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명예보유자인 강선영 선생이 1월 2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영결식은 1월 24일 오후 3시 서울대병원에서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고향인 안성에 직접 세운 태평무전수관 잔디광장에서 영면했다.
■ 춤과 예술
김영희_전통춤연구가
<태평무>의 명예보유자인 강선영(姜善泳, 1925~2016) 선생이 영면했다. 1925년부터 시작된 고인의 90년 인생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춤을, 한국전쟁 후에 신무용을, 국립무용단 창립 후에 무용극을, 1980년대에 이르러 다시 전통춤의 부흥을 몸소 치루며, 일세를 풍미했다.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예술인총연합회 회장, 14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한국 춤 전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조택원춤비, 한성준춤비 건립 등 춤계의 역량을 결집하는데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춤계의 어른으로 마지막까지 춤계를 지켰다.
강선영 선생의 마지막 무대는 2013년 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린 ‘강선영 불멸의 춤’이었다. 10대 중반에 스승 한성준으로부터 보고 배운 춤들 <신선무> <승무> <장고춤> <한량무> <훈령무> <살풀이춤>과 당신이 창작한 <무당춤> <즉흥무> <황진이>를 펼쳐내고,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태평무>를 선보였다. 선생은 직접 춤을 추지는 않았지만, 무대 뒤 높은 단상에서 100명 가까운 제자들이 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이 남기고자 한 춤들, 남겨야만 하는 춤들을 무대와 관객들의 눈에 심었다.
강선영 선생은 10대 중반에 당대 최고의 고수이며, 조선춤 무대화에 남은 생애를 바쳤던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의 문하로 들어갔다. 곧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창립되었고, 후반부 조선음악무용연구회 공연에서 한영숙(韓英淑, 1920~1989) 선생과 함께 주역을 맡았다. <검무> <살풀이춤> <태평무>를 2인무로 추었고, 4인이 출연한 <한량무>에도 출연하였다. 그렇게 한성준의 춤이 강선영 선생의 춤의 원천으로 몸에 남게 되었다. 해방과 전쟁 사이에 결혼과 출산으로 춤을 접었으나, 전쟁을 피해 떠난 부산에서 연출가 박진을 만나 다시 춤꾼으로 돌아왔다.
1953년 첫 번째 발표회에서 <검무> <살풀이춤> <법열>을 공연했지만, 다음 작품들은 창작 작품들이었다. 무용극 <목란장군>(1954)을 발표한 후, 당시 신흥무용가들과 많은 작업을 했다. 1959년 4회 무용발표회에서는 <춤의 기본> <황창무> <자명고> <황진이> <아리랑>과 무용극 <그리움>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는 신흥무용의 시기였기에, 정통 전통춤보다 이를 현대화하는 작업에 쏠려 있었고, 강선영 선생도 그 흐름 속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김관수 단장이 기획했던 1960년 파리 ‘4회 국제민속예술제’ 참가는 선생의 활동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발판이 되었다. 1963년 오사카에, 1966년에 도쿄에 강선영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했고, 대만 순회공연, 한일국교 정상화 5주년(1970) 기념공연(이 공연에서 <태평무>를 추었다)에도 참가했다.
국가예산으로 최초로 파견한 독일 뮌헨올림픽 기념 국제민속예술제(1972) 참가 후 24개국 순회공연,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에서 개최된 ‘에너지 엑스포’ 장기공연(1982), 캐나다 벤쿠버 국제무역박람회 공연(1986) 등 1990년대까지 정부주관 또는 강선영무용단 기획으로 천 번 이상 해외공연을 가졌다. 그 중 2006년 뉴욕 스테이트 극장에서의 공연은 링컨센터에서 공연한 첫 한국 전통무용 공연이란 점에서 선생은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강선영 선생은 외국 공연을 국위 선양 차원의 의무 사항처럼 수행했다. 한국춤을 알릴 수 없었던 1960년대 초에 한국 춤을 추어 받았던 관심과 경험은 춤뿐만이 아니라 국가적 선양의 기회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선생의 이 같은 제도와 국가에 대한 감각은 이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이나, 예총 회장, 국회의원 활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용극의 창작도 계속되었다. 국립무용단 정기공연에서 발표한 <열두무녀도(十二무녀巫女圖)>(1965)는 민속학자 이두현이 소장하고 있던 『무당내력』을 토대로 안무한 작품으로, 한동안 <무당춤>은 강선영 선생의 대표작으로 추어졌었다. <수로부인>(1969)은 3막 10장의 대작으로 당시 무용가들이 대거 출연하였다. 이후 국립무용단 정기공연에서 무용극 <원효대사>(1976), <황진이>(1981)을 안무하였다.
이렇게 전통춤의 기법으로 창작활동을 계속했지만, 스승 한성준에게 배운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은 뼈 속 깊이 박힌 그녀의 춤의 원천이자 뿌리였다. 서울시립무용단이 1982년에 기획한 ‘한국명무전’에서 선생은 <태평무>를 추었는데, 당시 김천흥의 <춘앵전>, 정인방의 <신노심불노>, 박금슬의 <번뇌>, 한영숙의 <승무>, 이매방의 <살풀이춤>, 최현의 <비상> 등과 함께 <태평무>를 국내 관객들에게 각인시켰다.
한국학의 연구성과와 전통춤의 현장발굴 사업이 크게 고조된 시기였기에, 평생을 간직하며 춤추고 다듬었던 <태평무>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결국 1988년에 무형문화재 92호로 지정되었고, 강선영 선생은 그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후 선생은 <태평무>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사업에 매진했다. 1993년 55년 결산 공연으로 준비한 ‘나의 인생 우리의 춤’에서 <태평무>와 <즉흥무>를 추었고, 1998년 안성에 태평무전수회관을 건립하였다. 이어서 2000년에 선생은 스승 한성준의 춤을 기리기 위해 ‘한성준선생, 그 춤의 재현’을 기획했다. <태평무>를 비롯하여 <승무> <살풀이춤> <신선무(神仙舞)> <훈령무(訓令舞)> <검무> <한량무> <바라춤> 등을 재현한 것이다. 모두 강선영 선생이 한성준 문하에서 10대 중반에 보고 추었던 조선음악무용연구회 레퍼토리들이었다.
2001년에 한성준의 시비도 세웠고, 2005년에 ‘명가(明嘉) 강선영 불멸의 춤’으로 다시 한성준의 작품들을 제자들을 통해 펼쳐내었다. 그리고 2013년에 다시 ‘강선영 불멸의 춤’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린 것이다.
강선영 선생은 20세기를 통과하며 한국춤의 중심에 있었으니, 선생의 공연과 생애는 개인의 여정이면서, 근현대 한국춤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20세기 초에 민속춤을 무대화한 한성준의 작품들을 제자들에게 전승시켰으니, 선생의 역할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성과는 지대하다고 하겠다.
특히 <태평무>는 태평성대에 질탕한 음악에 맞추어 흥겨운 춤을 추며 일월(日月)성신(星辰)과 더불어 평화를 노래하는 내용의 춤이다. 강선영 선생은 <태평무>와 함께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불멸의 춤꾼이 되었다. 더 이상의 노고가 필요 없는 평화로운 곳에서 제자들의 행보를 따뜻하게 지켜봐 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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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의 글
스승님 영정 앞에서…
조흥동_예술원 회원
1월 21일 저녁 8시 40분 메시지 하나가 전달되었습니다.
강선생님께서 운명하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메시지였기에 급히 서울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습니다. 방금 전 저녁밥을 잘 잡수시고 별안간 운명하셨다는 말을 듣고 저는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나에게는 선생님 보다는 어머니 같은 분이었기에 슬픔은 뒤로하고 선생님께 못다 한 일들이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성북동에 계신 선생님을 뵈러 갈 때마다
“흥동아 이제 왔니?.. 이리 와서 밥 먹어라!”
“응. 그래 요즘 무용계는 어떻게 돌아가니?”
며칠 전 뵈었을 때도 같은 말씀으로 당신보다는 우리 무용계를 먼저 걱정하셨고 제자들의 삶과 생활을 더 많이 염려하신 선생님이셨기에 그 아쉬움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무용계에 몸 바쳐 계시면서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예총회장, 국회 문공위원등을 역임하셨고 무용계는 물론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많은 도움을 주시기 위해 고심하시고 애쓰셨던 기억들이 새삼 떠오릅니다.
돌이켜보면 춤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면서 선생님 문하에 들어온 지 어언 오십년이 지났습니다. 대학 1학년 선생님의 작품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무용극 <열두무녀도> <황진이><원효대사> 등에 출연하며 전통무용의 춤사위와 디딤새, 기법을 배웠고 그후 일본 공연, 미주 공연, 월남 공연 등 많은 해외 공연을 함께하며 선생님과 지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평무>를 직접 학습시켜 남성태평무 제1호를 만들어주신 것과 한성준 할아버지께서 작무하신 원형 <한량무>를 전수하여 주신 것은 저에게 평생의 은혜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중한 가르침에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선생님께 못다 한 일들이 많았기에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도 사실입니다.
이렇게 멀리 가실 줄 알았으면 살아 계실 때 좀 더 잘 해드리고 자주 찾아 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워 회한의 눈물이 흐릅니다.
이제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하니 선생님은 가셨습니다. 선생님과 이 세상에서 맺은 인연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죄만으로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 이제 저 높은, 곳 평화로운 곳에서 마음껏 웃으시며 저희들을 바라보고 계시겠지요. 이 많은 사연들을 뒤로 하고 홀로 떠나시는 선생님. 그러나 슬퍼하지 않으렵니다. 먼 훗날 언젠가 그 곳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요.
선생님.
이곳에 남은 가족과 제자들 모두에게 서광을 비춰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의 깊고 높으신 은혜와 보살핌 잊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아름답고 근심걱정 없는 저 높은 낙원에서 극락왕생 하시기를 손 모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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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의 글
“똑같이 추려고 하지마라”
유정숙_무용가
“누구니?”
“어제 선생님이 말씀하신 유정숙 선생이 오셨네요.”
현관에서 당황스러웠다. 어제 내 말을 하셨다고?
“방으로 들어가자.”
며칠 전 류파전 공연에서 한영숙살풀이 공연을 보시고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고 하셨다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강선영 선생님과의 첫 대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 위엄 따스한 마음이 나를 <태평무>에 둥지를 틀게 만들었다.
선생님과 함께 했던 많은 해외공연과 국내공연을 통해서 무대를 어려워하며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무대를 준비하는 과정을 배우며 겁 없이 춤추었던 나는 점점 무대가 더 어려워졌다. 전통원 무용과 학생들, 국립무용단, 국립국악원 무용단원들에게 하신 선생님의 <태평무> 수업시간은 나에게 보물 같은 시간이었다.
강선영 선생님은 춤을 가르쳐주면 “똑같이 추려고 하지마라”, “체격과 성격이 다르므로 본인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 “선생님과 똑 같이 추는 것보다, 이 춤의 성격과 특징을 잊지 말고 자기 춤을 추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 여성이시지만 한성준 선생님의 남성미를 춤사위에 실어 놓은 사위들은 처음에 나에게 제일 큰 문제였다.
안성의 태평무전수관에서 강습회 수업을 들어가라고 하실 때 그 떨림.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보며 실현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선생님의 깊은 뜻. 선생님의 춤 세계관을 얼마나 따라갈 수 있을지…
삶의 무게를 잘 알지 못하며 태어나서 최고의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연습도 안하고 꿈적도 안하는 나에게 뭐하고 지내는지 보고 싶으니 집에 오라고 하셨다.
할 말이 없냐는 선생님의 말씀에 아무 말도 못하고 펑펑 울어버렸다. 선생님께서 무용계를 지내오신 여러 경험을 들려주시며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나에게 용기와 힘을 주셨다. 나는 그날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 해주셨던 좋은 말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선생님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고인이 되셔서 그 기억을 더듬으려고 하니 삶의 허무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항상 나라와 무용계를 걱정하시던 선생님, 2주전 그날도 역시 눈을 뜨시자 질문은 나의 걱정과 무용계에 별일이 없는 지였다. 그리곤 뉴스를 보시고 따님이 준비한 점심을 다 드시는 것을 보면서 몇 년은 더 건강하시겠구나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가시고 기억만 남는다. 언제까지 나는 기억할 수 있을까? 선생님의 그늘을 그리워하며.
선생님 편히 영면하시길 …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