지수에 33배 차이가 있으므로 7만원 선이다. 그 나이에 관심을 쏟기 마련인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갈증을 당시 나는 한국방송공사의 에프엠 방송을 청취하고 《교양의 음악》 독서로 해소하였다.
《교양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을 장르 별로 작곡연대 순으로 정리하고 수록곡도 1200여 곡으로 방대해서 클래식 음악의 사전(事典)과 같다. 이 책은 나의 클래식 입문서였다. 이 책을 읽을 적마다 나는 저자의 모습을 상상하였을 것이다. 해박하며 균형 잡힌 서술로써 음악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박용구 선생 같은 저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물론이었을 것 같다.
《교양의 음악》은 매 악곡의 작곡 배경 또는 유래, 작곡가의 당시 사정, 악곡에 대한 개인적 인상과 해석을 소개한 다음 악곡의 전개 구조를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 힘찬 제1 테마와 성격적으로 대조가 되는 우아한 제2 테마는 제1 바이올린으로 소개되어 클라리넷, 플루트로 인계되어 나아간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저음부에서는 ‘운명’의 리듬이 간단없이 울려서 악장 전체가 이 테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깊게 한다…”(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해설의 일부)
70년대에 음원과 시디는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고 음반마저 구입이 쉽지 않아 르네상스 같은 유료 클래식음악 감상실에서 하루를 보내는 젊은 부족들이 드물지 않았다. 나는 《교양의 음악》을 읽는 것만으로도 악곡 청취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즐거움에 빠졌을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대학 시절에 철학에서 미학으로 전공 영역을 결심하는 데 있어 《교양의 음악》이 끼친 바는 작지 않았다.
어떤 부분은 읽고 또 읽은 《교양의 음악》은 애장서로서 나의 서가에 있다가 이제 보니 우리 아이 서가에 꽂혀 있다. 박용구 선생 세대, 우리 세대, 그리고 우리 아이 세대... 이 삼대에 걸쳐 선생은 울림을 이어 왔다.
박용구 선생의 울림이 어디 음악에서만 이어졌겠는가. 80년대까지 문화 민도가 박약했던 우리 사회에서 음악을 비롯 문화 전령사로서 선생이 펼친 역할은 막중하였다. 국립예술자료원이 2011년에 펴낸 예술사 구술 총서에 그가 첫 인물로 선정된 것, 그 총서가 《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 표제로 발간된 것은 모두 그가 전방위에 걸친 문화적 울림을 이 사회에 전파했음을 상징하는 사실들이다.
대학 때부터 멀리서 흠모하던 선생을 처음 뵈었던 것은 춤비평가로 입문하던 1986년이었다. 31년 전 일이다. 월간 《춤》 조동화 발행인의 소개로 선생의 신영동 자택 세이장(洗耳莊)을 방문했고 선생은 격려와 함께 작품집 《흙비》를 내게 선사하였다. 세이장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고 선사한 줄로 안다. 애송이 비평가가 원로에게서 과분한 대접을 받은 자리에서 일말의 흥분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그 다음해에 한국춤평론가회가 결성되고 총무 간사 격의 역할을 맡은 나는 선생을 자주 뵈었다. 그해 창간된 춤평론가회의 기관지 《무용저널》(현재 한국춤비평가협회의 기관지 《춤비평》의 전신으로서, 중간에 《춤저널》로 이름을 바꾸었음)의 편집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고, 토론 행사 발제집 등의 편집 역시 그러하였다. 전동 타자기와 워드기가 등장하고 PC가 그제 막 보급되려던 1990년 무렵 평론가회 회원들의 원고는 대개 볼펜이나 만년필의 육필(肉筆)로 작성된 수고(手稿)로 전달받았다.
박용구 선생의 수고는 그 필체가 첫눈에 깊은 인상을 던졌다. 굵은 만년필로 써내려간 글자가 비동(飛動)하는 그 강건한 필치는 혁필화(革筆畵) 속의 전서체를 연상시켰다. 나는 일평생 물구나무서기를 아침마다 수행해온 노옹(老翁)의 꿋꿋하되 가식 없는 성품을 필치에서도 읽어내고 싶었다. 이 인상적인 필치의 수고를 언젠가는 공유하고픈 뜻에서 오래 간직해왔었다.
문예진흥원(지금의 한국예술위원회)이 2003년 8~10월에 9차례 진행한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 채록 사업: 박용구 편’에 나는 3번 참가 채록하였다. 이때 선생의 자택은 어느덧 신영동 세이장에서 평창동의 작은 빌라로 옮겨져 있었다. 선생의 따님도 출가한 터여서 부인과 두 분이 거처하기엔 작은 빌라가 적당했을 것이다. 세세하게 채록한 선생의 일평생은 앞의 책으로 정리되었다.
그 채록 작업을 진행하던 언젠가 선생은 나에게 ‘스스로 무용평론가라 생각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고 보니 선생이 발표한 무용작품 평론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럼에도 선생은 춤 관련 시평을 종종 발표하여 춤계 향방을 제시하였고 1973년에 무용가 홍신자의 국내 데뷔무대를 주목하면서 춤계의 인식을 현대적으로 쇄신시킨 바 있다. 또한 월간 《춤》의 좌담 등에서 유능한 무용인을 주목하도록 수시로 주의를 환기하곤 하였다.
춤 분야에서 선생은 평론보다 대본 창작에 더 애착을 가진 듯하다. 1986년 아시안게임 문화 행사에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 대본을 집필하고 <바리> 등 여러 무용단과 개인의 대형 창작춤 대본들을 선생이 집필하고 무대화되었다.
뿐더러 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식전 행사 시나리오도 선생의 작품이었다. 관련 부분 채록을 다시 옮겨본다. 개회식 식전 행사에서 “내 상상보다도 더 좋았던 게, 고싸움이던가요? 양쪽이 부딪쳐서 올라가는 거. 공중에 두 팀의 에너지가 부딪쳐서 거기서 둘이 화합하는, 악수하는 게 그림이 되데요.(웃음) 내가 구상한 생각 중에서 제일 성공한 게 그 신 같애요. 그 다음에 1990년에 MBC 이사로 동구라파를 가니까, 내가 참여했다는 걸 모르는데도 방송 관계자들이 만나자 모두 올림픽 개·폐회식 참 좋더라 한 마디씩 하데. 그런 의미에서 성공한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해요.”
개회식 식전 행사를 국내외에서 생중계로 지켜본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흡족을 표한 데서 국격(國格) 높이기를 강조해온 선생의 평소 소신이 실현된 경우로 보아 무방하다.
2008년 선생의 부인 정덕미 여사가 나의 연구실을 수차 방문한 바 있다. 방문 목적은 자신의 77살 희수(喜壽)에 가질 춤 무대에 대해 나의 의견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그 연세에 춤계 데뷔를 노크하는 것이 다소 놀라운 일로 여겨졌지만, 선생의 진취적 자유주의를 생각하면 그 분의 부인다운 작업으로 이내 수긍이 갔다. <방언>을 제목으로 펼쳐진 그 초여름날의 3편의 춤에 대해 나는 비평에서 이렇게 의견을 밝혔다.
“… 특정의 테크닉을 전시하지 않고 스스로 다듬은 움직임들로 구성된 이들 춤은 제각각 사랑의 감정, 방언의 엑스터시, 삶의 되새김 같은 면면을 담았고, 몸의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펼쳐져 소담한 분위기를 전하였다.
희수의 데뷔 무대는 분명 화제감이다. 이렇게 화제감일 수 있는 배경을 다시 생각하면 일상과 신앙 또는 취미 차원에서 더 나아가 예술 무대를 노크한 나이가 희수라는 점이다… 정덕미가 자신의 예술적 의도를 뒷받침하는 양식을 갖춰가고 우리 춤계가 이색적 안무가 한 사람을 얻는다면 노령 사회 그리고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가능한 정경이 아닌가 한다.”
이 노부부의 해로와 이색적인 공연을 축하하는 뒷풀이 연회가 극장 레스토랑에서 이어졌다. 그 자리에서 박용구 선생은 러시아 노래를 러시아어로 불렀다. 평론가의 노래는 여간해서 들을 기회가 없는 터에 90대 중반 연세에 진중히 노래하는 선생의 모습은 만감을 동반하는 울림으로 다가왔었다.
《교양의 음악》을 다시 펴자니 지면이 옅은 색조의 갈색으로 변색 중이다. 변색한 만큼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책이 담아 전한 교양으로 우리 세상도 그만큼 상향했을 것으로 믿는다. 대륙적 기질의 코스모폴리턴 문화인으로서 한민족의 문화 르네상스를 오롯이 주창한 선생을 《교양의 음악》에서 오늘 다시 뵙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