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안무가가 본 (1)
타인의 시선을 통하여 보는 나의 전통
남정호_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최근 들어서 급속한 변신을 하고 있는 국립무용단과 프랑스 안무가 몽탈보가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만났다.
 몽탈보는 이미 90년대 말에 <파라다이스>라는 작품을 한국에 선보여 영상과 무용의 탁월한 배치와 조합으로 그의 독특한 재능을 증명한 바 있다. 그 후 20여년이 지났지만 그의 재치와 장난꾸러기 기질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다.

 

 



 <시간의 나이>는 총 3부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이 작품의 진가는 1부에서 모두 발휘되었다고 본다.
 무용수이며 연주자인 단원들의 예술성을 확인하는 북춤으로 시작하여 몽탈보는 국립무용단의 춤의 보고를 탐사한 듯하다. <삼고무><살풀이춤><진도북춤><부채춤><한량무><동래학춤><강강술래><진쇠춤><처용무><바라춤><장고춤><태평무> 그리고 <도미부인>까지, 안무자는 이 춤들의 배경을 선입견 없이 걷어버리고 모두 독무로 탄생시켜 낯설게 보여준다.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게 한 이 작업은 영상속의 전통복색과 무대의 현대의상과의 대치를 통하여 같은 춤을 다른 시간성을 가지고 즐길 수 있게 한다.
 의상은 문화이다. 의상은 그 춤을 추는 장소와 시대, 상황 그리고 춤추는 이의 신분을 드러낸다. 그래서 의상을 벗은 춤은 홀가분하고 때로는 허술하지만 본질적일 수밖에 없다. 거창한 전통복식 안에서 잘 포장되어 가려졌던 몸들이 드러나 숨을 쉬고 자유롭게 움직인다. 국립무용단원들의 몸이 다르게 보이고 그 춤의 실체가 드러난다.

 

 



 한국 관객은 많이 달라졌다.
 한국사회가 겪은 숨 가쁜 격동기를 통해서 달라진 것은 경제나 사회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달라졌다. 특히 IT강국이라는 칭호는 한국인에게 글로벌 세계 안에서의 중심임을 자처케 한다. 그리고 그 고달팠던 여정에 대한 성공담을 과시하고 싶고 칭찬을 기대한다.
 최근 들어서 K-pop등의 한류열풍 주변에서 한국을 천국으로 묘사해주는 외국인이 없는 것도 아니라 어쩌면 프랑스의 유명한 무용가인 몽탈보가 한국을 또 하나의 파라다이스로 그리기를 한국 관객은 은근히 기대하였는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몽탈보는 한국을 이기게 만들어 주는 축구 감독 히딩크도 아니고 한국문화의 홍보대사도 물론 아니다. 예술가인 몽탈보는 오히려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을 보기 보다는 자기가 보고 싶은 한국의 일상을 호기심 많은 눈으로 보고자 했던 것 같고 그래서 전통춤을 추는 배경으로 멋진 고궁 같은 관광엽서에 실릴 풍경 대신에 재개발을 기다리는 살벌한 아파트풍경을 선택하여 재치 있게 담기도 했다.
 20년 전의 몽탈보의 무기는 영상이었다. 기술적으로 덜 발달 된 시기에는 그 영상의 기술에 현혹된 바도 있었다. <시간의 나이> 1부에서 보여 준 영상은 그 시절의 기술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수작업의 진정성을 드러내어 묘하게 친근하다.
 2부 ‘여행의 추억’은 의외이다. 자전거 여행자를 따라다니다가 아마도 인도 어딘가의 쓰레기더미 위에도 올라가고 인산인해를 이루는 어쩌면 중국피서객도 되어본다.
 몽탈보는 한국 관객을 과대평가한 것 같다. 아시안 다큐멘터리 풍경에 당황하여 인종적 모멸감을 느낀다면 분명코 열등감의 소산일 것이다. 아무튼 이런 거창한 영상을 배경으로는 어떤 춤도 어떤 몸도 그 존재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3부의 ‘볼레로’는 간결함과 유머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완성도 있는 춤이다. 무용사에 많은 <볼레로>가 있지만 베자르 이후의 멋진 해석이다. 1주 만에 만들었다고? 아마 안무자의 의식 속에서 몇 년이나 묵혀서 쌓여있던 생각들이 단번에 분출되었을 것이다. ‘볼레로’의 작곡가 라벨이 프랑스 인이란 사실이 새삼스럽다.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갖는 천연궁합을 느끼게 한다.
 장현수의 무당역이 눈부시다. 시간을 건너 모계사회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토록 당차고 아름답고 그래서 슬픈 무용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안무자에게도 무용단에게도 그리고 관객에게도 행운이다.

 

 



 언젠가 외국인의 집에 초대되어서 그 집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 고가구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평상시 너무 평범하여 지루하게 느껴지던 그 가구들이 거실에 멋지게 놓여 특사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 집은 천정이 높고 공간이 꽤 넓어서 조그만 공간에서 잠자고 있던 가구들이 갑자기 크게 기지개를 키며 숨어있던 매력을 유감없이 발산하고 있었다.
 국립무용단원들의 익숙한 춤집도 기지개를 켰다. 춤집이 달라졌다. 다른 문화와 만나고 충돌하면서 김미애의 우아함이나 조재혁의 존재감은 이전보다 더 현대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동안 함께 작업한 현대안무가들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시간의 나이> 작업동안 프랑스인과 수련한 아프리카춤이나 힙합이 가지고 있는 낙천적인 역동성이 이들의 춤을 하이브리드하게 하는데 한몫을 했다고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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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 안무가가 본 <시간의 나이>(2)

해체와 중첩, 단순함과 복잡함

 


손인영_ 전 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프랑스의 안무가 조세 몽탈보와 국립무용단과의 만남은 충분히 화제가 될 만했다. 3월 26일 토요일에 이 흥미로운 작업과 만났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익숙한 것들에 대하여 소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는 것에는 호기심과 신기함이 중첩된다. 몽탈보의 눈에 한국춤은 호기심의 대상이요 신기하기 그지없다. 만약 이 작품이 프랑스에서 올려진다면 상당히 생경한 경험으로 남을 공연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한국춤을 오래 봐온 관객에겐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과는 다르게 작용한다. 우리 것이 조금 다르게 올려 졌다고 해서 신기하거나 상당한 호기심을 끌어오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아주 달라지지 않고 이미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생경한 탈출은 쉽지 않다는 것. 비록 명확한 콘셉트가 있고, 시도하려는 의도도 정확하지만, 왠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지는 것은 뭔가 획기적인, 어떤 새로움을 전해주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1장 ‘시간의 나이’, 2장 ‘여행의 추억’, 3장 ‘볼레로’에서 관객들은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받게 된다. 시간의 나이는 추상적이다. 관객의 읽기를 통해 자율적인 해석을 유도하지만, 그 대답은 ‘전통과 현대’라는 고리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냥 보고 느끼라는 뜻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너무 복잡하다. 명확한 콘셉트이기 때문에 단순했고, 난해하게 풀었기에 복잡했다.
 해체와 중첩이 공존하지만 특별히 관객의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무대상의 연출은 없었다. 다양한 상황들이 연결되고 시도되었으나 어떤 것을 느낄 정도의 새로움을 선사하지는 못했다. 한국의 창작 무용가들이 안무하는 정도를 월등히 능가했는가에 대해서는 대답을 유보하겠다. 그러나 빠른 진행과 부분적으로는 흥겨움을 선사한 점, 그리고 영상과의 과감한 만남은 볼거리가 있었다.
 특히, 김미애와 또 다른 무용수가 만들어낸 2인무는 그 독특한 춤사위와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상향된 기분이 느껴지는 즐거움이 있었다. 부채를 가지고 춤을 추는 것은 너무 익숙하지만, 그 춤을 현대적인 몸짓으로 풀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습관으로부터의 탈출은 늘 어렵다. 부채를 들기만 하면 늘 추어왔던 익숙한 움직임을 배제하고, 새로운 움직임을 창조하려고 애를 쓴 김미애의 몸짓은 빨려 들어가는, 특별한 매력으로 넘쳤다.

 

 



 2장의 ‘여행의 추억’ 역시 명확하게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가장 현대적으로 풀었던 장이면서, 가장 한국적 감성을 느끼게 했다. 비록 전체적인 콘셉트로부터 유리된 듯한 느낌은 들지만, 이 작품에는 진한 감동을 주는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을 우리는 해석하기가 어렵지만, 느낄 수는 있다. 느리게 걸어가는 척박한 삶의 여정, 그것은 잠시 왔다 가는 인생의 여행과 같다. 그 여행길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쓰레기로 남기고 가는 인간과 그 쓰레기 더미에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 그리고 석양 비치는 바닷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홀가분하고 한적한 배경사진만으로도 관객은 먹먹한 감동을 받는다. 1장에서처럼 소리를 지르거나 복잡하게 뛰지 않아도 느껴지는 진한 감동, 그것이 2장의 묘미였다.
 3장은 생명이 약동하는 장이다. 익숙한 음악의 힘은 어떠한 춤을 추더라도 관객으로부터 도외시 되지 않는 안전함을 선사했다. 그러나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장면은 마지막의 장현수의 소리와 막춤(그녀의 에너지와 순발력은 기억할 만하다)이 어우러진 군무이다. 그 독특함은 작품 전체 중 가장 특별했다.
 어쩌면 1장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전통과 현대를 접목했다고 보고하는 식의 작품보다 한 차원 승화된 장면이 아니었다 싶다. 전통은 드러냄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유산이며 몸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호흡과 같은 것이다. 얼씨구! 헛! 하는 소리와 막춤은 ‘볼레로’의 강한 음악과 하나가 되어 한국적 감성인 ‘흥’으로 치환되어 재미를 더했다.

 

 



 조세 몽탈보의 작품이라 기대를 너무 많이 한 것에 비해서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품이었으나 몽탈보로서도 최선을 다한 작품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든다. 타인의 눈에 비친 한국무용과 그것을 토대로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구상했다면 당연히 나올법한 융합이 1장 ‘시간의 나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적 춤사위와 악기를 다루며 춤을 추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독특했을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눈, 프랑스인들이 이 작품을 본다면 호평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움직임 면에서나 구성적인 면에서 좀 더 획기적인 안무가 나오지 않은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거의 한국춤의 움직임을 많이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 듯한 느낌이다. 한국춤이 프랑스와 만나면 어떤 움직임이 나올지 잔뜩 기대하고 갔던 한국 관객들에게는 싱거운 기분이었다.
 안무가 몽탈보와 한국의 만남이라는 이 이질적인 문화융합에 대해 프랑스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한국이 얻은 것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 특별한 만남에서 더 많은 예술적인 산물을 기대하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욕심일까? 

2016. 04.
사진제공_국립극장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