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지난 호에는 학산 김덕명의 작고에 따른 전통춤계의 위상과 중요성, 즉 영남춤, 사찰계춤, 남성춤의 한 획을 긋는 대표성과 역사성을 기리면서 춤 인생의 초중반의 행적을 살폈다. 이번에는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김덕명이 남긴 전통춤의 유형과 27개의 종목을 소개하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그러나 국가 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
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
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 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
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