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수치심’을 그린 춤에서 위로를 받다니…. 야만의 시대, 맞다.
SPAF(서울국제공연예술제) 국내선정작, 김용걸의 신작〈수치심에 대한 기억들〉(10월14-15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을 본다.
창작발레는 내부와 외부, 코드와 환경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창작이라는 환경자체에 발레의 코드가 섞이거나 변이되고, 그 변이체에 의해 새로운 작품이 생성된다. 그러면서 작품은 서로 주고받고 소통하며 존재하게 된다. 창작발레라는 변이가 발생, 확장 확대되면서 다르거나 혹은 더 나은 춤의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창작이라는 환경은 그 자체로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변환되는 코드, 가변화되는 리듬을 통해 아직 무어라 할 수 없는 혼돈된 상태, 즉 변형의 요소에 늘 가까이 가 있다. 이 시대의 비애를 바닥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열거한 〈수치심에 관한 기억들〉. 사회현상에 대한 안무자(김용걸)의 인간적 사유가 삼투된 춤, 그 적극적 실천을 미리 응원한다.
먼저, 객석을(세상) 하나의 거울로 놓고, 거기에 투영되는 현상을 (막)춤으로 풀어낸 ‘리플렉션(reflection)’. 크고 작은 십자가, 성직자로 보이는 남자무용수의 뒷짐, 영상에 빼곡한 십자가로 풀어낸 ‘trust’. 영상과 동시에 춤이 펼쳐지는 무대. 의도가 선명하게 전달되는 영상과 달리 다소 흐린 춤.
개의 탈을 쓰고 천박한 세계를 치열한 춤으로 그려낸 ‘生(생)’, 부모의 비뚤어진 사랑을 그린 愛(애), 얼굴 없는 그림자놀이로 이 시대의 불행을 그려낸 ‘friend’를 통해 안무자는 결국 남는 것은 또 하나의 비애, 존재의 본디 모습으로서의 비애라고 말한다.
‘in the dark’. 샤막. 바다를 보여주는 영상에서 ‘세월호’를 떠올렸다. 하지만 메시지를 선명하게 노출한 앞의 영상과는 다른 모호한 영상편집. 쉬 이해되지 않는다. 검열을 비껴 선 영상, 서운하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어떤 법칙이 있었고 (누구였든)강하게 맞서지 않았을 뿐이라고. 평화와 조화의 말을 누군가 소란과 분열로 알아들은 것. 안타까운 노릇이다.
어둠을 뚫고 비쳐드는 빛, 영상. 천천히 무대를 가로지르며 들어오는 이동무대 위에 서 있는 남자. 무대 한 가운데에 이르기까지 미동도 않다가 무대 안 쪽 깊은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등장해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조용히, 정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다가 걸어 들어간 곳, 죽음의 공간이다. 정직한 춤의 배치이다.
이어지는 초록과 짙은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무용수의 듀오. 죽음의 기운이 번지는 공간에서 서로 위로하듯 서로의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춤. 이쪽(이승)과 저쪽(저승)을 가르는 장치로 읽히는 샤막. 가까이 얼굴과 손을 대곤 가만히 객석 쪽을 바라본다. 소리 내어 말하진 않지만 안녕이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 짙은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거듭 돌아본다. 객석에 번지는 통증. 선명하게 그려낸, 아름다운 춤이었다.
‘女(여)’. 소녀상(위안부로 끌려갔던)의 눈. 붉은색 드레스의 무용수와 짐승의(동물이라고 쓰지 않는다) 탈을 쓴 무용수 네 명이 춤추는 한 공간. ‘중립’이라는 단어. 누구를 위한 중립? 오케스트라 박스를 타고 올라오는 남자 무용수. 폭넓은 바지, 상의 탈의에서 가해자의 얼굴을 읽는다. ‘이제 아베의 사과 받았으니 남은 여생 편히 지내시’라는 자막. 이건 또 무슨 (개)소리. 무용수,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 소리로 삼키는 비명, 분노의 떨림. 감정을 침묵에 부치면서 동시에 표현하는 춤의 언어. 자막의 (개)소리를 누르고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굿’. 안무자의 감수성과 그림 같은 무용수들이 하나가 된 장. 손상된 자아, 내면을 보여주는 (그림자)조명과 강약과 빠르기로 조직된 춤과 음악의 배치, 세련되었다. 붉은색 의상의 김다운을 압박하고 있는 긴장된 공간. 고통의 시간을 상징하는 듯한 검은색과 붉은색의 대비. 그 세계를 치열한 춤으로 끌어안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김다운의 (춤)몸의 선과 춤의 에너지, 뛰어났다.
마지막, 8명의 무용수 뒷걸음으로(바로 걷지 않는다) 나란히 선 뒤, 동물의 탈을 쓴다. 붉은 색 드레스를 입은 김다운, 뒤에 홀로 서 있다.
이 시대, 우리 모두 방관자이고 짐승이다. 저열하고 비겁한 중립이기도.
김용걸의 춤의 미학, 윤리적 성격을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