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표지인물_ 故 예술평론가 박용구(朴容九)
살아있는 지성, 20세기 비평정신의 수호자

원로 문화예술평론가 박용구 옹이 4월 6일 오후 경기도 파주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2세. 1914년 7월 2일 풍기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이라는 참극을 겪은 20세기 한반도의 척박한 예술적 토양에서도 음악·무용평론가, 뮤지컬 제작자, 극작가, 연출가로 활동해 온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음악펜클럽 회장, 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유니세프(UNICEF) 문화예술인클럽 회장,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 회장 등을 지냈다. 생전에 그를 기억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추모 글과 함께 그의 이력을 더듬어 본다. (편집자 주)

 





(1) 박용구 이력


 문화예술평론가, 예술인. 경북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 출생. 호는 입사(笠史). 1932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1936년 니혼 대학교 예술과 중퇴, 1937년 니혼고등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음악 잡지 『음악평론』 기자를 지냈다. 1940년부터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8·15 해방 직후에 최초의 중등 음악교과서인 『임시중등음악교본』을 펴냈고, 1948년에 최초의 음악평론집 『음악과 현실』을 발표했다.
 좌우익의 갈등과 매카시즘의 폭력을 피해 1950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서 고 마키발레단 문예부장을 지내며 일본 최초의 창작발레 <니치링>의 대본을 집필하는 한편, 배우좌에서 연출수업을 했다. 1960년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귀국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67년부터 예그린악단의 단장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로 평가받는 <살짜기 옵서예>를 기획하고, 발레 <백조의 호수> 전막 공연을 초연하는 등 종합예술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사와 공연을 기획했다. 또 건축가 김수근이 운영하던 『공간』지의 주간으로 소극장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1980년 이후에는 희곡, 무용, 오페라의 극본을 여러 편 집필했으며, 1981년 무용평론가 조동화 등과 함께 한국춤평론가회의 전신인 무용펜클럽을 결성했다. 88서울올림픽 개·폐막식 시나리오 등도 집필했다. 안은미의 <심포카 바리><춘향>, 유니버설발레단의 창작발레 <심청> 등 무용대본을 집필했다.
 고인은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무용 및 음악 평론과 신작을 발표했다. 2001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아 춤비평가 장광열과 함께 대담집 〈20세기 예술의 세계〉(지식산업사)를 발간했고, 2013년에는 백수(白壽)를 맞아 신작 <먼동이 틀 무렵>을 출간하기도 했다.


1. 인적사항
∙ 성 명 | 박용구(朴容九)
∙ 생 년 월 일 | 1914년 7월 2일 (음력)
∙ 본 적 | 경북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
∙ 주 소 |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

2. 수련과정
1928〜1932 평양고등보통학교
1934〜1936 일본 니혼대학교 미학 수료
1936〜1937 일본 니혼고등음악학교

3. 활동경력
1937〜1939 일본 동경 음악월간지 <음악평론> 사원
1943〜1945 서울 동흥실업학교 교사
1946~1947 서울 중앙방송국 음악계장
1950〜1960 일본 동경 고마끼(小牧)발레단 문예부장
1962 서울음악평론동인회 대표간사
1963 서울시극동인회 대표간사
1966〜1968 한국 예그린악단 단장
1968〜1970 TBC 클래식코너 해설자
1968〜1973 예술종합지 <공간> 운영위원 겸 주간
1976 음악펜클럽 회장
1978 세종문화회관 운영심의위원
1979 문예진흥원 운영심사위원
1981 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1982 서울시문화상 음악부문 심사위원
1983 ≪대한민국무용제≫ 음악부문 심사위원
1983 중앙문화대상 심사위원
1984 호암아트홀 운영 자문위원
1989〜1991. 12 방송문화진흥회(문화방송재단) 이사장
1991. 11 유니세프한국문화예술인클럽 회장
1993. 10〜1995 초대 세계무용연맹(WDA) 한국본부 회장
1983〜2004. 6. 현재 채동선기념사업회 회장
2004. 6. 유니세프문화예술인클럽 고문

4. 수상경력
1991 은관문화훈장
1996 제45회 서울시문화상(음악부문)

5. 저서목록
1) 논문
「문화국가론」, 『공간』, (주)공간사, 1987.
「자전적인 문화예술의 80년」, 1993.

2) 번역
유주현, 『조선총독부』(일본판), 청심사, 1968.

3) 평론
『음악의 별들』, 아문각, 1949.
『음악과 현실』, 민교사, 1949.
『음악의 주변』, 창조사, 1970.
『음악의 광장』, 일지사, 1975.
『불멸의 음악가』, 일지사, 1975.
『음악이 만나는 자리』, 일지사, 1978.
『음악의 문』, 청한문화사, 1981.
『오늘의 초상』, 일지사, 1989.
『어깨동무라야 살아남는다』, 지식산업사, 1995.

4) 기타
『교양의 음악』(해설집), 창조사, 1967.
『흙비』(작품집), 해보라, 1985.
『20세기 예술의 세계』(대담집), 지식산업사, 2001.
『바리』(작품집), 지식산업사, 2003.
『먼동이 틀 무렵, 박용구 백년의 편력』, 수류산방, 2013.

표지사진 제공_이은주
자료제공_국립예술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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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만난 박용구


낭낭하던 그 목소리 이제는 은은한 여운으로 남아

 


이순열_춤비평가


 새로운 눈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데 있다’고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야기한다. 박용구 선생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 새롭게 듣는 귀를 지니신 분이셨다. 그래서 그 분의 그 신선한 시각에 나는 깜짝깜짝 놀라고는 했다.
 “우리 무용계의 역사는 홍신자 등장 이전과 그 이후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고인은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나라 평계(評界)의 역사는 박용구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분의 등장은 평계와 문화계에 너무나 많은 것을 수혈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박용구 선생 내외분이 광주 퇴촌 구석에 살고 있는 나를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거동이 좀 불편하시리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먼 곳을 찾아주시다니 어찌 반갑고도 놀랍지 않았으랴. 망백(望百)의 고령이신데도 그 정정하던 모습이며, 쩌렁쩌렁 울리던 목소리가 지금도 눈과 귀에 선하다.
 마침 점심때라 집 근처의 ‘풍경’이라는 음식점으로 모셨다. 허름한 듯 하면서도 그 집 여주인을 닮아 조촐하고 정갈한 그 식당이 썩 마음에 드신듯해서 나도 몹시 흐뭇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또 어떤 날카로운 화살이 불현 듯 날아오지나 않을까 하고. 아니나 다를까...... 나는 다시 한 번 찔리고 말았다.
 시골 골목길에 이런 집이 숨어있어 무척 정겹다고 말씀하시고는 그런데 이집 ‘풍경’이 어떤 풍경이냐고 물으셨다. 풍경이라면 으레 風景이겠거니 그렇게 접어두고 한 번도 그 뜻을 헤아려본 적이 없었거늘, 또 무슨 다른 뜻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어딘가 쿡 찔린 듯한 느낌이었다. 예기치 않았던 충격에 어찔어찔 놀랐던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이번에도 그 충격의 진동에 살짝 흔들리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처마 끝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 소리를, 은은한 여운으로 우리를 황홀케 하는 그 그윽한 소리를, 내가 그토록 닮고 싶어했던 tintinnabulum, 내가 그토록 풍기고 싶었던 nabulum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니.



 귓전에서 울려오는 그 풍경 소리를 타고 내 상념은 40여 년 전의 동해로 날아갔다. 1970년대 중반, 강원도의 해변 낙산호텔에서 미술, 연극, 음악, 무용 등 여러 분야 평론가들의 심포지엄이 있었다. 방 하나에 두 사람씩 배정되었던 그 날의 내 파트너는 박용구 선생이었다. 심포지엄을 마치고 밤늦게 방으로 돌아오자, 현묘한 여운을 남기면서 끊임없이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마치 바쏘 콘티누오처럼 깔아두고, 박선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일제 말기,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가물거리고 있었을 때 만주로 탈출하는 길목에서 동해를 거쳐갔다는 데서 이야기의 막은 올랐다. 망망한 바다 위의 작은 돛단배처럼 미미한 자신의 존재가 한스러우면서도 툭 트인 바다 앞에서 가슴이 터질 듯 벅찬 마음으로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고 그 때 어린 시절 풍기의 꿈이 다시 꿈틀거렸다는 대목에서는 낭낭하던 그의 목소리가 극적으로 고조되면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아 그 시절 한 때 암울했던 하늘은 얼마나 푸르르고 바다는 얼마나 무한했던가.”
 만주의 우중충한 하숙방에서도 그 동해의 풍경은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 때마다 어둠속을 꿰뚫고 비춰오는 햇살처럼 어디선가 먼 풍경 소리가 들리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 주인이 업종을 바꾸어 이제 우리 집에서 가까운 ‘풍경’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고인의 낭낭했던 목소리와 함께 맑고도 그윽하게 울리는 그 풍경 소리를 듣는다.
 고인이 멀리 떠나버린 지금 나는 호레이쇼가 햄릿을 보내면서 목이 메어 중얼거렸던 말을 선생의 영전에서 읊고 싶다.

“천사들이 하늘 가득히 날아오르면서 당신의 안식을 노래하기를!”

 그리고 나는 단 한마디만 덧붙일 것이다. “그 천사들의 노래 소리에 풍경이 파싸칼리아처럼 곱게 깔리기를.”




늘 푸른 소나무처럼 꼿꼿했던 자존심

 


이은주_사진작가


 지난 4월 6일 박용구 선생님이 타계하신 날 나는 가장 귀한 스승을 잃었다. 장례식장 꽃들 속에서 ‘왔어?’ 하며 예의 미소로 반겨주시는 선생님 모습 앞에서 나는 하염없는 슬픔에 잠겼었다.
 영정 사진은 2011년 내가 찍어드린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모 매체에 ‘사진으로 만난 인연의 향기’라는 타이틀로 칼럼 연재를 시작했고, 선생님은 당연히 그 인연 1호였다. 젊은 감각의 줄무늬 티셔츠에 언제나처럼 베레모를 쓰신 선생님은 여전히 소년같은 미소를 짓고 계셨다. 이렇게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니, ‘사진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나를 다독여주신 내 인생 최고의 스승...

 



 1980년 문화예술진흥원의 예술가 모임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선생님의 예술적 아우라에 반한 나는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그분이 지니신 문화예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감성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사진을 계속할까 말까 갈등하고 있었다. 사진이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인데다 사진가가 예술가로 인정받지도 못하던 시대였다. 어느 날 선생님께 진지하게 조언을 구했다.
 “이은주씨의 사진 여정은 이제 부산에서 대전까지 온 건데.. 조금만 더 가면 서울이잖아요.”
 선생님의 이 말씀에 나는 이내 갈등을 접고 다시 사진에 정진했다. 그리고 1981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사진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동트기 전 짙은 어둠속에서 방황하던 나에게 길을 인도하신 선생님 덕분에 나는 내 사진 인생의 화사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용기를 내서 무대사진을 개척할 수 있었고, 무대사진을 통해 40여년 예술과 함께 살아오는 행운을 누릴 수가 있었다.
 이후로도 나는 사진을 하다 뭔가 막히는 듯 할 때면 선생님 댁을 찾았다. 신영동 선생님 댁은 건축가 김수근 선생이 최초로 설계한 개인집이다. 일본 유학시절 절친이셨던 김수근선생과 약속한 일이었다고 한다. 선생님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멋진 집을 배경으로 선생님의 사진을 찍을 때면 나는 절로 신이 나고 힘이 났다. 선생님 댁은 그야말로 나의 에너지충전소였다.
 선생님은 내가 무용사진전을 할 때마다 그 유려하고 감성적인 글로 추천사를 써주셨다. 원래 그룹이나 단체가 아니면 개인에게는 추천사를 써주지 않기로 유명하신 분인데, 사진 분야라서인지 유일하게 나에게만은 추천사를 써주셨다.
 88서울올림픽 때 내가 국제학술대회 사진을 도맡아 촬영하게 되었는데, 그 때 심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참조자료가 바로 박선생님의 추천사였다. 이렇게 선생님은 시시때때로 내 인생의 귀인(貴人)이 되어주셨다.
 평생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으로 늘 푸른 소나무처럼 꼿꼿하게 살아내신 박용구 선생님... 지금도 그 큰 그늘이, 가슴까지 전해오는 그윽한 향기가 한없이 그립기만 하다.

 




열망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차린 대가의 지성

 


남정호_ 현대무용가


 박용구 선생님을 만나면 나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가 되었었다.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 사모님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방문한 자리에서도 나는 1930년대의 동경에서 있은 박외선 공연에 대한 질문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단지 역사의 산 증인의 입을 통하여 듣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귀찮을 수도 있었고 때로는 바보스럽기도 한 나의 질문들에 대하여 선생님은 항상 정색을 하시고 적절하고 간략하게 대답을 해주셔서 나의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셨다.
 선생님이 떠나셨으니 아직도 한참 남은 질문들을 이제부터는 누구에게 해야 할지.
 젊은 시절 일본에서 16년간 살아 그 후로도 NHK와 일본서적을 애독하시던 선생님과 가족을 일본에 둔 나는 한 번도 정식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스모와 수시 그리고 동경풍경에 대하여 세대를 극복한 은밀한 정신적 유대감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박용구선생님은 나에게 멋진 글을 써 주셨다.
 “현실의 극적요소를 무용으로 본다”,
 “지(知)와 정(精)이 조화된 도시감각적인 즐거움[plaisir]의 세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열망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차린 대가의 지성에 부끄럽지 않게 이 말을 책임지고 살아야겠다.




박용구 선생의 ‘저항’의 의미와 총체예술론

 


김태원_춤비평가


 지면으로만 뵙던 박용구 선생과의 첫 대면은 1985년 6월 중순경이었다. <공간>지의 편집장으로부터 무용 관련하여 ‘해방 40년 특집 대담’을 부탁받고서였다. 나는 당시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생 신분으로 7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었다.
 당해 5월에 호암아트홀 개관기념으로 열렸던 홍신자와 래핑스톤무용단의 작품에 대해 공연 프로그램에 글을 썼고, 또 그보다 좀 앞서 <공간>지 3월호에 1984년 후반기에 있었던 피나 바우쉬의 뉴욕 데뷔공연에 대한 비교적 긴 길이의 글을 썼기 때문이다. 이 두 글은 짧은 시간에 나의 이름을 무용계와 여타 문화계에 알리게끔 했다. 홍신자 관련의 글은 모호하고 신비에 싸인 그녀 춤예술에 대한 첫 분석적 글이었고, 피나 바우쉬에 대한 글은 세계 공연예술제에 큰 충격을 주며 흐름을 바꾸어 놓던 예술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두 글 모두 나는 포스트모던적 관점에서 썼다.
 구기터널을 지나 서울시립미술관 못미처 좁은 언덕길을 올라가 찾아뵌 박용구 선생님은 굵은 검은 테의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골격이 크고 뚜렷했다. 그러면서 매력적인 바리톤 음성을 갖고 계셨다. 당시 좀 이른 초여름 더위 탓인지, 짧은 반바지에 헐렁한 셔츠를 걸치고 있어 70세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젊어 보였고, 피부 또한 깨끗하고 희었다. 선생의 후배이기도 한 건축가 김수근이 선생을 위해 설계한 그 집은 거실 중앙에 둥근 연못같이 홈이 패여져 있어서 우리는 그 안에 앉아 대담을 나누었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정권 때인지라 시내 곳곳에 사복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자주 매큼한 가스 내음이 번졌지만, 그곳은 그런 것과 아랑곳없이 평온했다.
 여하튼 해방 40년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선생이 유난히 드러내놓지 않고 강조하던 표현은 ‘저항’이란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은 의당 어느 정도 정치사회적 뜻을 품고는 있었지만, 자세히 전후 말의 문맥을 살펴보면 주류(主流)에 대한 이유 있는 ‘안티(反)’ 내지 ‘대항(對抗)’의 뜻을 더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경우 최승희의 춤에 대해 간과되고 있었던 배구자의 춤을, 그 이후 최승희-조택원류의 신무용류의 춤에 대해 창무회나 문일지의 서울시립무용단이 보여 주고 있는 창작무용을, 이화여대 육완순류의 현대무용에 대한 홍신자의 실험무용을, 그리고 국립발레단류의 발레에 대해 민간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의 존재와 활동을 더 의미 있게 사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런 시각을 통해 박 선생님은 내부적, 혹은 방법론적 저항을 통하여 우리 춤예술 맥의 ‘균형 맞추기’를 꾀하고 있었고, 더불어 나 같은 젊은 무용평론가 또한 그 같은 시각에서 우리 춤예술을 봐야 한다고 부탁하는 것 같았다.
 이 이후 나는 박 선생의 ‘저항’이란 표현을 우리 춤예술의 ‘새로운 민주화’로 전환시켜 해석하면서, 몇 차례 더 선생과 공식적인 대담을 했다. 1986년에는 <객석>지의 부탁으로 소극장춤과 춤의 국제교류 등 우리 춤예술의 여러 제도적 문제점에 대해 대담했고, 1990년도 즈음해서는 동료 이종호 씨와 함께 <음악동아> 기획으로 1980년도 이후 우리 예술춤의 변화에 대해서 그 흐름을 짚어 보기도 했다. 이 이외에 물론 나는 <춤>지 등 여러 곳에서 틈틈이 선생을 만났다.
 박용구 선생은 원로로서 1987년에 결성된 한국무용평론가회의 회원이면서 <공간>지의 고문이기도 했다. 80년대 후반에 나는 <춤>지에도 많은 글을 썼지만 미국 포스트모던 경향의 춤이나, 다가오는 88올림픽과 연관된 도시 경관에 대한 비평적 에세이를 포함, 여러 유형의 글과 기획대담 등을 <공간>지에서 많이 했다. 그리고 90년대로 넘어가는 그즈음에는 <공간>지의 전문위원으로 그 잡지의 공연예술 관련 편집과 공간사랑의 춤기획 활동에도 관여했다. 따라서 나는 <춤>·<공간>지에 두루 관여하면서 <춤>지의 발행인이면서 무용평론가회의 원로이기도 한 조동화 선생과 <공간>지의 고문이기도 한 박용구 선생과 모두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가운데 선생이 특별한 인간적 관심을 가지고 그 예술을 지지하려거나 도우려고 했던 이는 현대무용가 홍신자 씨와 한국무용가 문일지 씨였던 것 같다. 홍신자와 관련해서 선생은 자신이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던 88올림픽 개폐막식에 참여치 못하게 됐음을 안타깝게 여겨 1989년에 MBC의 주최로 홍신자와 래핑스톤무용단의 <섬> 공연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4,000석)에서 치르게 됐다. 육완순무용단의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큰 규모의 공연이 아니고서는 치르기 힘든 그 공간을 홍신자는 그녀류의 댄스시어터로 남편이었던 화가 이상남의 무대장치에 힘입어 보란 듯이 성공적으로 치렀고, 당시 그 공연은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나 역시 그 프로그램에 글을 썼다.)
 한편 선생은 창무회류의 창작무용을 옹호하면서도 문일지와 서울시립무용단에 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이른바 우리의 굿 등을 이용한 한국적 댄스시어터, 즉 극무용이 그곳을 통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보면서 ‘통일’을 주제로 다룬 자신의 대본 <고리>를 그들로 하여금 무대화시키게끔 했다. 이 같은 생각은 피나 바우쉬류의 탄츠테아터에 상당히 자극을 받은 탓이기도 했다.
 실제 선생과 문일지 씨는 1988년 뉴욕을 방문해 그곳의 국제공연예술제를 참관하면서 피나 바우쉬의 뉴욕 데뷔공연이 벌어졌던 BAM(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극장)을 직접 찾아갔고, 맨해튼 소재의 퍼블릭극장에서 미국의 또 다른 극무용 추구자 마사 클락스의 환상적이지만 정교한 작품을 보기도 했다. 우연인지 그곳에서 또한 실제 피나 바우쉬를 공연 전 잠깐 만나기도 했다. 마침 뉴욕에 체류 중이던 내가 동행해서 그 관련의 기사는 사진과 함께 당시 <객석>지에 기고되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의 기대만큼 문일지와 서울시립무용단의 공연은 크게 성공치 못했다. 대신 굵은 방향은 제시되어서, 이후 1990년대 들어 문일지의 제자 한상근과 그 동료들인 홍경희·주옥녀 등이 퍼포먼스성이 강한 서울시립무용단류의 극무용을 보여 주게 된다. (한상근 안무의 <비행>이라든지, 배정혜의 지도로 이뤄진 <하얀 강> 등이 대표적으로 그렇다.)
 사실 이보다 앞서 선생은 1970년대부터 일종의 ‘무용극 대망론’을 외쳐 왔다. 선생이 일본 체류로 고마끼발레단의 문예부장을 하면서 클래시컬발레에 있어서 극적 구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실감해서인데, 그러나 국립무용단이나 발레단이나 1973년 장충동 소재의 현 국립극장에 이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극적 짜임새를 우리의 대극장적 춤에서는 잘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것을 현대적으로 확대·변형시켜 볼 꿈도 꿀 수 없는 정도였다. 송범의 무용극, 임성남의 발레극에 대한 <춤>지 지면을 통한 선생의 비평적 질타는 따라서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2년 후 실제 선생은 1984년 창단된 유니버설발레단을 위해 <심청> 대본을 직접 쓰고 공연을 성공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거두절미하게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부터 시작되는 이 공연은, 현대에 와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막의 구성을 갖고 있음에도 애드리언 댈러스의 안무와 어울려 장면 장면이 효율적(경제적)으로 전개되면서, 한국적 정취의 극적 구성에 있어서 짜임새를 보여 주었다.
 이 무용극, 나아가 선생의 확대된 ‘총체예술론’과 관련해 나는 두 가지 실수를 무심결에 저질렀다. 모두 ‘절반의 실수’라 할 수 있겠는데, 모두 선생의 견해와 얼마쯤 어긋나기도 했다. 그 하나는 무용대본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충분한 미적 설계가 없는 큰 규모의 대극장적 무대공연이 과연 올바른 총체예술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객석>지의 지면에서 무용대본은 ‘작의(作意)’로 고쳐 부를 것을 제안했고, 88올림픽을 전후해서 벌어진 여타의 행사용 공연에 대해 거의 모두 부정적 견해를 표출했다.
 사실 춤에 있어서 대본은 70~80% 필요하지 않다. 한 편의 시가 대본이 될 수 있고, 안무적 발상을 끄적거려 놓은 노트가 대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는 이 대본이라는 것을 가지고 무용 주변의 2류, 3류 문학인들이 너무 많이 무용가의 안무 작업에 개입해서, 나는 그것을 원고지 분량 30~40매 정도로 안무자의 안무적 발상이나 작품의 전개방식을 밝혀 놓은 글, 즉 ‘작의’면 충분히 공연이 올라갈 수 있고, 대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 대한민국무용제 등 여러 제도가 나의 견해를 좇았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간과하였던 것은 극적 소재를 가진 무용극의 경우에는 좀 더 체계화된 일견 문학적인 대본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들은 긍정적으로 활용된 경우 춤공연의 기록화뿐만 아니라 문학적 자산화를 더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럴 경우 대본은 적절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공공기관이나 극장이 기획하는 1시간 이상의 작품의 경우, 대본은 약식이지만 체계를 갖출 필요는 있다.)
 그런 한편, 총체예술과 관련해서 나는 너무 서구적 사고방식을 따랐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이 사전에 잘 기획되고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실제 공연은 그런 사전 기획만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사전기획과 그에 대한 이론(미학적 견해)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공연을 벌여 가면서 모자라는 부분은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치밀한 기획성이 다소 불충분하더라도 그 판벌림이 어떤 발전가능성과 긍정성을 갖고 있다면 비평은 그것을 음으로 양으로 후원하거나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시 그런 ‘여지’를 충분히 보지 못했다고 보겠다. 그런 점에서 박용구 선생은 1960년대 예그린에 참여하면서 추구했던 한국적 뮤지컬화와 무용극을 통한 춤의 종합예술화, 그리고 나름의 극무용 시도의 종착역은 ‘총체예술론’으로 봤지 않은가 싶다.
 이 총체예술론의 가능성을 실제 박용구 선생은 88올림픽 개폐막식 시나리오 초안 만들기에서 얼마만큼 시도했다. 1986년인가 87년도 제주 KAL 서귀포 호텔에서 있었던 일련의 모임에서 올림픽 개폐막식은 천·지·인(天·地·人)의 조화된 합일이라는 우리의 고유 사상과 미학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고, 그 진행에 있어서 우리의 민속 길놀이 등의 가능성이 타진되기도 했다. 이 같은 초안 위에 이어령 장관이 고안한 굴렁쇠 소년의 퍼포먼스가 더해진 것이다.
 따라서 개폐막식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치러냈던 무용인들의 참여는 박용구 선생의 그 같은 초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참고로 이 회의는 변종화(화가), 이강숙(음악), 최정호(저널리즘), 한양숙(체육), 오태석(간사 겸 작가), 김태원(옵서버) 등이 참여했고, 김치곤 문화예술국장, 박중암 과장이 2박 3일로 회의를 진행시켰다. 나는 박용구 선생이 특별히 추천한 옵서버의 자격으로 ‘길놀이’에 대한 안을 그 회의에서 내놓았다.
 1990년도에 우리 무용계의 주역 인물들을 살피는 한 글에서 나는 <춤>지의 발행인이며 평론가인 조동화 선생이 비평계와 무용계에 모성적 애정을 쏟았다면, 박용구 선생은 부성적 애정을 쏟았다고 했다. 그런 만큼 또 조 선생이 비평가와 무용계의 사회적 입지 넓히기와 그 생존적 활동에 관심이 많았다면, 박용구 선생은 비평계나 무용계가 어떤 정신과 예술적 안목을 갖고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 둘은 철로의 궤도처럼 평행선을 달리기도 했고, 또 얼마쯤 어긋나기도 했다. 박용구 선생은 생전에 “창작무용에 대해 나는 조동화 씨와 의견이 달라요. 나로서는 서구 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대무용보다 우리의 창작무용에 더 많은 기대를 갖고 싶어요”라고 몇 번씩 단호하게 내게 말하곤 했다.

 




20세기말의 <영고21> 미래선언

이상일_문화예술멘토원로회의 소속


 제도권 밖의 평론가 하면 박용구 선생이었고 제도권 안의 평론가 하면 여석기 교수가 있었다. 그러나 박선생도 문화방송 이사장을 지내셨고 여교수도 제도권 문화정책에 날카로운 평필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두 분이 나의 연구와 평론가 길을 밝히는 스승이셨다. 그리고 작년에 여선생님을 떠나보냈고 2016년 이 화사한 봄철에 나는 나의 마지막 스승인 박용구 선생님의 조의문을 쓰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박용구 선생은 음악가 박용구이다. 해방 후 최초의 음악평론집을 출간했고 일본 망명길(?)에서 돌아와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를 창단 공연한 다음부터 문화예술 분야의 원로평론가로 자리 잡은 선생과 내가 사적인 교류를 갖게 된 것은 70년대 말이었다.
 평론가라면 문학평론가뿐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예술전반에 걸친 평론가들을 집결시켜 조직화하려는 움직임가운데 그런 모임을 발의했던 음악평론가 이상만, 이순열과 연극평론가였던 나, 우리는 공연예술평론가 협회 기구의 어른으로 박용구 선생을 지목하였다. 공연예술평론가기구가 특정종교단체나 권력기구의 주구노릇이나 할 단체로 몰리는 음모론에 의해 박용구 선생 추대론은 물 건너가고 대신 발의자들을 대표해서 음모론을 믿지 않은 내가 회장이 되어 나와 박선생과의 사적 교류는 지속되었다.

 



 내가 50대 후반이었을 때 70대 후반이었던 박선생 한테 남자가 어느 나이 정도가 되면 여인에게 무관심해지느냐고 당돌하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주변 사정에 따라서…라는 선(禪)문답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나의 정답이 되었다.
 1980년대 초 문화부의 “연극의 해” 선포 다음 “무용의 해” 선포를 모색하고 있었을 때 음악펜클럽을 주재하던 선생이 <춤>지의 조동화 주간이 주도하던 젊은 무용평론가회와 인연을 맺게 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춤의 해>집행기구 주도권 암투가 벌어지자 잠시 무용평론가회장직을 맡고 있던 나에게 책임을 물어 사과를 강요하는 그들과 결별한 나를 박용구선생이 응호해 주셨다. 동연배인 친구 조 주간을 버리고 박용구선생 마저 무용평론가회를 탈퇴하신 것이다. 그 무렵의 얽힌 무용계 사연은 지금도 나에게 있어서는 수수게끼 같은 이야기이다. 왜 내가 책임을 져야했고 왜 조선생이 친구인 박선생을 무용평론가회에서 매정하게 몰아낼 까닭이 있었을까. 두고두고 박선생은 조선생과의 결별을 아쉬워했고 나는 그 두 분 사이의 불화에 책임이 있는 것 같은 자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말을 앞두고 박선생님을 모시고 음악의 이건용, 현대무용의 김화숙, 무용평론의 한혜리, 그리고 나 해서 20여명이 다가오는 21세기를 맞는 <영고21>를 결성하기로 작정하였다.
 <영고21>은 21세기의 영고(迎鼓)--마치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던 지난 세기말의 다다이즘처럼, 그리고 새로운 문화예술 운동의 바우하우스처럼 우리는 폐쇄적인 예술과 새 밀레니엄 사조의 탄생을 믿었고 20세기가 끝나는 자정에 <영고21 미래선언>을 선포할 작정이었다.
 지금 그 <영고21> 선언을 기억하는 멤버들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영전에 그 찬란했던 기억의 편린들을 바치고 싶다.

 “어려운 시절에 북치는 고수의 역할을 맡기로 한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의 미래선언”
 북은 둥글다. 둥근 원은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다. 그 윤회가 동양사상의 근원이요, 또한 북의 정신이고 보면 우리는 21세기를 울타리 없는 회귀의 세기로 받아들여 공생의 북을 울리고자 한다.
 세분화와 다극화가 치졸하리만큼 극으로 치달아온 세기말의 예술을 지양하고 자연과 인간의 은총을 불러들이는 북의 정신으로 돌아가서 울타리 없는 심포닉 아트(symphnic art)의 창출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또한 새롭고 다양한 삶을 위해 실험과 도전의 실천을 다짐하며 <영고 강령>을 제정한다.
 -네가 있고 내가 있는 우리의 놀이가 펼쳐진다. 눈이 귀가 되고 손이 입이 되고 이렇게 우리의 오감은 순환하며 영혼을 자유롭게 만든다. 그런 위대한 놀이정신에 의해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교향예술은 그 예술적 양식이 이루어지리라 (1999년12월10일-박용구외21명-<영고21>미래선언 중에서).



두 눈 부릅뜬 “살아있는 지성”

 


장광열_춤비평가


 박용구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한국공연예술사의 산 증인이다. 해방 분단의 공간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그는 평론가로, 작가로, 한국 예술계 현장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박용구는 우리 예술계에서, 전문 평론의 시대를 연 최초의 현장 음악 평론가였다. 그는 또 열악한 한국의 춤계를 옹호했던 무용평론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평론집인 ⌜음악과 현실⌟을 비롯한 그의 평론집들은 연주자나 음악단체의 단순한 공연 기록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평문과 시평은 한국 음악계와 무용계, 나아가 한국 예술계를 진단하고 그 향방을 제시하는 방향타였다
 1914년 경북 풍기에서 태어난 박용구의 비평적 글쓰기는 해방 이후인 1945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49년에 발간되어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출판금지를 당하기도 했던 평론집 ⌜음악과 현실⌟에는 새로운 민족적 음악 감수성의 필요성(아동음악교육론)과 민족음악의 방향 모색(음악유산 섭취의 문제)을 다룬 글들이 담겨있었다.
 반공예술제 사건을 계기로 1950년 일본으로 밀항한 그는 1960년까지 10년간 일본에 머물렀다. 박용구는 극단 배우좌에서 연출 공부를 했고 고마끼무용단의 문예부 책임자로 일하기도 했다. 일본음악학교 졸업 후에는 <음악평론>사에 입사했다. 그의 일본 체류는 무용과 연극에 눈을 뜨고, 유명 연주가와 단체들의 공연을 보면서 세계적인 안목을 기르게 되고 , 음악 평론의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 귀국한 박용구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으나 이후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 일간지를 중심으로, 1970년대에는 <공간><춤> 등 잡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비평작업을 펼쳤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의 비평작업은 1975년 발간된 <음악의 광장>에, 그 이후의 작업은 1981년에 발간된 <음악의 문>에 수록되었다. 이 시대의 박용구의 평문은 단순한 공연 리뷰에 그치지 않고 연주단체와 음악정책, 음악과 예술에 대하 문제를 다루는 등 비교적 긴 호흡의 글들이었다. 1984년 공연예술 전문지 월간 <객석>이 창간되면서 그의 비평 작업은 <공간>과 <객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기 그의 글쓰기는 한국 현대작곡가들의 작가론에서부터 무용교육, 종교와 무용 등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박용구의 음악 평론 작업에 대해 작곡가 이건용은 “비록 중간에 10년간의 공백이 있다고 하더라도 1940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그의 50년의 평론 활동은 우리 음악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음악에 대한 언급들이 상당히 분방하고 자유로운 필치로, 때로는 대담한 직관과 상상을 따라 전개된다. 그는 논리에 입각한 비평가라기보다는 감각에 의한 비평가”라고 박용구의 비평관을 진단했다.
 박용구의 무용평론은 정곡을 찌르는 어휘 선택과 예측 가능한 분석의 틀을 벗어난 의외성으로 평단을 놀라게 했다. 그는 시평과 좌담, 대담 등을 통해 무용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그의 안목과 대안 제시는 때로는 압력집단으로의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의 무용계 발전을 선도했다.

 



 박용구란 이름 뒤에는 작가란 꼬리표도 따라다닌다. 극작품집 <흙비>, 장편희곡 <바리> 외에 국립발레단의 <바리공주>, 대구시립무용단의 <안은미의 춘향>, 창작 음악극 <영원한 사랑 춘향이>, 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 등 수십 편의 대본을 집필했다.
 1967년에는 예그린악단의 단장으로 취임해 최초의 한국 창작 뮤지컬인 <살짜기 옵서예>를 비롯, <꽃님이 꽃님이><바다여 말하라> 등을 기획, 공연하기도 했다. 1976년에는 음악 펜클럽을 움직였고, 1973년에는 한국춤평론가회 동인으로, 88 서울올림픽 때는 개폐회식의 시나리오 집필자로 참여했다.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의 회장으로, MBC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평론가와 작가로서 박용구의 글쓰기는 예술과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들었으며 동서고금을 망라했다. 한마디로 박학다식이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현장 경험, 선견지명과 혜안, 그리고 배포는 실로 글로벌적이었다.
 미래형 예술로 “심포닉 아트”(Symphonic Art)를 주창하고, PD를 “Produce Director”가 아닌 “Project Designer” 로 해석하고 세상을 바꾸는 시스템으로 진단했다. 문화국가론 대신에 극장국가론 이란 새로운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심포닉 아트”는 세분화와 다극화가 극으로 치달아온 세기말의 예술을 지양하고 예술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둥근 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울타리 없는 예술을 지향한다. 그는 20세기를 정리하는 시점에서, 다가오는 21세기를 “울타리 없는 회귀의 세기”로 진단하고 문화예술계의 지인들과 함께 “영고 21”이란 미래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90대의 나이에 접어든 2005년에 출간한 <삼별초>는 이 심포닉 아트를 표방한 약칭 심포니카란 양식을 향한 최초의 극본이었다. 박용구는 또 무당, 제갈공명, 김유신, 건축가 김수근, 디아길레프를 위대한 PD로 꼽았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예술계 현장과 연결하며 사는, 박용구의 스케일과 예술과 인류를 향한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그러고 보면 박용구는 전천후 평론가였고 총체예술론자였다. 그의 비평적 시선은 전방위를 향했고 활동 반경은 음악, 무용, 연극, 문학, 미술, 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했다. 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아니라 말로서도 그의 지성은 시대를 기록했다. 그의 시선은 날카로운 현실인식으로 무장되었고, 그 중심에는 냉철한 역사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글들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의 나이 아흔 가까이에 탈고한 <어깨동무라야 살아남는다>는 일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한 중 일이 함께 협력해야 할 당위성을 설파한 문명시평이다. 이 책을 발간한 지식산업사 김경희 대표는 “박용구의 일본 망명생활 십여 년은 본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시성사나 문화사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백남준이 “나는 중학교 시절 박용구씨의 평론집 <음악과현실>에서 박수고(拍手考)라는 글을 읽고 청중의 박수조차 통조림 음악 속에 기록화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해준다.
 현장에서, “한국의 예술계에는 존경할 만한 원로가 없다”는 평론가, 예술가들의 자조적인 소리가 들릴 때, 평론가 박용구는 예외였다. 일제 식민지와 해방, 분단의 공간, 그리고 현재까지, 좌우를 아우르는 폭넓은 자유주의자의 몫을 다해온 그는 그래서 “20세기 한국 비평정신의 수호자”로 일컬어진다.
 예술가와 예술 현장의 이해관계에 얽혀 스스로 그 중심을 잃어버린, 전업 평론가임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평론가들이 판치는 오늘날, 한국 예술계의 암울한 모습을 보면 박용구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빛난다. 그는 아직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무장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현장을 직시하는, “살아있는(living) 지성”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2016.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