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영남춤의 진수를 간직했던 학산(鶴山) 김덕명(金德明,1924-2015)선생이 향년 91세로 지난 10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신라인 숨결 이은 천 년 춤사위’(이규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라고 지칭할 만큼 영남춤의 대가이자 남성춤의 거봉이었다. 제자의 추모글과 그의 생애와 춤의 세계를 2회에 걸쳐 짚어 본다. (편집자 주)
■ 추모의 글
“단디 배워 잘 가르쳐야 한다”
신은주_부산춤공간Shin 예술감독
바람이 유독 불어대고 비마저 내리려는 기세에 마음과 몸이 불안정한 기운으로 안절부절 못했던 그 시간, 저는 중·남미 공연 마지막인 멕시코 과달라하라에서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 있었습니다.
버스 안 빽빽이 가득 찬 짐들과 사람 사이에 겨우 차지하고 앉아 받은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신은주 선생님. 안 보이셔서 연락드렸어요. 학산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 선생님...’ 공항으로 향하는 1시간 내내 소리 내지 못하고 숨죽여 울고 말았습니다.
10년 전 선생님께 처음 인사드리고 선생님의 방 한 칸 작은 공간에서 우주를 넘나드는 춤을 홀연히 배워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생경한 몸짓과 자연적이고 담백한 춤이었습니다. 춤추는 사람의 모든 것이 일치하여 체화되는 춤의 진정성과 초월성의 깨달음에 설레던 시간의 기억으로부터, 우리춤의 정신세계와 문화의 본질을 선생님을 통해 접하며 근본적인 고민으로 혼란스러웠던 기억까지. 또한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춤을 대하는 예와 정통 계승의 진의를 강조하시며 “단디 배워 잘 가르쳐야 한다”고 선생으로서의 덕을 말씀하시던 단호한 모습이 추억으로 맺혀 흐릅니다.
선생님 춤과 전통춤의 계승 발전을 위해 저는 5년 전부터 학산 김덕명춤보존회를 조직하였었지요.<양산사찰학춤><연등바라춤><호걸양반춤><연등나례살풀이춤><교방타령춤><지성승무>... 그리고 장단, 소리 등. 배우고자 하는 저희들을 위해 매주 어려운 발걸음을 마다않으셨던 선생님.
엄격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배움의 시간 후에는 너무나 다정다감하셨지요. 통도사 학도로 들어가셨던 유년시절부터의 가족사, 춤으로 만난 세상사, 탈 많았던 지난 시절 인정사 그리고 춤과 복식, 문화, 사람 이야기 등 다방면에 박식하신 선생님의 말씀은 듣고 들어도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양산사찰학춤을 배워 익힌 제게 선생님은 직접 붓을 잡으시곤 ‘飛天舞’ 란 글을 내려주셨지요. 그리고 부산춤공간Shin의 개관식에 오셔선 “이제 젊은 사람들 응원해줘야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우리 은주 잘 부탁합니다”하고 선생으로서의 덕을 보여주시며 ‘德必有隣’의 글을 주셨습니다. 이 글은 지금 저의 집무실과 극장 공간에 소중하게 간직하며 매일 선생님의 마음을 보듯 항상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15일 국립부산국악원에서 구성진 음성으로 신명을 다해 성주풀이를 하시던 감동적인 모습이 그리고 종종 “니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인데...”하며 바라보시던 그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먹먹합니다.
병환에 계신 후론 언제나 마음만큼 자주 뵙지 못하여 죄송스러워하는 저에게 오히려 용기를 주시던 선생님. 올해 추석엔 문득, 선생님께서 쓰시던 장고를 제게 전해 주셨는데 그것이 생전에 뵌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선생님. 저 아직 듣고 배워야 할 춤의 세월들이 가득한데 어쩌지요. 선생님의 제자로서 죄송한 마음만 가득한데 아직도 먹먹하고 그립기만 한 선생님. 내일이라도 범어사 금강암에 올라 선생님 곁에 앉았다 오렵니다.
선생님.
부디 훨훨...
편안하시기를 빌고 또 빕니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은혜로운 시간들, 오래도록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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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와 춤세계 ①
영남춤과 사찰계춤의 큰 별
이병옥_춤비평가
영남춤의 대가이자 남성춤의 거봉인 학산(鶴山) 선생마저 타계(他界)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이매방, 정재만, 임이조, 지희영 등 남성 명무들만 춤계를 떠나고 있어 춤맥 단절에 안타까움이 가중되고 있는 와중에 또다시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필자는 최근 몇 년째 김덕명 선생에 대한 무용학적 구술기록을 남기기 위해 간간히 찾아뵙고 녹음과 녹화로 증언기록을 정리하던 중이었고, 아직도 구술 받을 것이 많은데 너무나도 아쉬움이 남았다. 최근 신장투석 중에 여전히 건장하고 생각이 올곧고 기억력이 좋아서 한마디도 빼지 않고 질문에 답하시던 모습도 생생하다.
특히 부산의 무용가 신은주가 김덕명전통춤보존회를 만들어 전승공연을 연년이 할 때마다 공연해설자로 참여하여 말씀을 나누고 증언을 해주는 90대의 노구에도 기나긴 성주풀이와 범패염불소리를 할 때면 스님들보다 우렁찬 성음으로 읊던 생각이 귓전에 울린다.
처음 김덕명선생의 춤을 접한 것은 정병호 교수가 열정적으로 숨겨져 있던 주옥같은 명무들을 발굴하여 중앙무대에 소개하던 시절인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에서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였다.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한량무> 등이었는데 학산(鶴山)의 춤을 보고 정말 놀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통춤이란 곱고 아름답고 남자들이 추더라도 여성적인 춤만이 춤인 줄 알았던 필자는 “역시 남성은 남성다운 춤을 추어야겠구나!”라고 깨달았고, ‘지금까지 본 춤꾼들 중에 이렇게 큰 춤집으로 춤사위를 구사하는 이는 처음이다’라고 느꼈었다. 그러면서 ‘이런 춤사위가 우리 전통춤 속에 살아있다면 이건 지역적 특성인가? 아니면 신분 계통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춤태인가?’하는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었다. 이것을 발단으로 한국전통춤에는 여러 갈래가 있는데 지역별로 춤사위가 다르고 계통별로도 다르다는 사실을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었다.
그 당시 김덕명의 춤을 보았던 평론가 박용구(1914~ )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의 춤을 본 당시 국악원장이며 예능보유자 김기수(1917~1986)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고, 김천흥도 양산사찰학춤 강습회에서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고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었다고 했었다.
정말 안타깝고 서글픈 것은 김덕명의 타계만이 아니라 전톰춤계의 위상에 큰 차질을 해결하지 못하고 생애를 마감한 점이다. 사실 1976년 김덕명의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보에 등재까지 했었는데 같은 지역에서 방해자가 나타나 보류되는 바람에 전통춤계의 역학 구도가 여성춤 편향으로 기우는 치명적인 지각구도가 발생했었다. 진정한 남성춤의 영역이 세대를 거쳐 위축된 절름발이식으로 국가무형문화재의 양각 구도 속에 오늘날까지 왜곡된 점이다.
재의 전통춤계는 한성준류의 재인계통춤(한영숙 승무, 강선영 태평무)와 이매방류의 기방계통춤(승무, 살풀이춤)만이 국가를 대변하는 명무로 부각되어 있다. 물론 김숙자의 재인계통춤(도살풀이춤, 구체적으로는 무속계통의 성향)도 지정되었었지만 곧바로 작고하는 바람에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었고, 최근에는 지방무형문화재가 다수 지정되어 다소 보완하는 현상은 있지만 결국 춤의 양대산맥의 양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째, 흔히 ‘영남은 춤, 호남은 소리’라고 하는데, 춤의 고장 영남에서는 개인종목 명무가 단 한 건도 지정되지 못한 점이다. 단체종목의 춤을 예외로 돌리고 개인종목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종목은 모두 경기호남귄(백제권)에서만 지정되었고 영남권(신라권)에서는 김덕명이 지정되려다 마는 절름발이 지역문화재가 되었다.
생태적으로 볼 때 호남은 따뜻한 기후와 평야지대의 특성만 나타나 ‘수평춤’과 ‘대지지향춤’, ‘하향춤’의 특성을 보여주지만, 영남은 기후적으로 따뜻한 남쪽지방이면서도 산이 많아 추운 지방적 성향이 공존하고 있어 추운지방의 ‘수직춤’과 더운지방의 ‘수평춤’이 혼재되어 ‘수직·수평춤’의 특징으로 입체성이 강하다. 또한 산악적 특성과 평야적 특성이 혼재되어 산악지대의 ‘상향춤’과 평야지대의 ‘하향춤’이 혼합되어 ‘상향·하향’이 복합된 상하진폭이 큰 날개사위로 학춤사위같이 춤폭이 넓고 비교적 활달한 춤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신라 천년의 중심문화와 양반세도문화의 형성으로 남성중심의 한량춤과 양반춤 같은 춤 유형이 발달하였고, 교방춤과 풍류춤이 발달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서민들은 반항적인 양반풍자탈춤과 활기찬 활개춤과 배김새춤이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영남춤의 춤사위의 특징은 땅기운이 솟아오르는 천상지향춤과 땅에 배기는 배김새춤, 상하사위, 수직·수평춤, 입체춤, 도약춤, 덧배기춤, 날개사위, 학춤사위 등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영남춤의 특징을 가장 많이 내포한 대표적인 춤이 김덕명의 <양산사찰학춤>이다. 춤의 정서적으로 볼 때도 백제권(호남권)의 춤은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시나위춤이 대부분이지만 신라권(영남권)은 시나위 음악 자체가 없으며 흥겨운 굿거리와 덧배기가락의 신명의 춤으로 한 맺힌 춤이 거의 없다. 이렇게 다른 정서와 춤사위의 생태성을 가진 영남춤이 국가문화재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아 더욱 안타깝기 그지없다. 되돌려 말하자면 김덕명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됐더라면 여성적인 춤, 한(恨)의 춤만이 민족춤의 정수인 것 같은 현실에 활기찬 남성춤과 신명의 춤이 비중있는 균형을 이루었을 것이다.
둘째, 전통사회의 사찰춤판과 사찰계통춤이 단 한 건도 지정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탱화를 보면 절 마당에서 온갖 춤판과 놀이판을 벌였다. 극장이 없던 시절에 오늘날 극장과 같은 기능을 한 곳이 절 마당이다.
오늘날 영산재나 수륙재를 연행하는 어장승(魚丈僧) 역시 지금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는 수준이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1년 6월 사찰령과 더불어 각 본말사법이 제정되자 조선승려의 범패와 작법이 금지되었고, 의식이 간소화되었다. 이처럼 불교의례를 금지하기 전에는 범패작법의 명인명무였고, 사찰소속 사당패들이 전국을 돌며 춤과 놀이를 연행하였고, 재인광대들도 사찰춤판을 배경으로 명성을 날렸었다.
지금도 그 흔적으로 경기 안성 청룡사 소속 8개 사당패가 존속하였고, 이매방도 목포 포배당 가설무대를 만들어 춤판, 소리판을 벌였을 때 춤을 추었고, 이때 이대조(1870년 초~1950년대, 북반주)와 한성준(1874~1941, 장구반주)은 서로 잘 아는 친구 사이로 공연에서 이동백, 이화중선 등의 반주를 맡았다. 이처럼 절 공연은 조선시대 굿중패, 절 걸립패, 사당패들의 근거지였고, 공연장이 절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러한 연희문화 현상은 잔존하다가 근대극장문화가 대두되면서 점차 사라져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남 양산 통도사도 영남 최고의 사찰로 김덕명의 윗대부터 춤판과 전승이 이루어졌었다. 이러한 전통춤판의 역사를 아는 이가 많지 않아 안타깝고 이 시대 마지막 사찰계 재인 김덕명의 사찰춤이 지정받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것이 아쉬운 일이다.
김덕명의 춤생애
1) 입문기- 출생과 입문(1924~1932)
김덕명(金德明)은 1924년 3월 22일 경상남도 양산동면 내송리 277번지에서 부친 김현민(金顯玟)씨와 모친 이선령(李先令)씨 사이에서 5남2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양산은 우리나라 시골 특유의 평화로움과 순수한 자연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며 근처에는 한국 8대 사찰의 하나인 통도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사찰의 하나인 통도사는 수많은 불사가 있을 적마다 불교의식무 및 예식절차를 성대하게 개최했기 때문에 그곳에 자주 참여하던 할아버지와 함께 아주 어려서부터 그것들을 눈여겨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의 유교 풍습대로 엄한 사대부 교육을 받았으므로 부모님들은 어려서부터 예능에 대해 남다른 감각을 보이고 있는 그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린 그가 할아버지를 따라서 절에 가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묵과할 수 있었으나 동리에 들어온 남사당패나 걸립패를 따라 며칠씩 쫓아다닌다거나 무당들의 굿마당에서 끼니를 잊고 구경하는 등으로 남달리 가무음곡에 열중하는 태도에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모님들은 의논 끝에 새로운 공부에 마음을 돌리게 할 셈으로 그가 5살 나던 1928년 동리에 있는 서당에서 이시찬(李始贊)훈장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의 맹목적 도취감으로 가무의 재미에 빠져버린 그의 마음은 서당의 딱딱한 한문 공부보다는 광대들의 춤이나 놀이판의 흥겨움에 더 끌리고 있었다.
틈만 나면 양산, 동래, 울산 등지의 큰 무당들이 펼치는 굿판이나 놀이판을 찾아다니는 그를 보다 못한 부모님들은 “광대가 되려나보다”고 걱정을 더 했으며 가문을 욕되게 하느니 차라리 중이 되는 것이 낫겠다고 여겨 1931년에 8살 된 그를 동래의 범어사로 보내게 되었다. 범어사에 들어가긴 했으나 어린 그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건 염불보다는 오히려 불가(佛歌)를 부른다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해 스님은 수행에 방해가 되는 그의 자유분방한 행동을 금지시키자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범어사에서 쫓겨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그는 또 다시 굿판이나 남사당 놀이판을 쫒아 다니며 부모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다.
그러자 부모님은 이번엔 그를 할아버지인 김두식(金斗熄, 1843-1930, 사찰학춤 명인이며 통도사 곡수(穀數) 담당)과 절친한 양대응(梁大應)스님이 주지로 있는 통도사(通度寺)로 보내면 조부와 친분이 깊은 스님이 잘 관리해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2) 학습기- 사찰춤과 권번춤(1933~1944)
10살(1933년) 되던 해에 통도사로 보내진 그는 통도사 부설 보광학교의 보화스님(원명 원차식, 대처승)에게 글을 배우면서 간혹 상좌들이 춤추며 연습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춤을 엿보며 따라 배우게 되었다. 그때 통도사의 주지 양대응(梁大應)스님은 양산학춤, 지성바라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지만 정작 할아버지(김두식)에 대한 기억은 그가 7세 되던 해(1930년) 돌아가셨으므로 뚜렷한 바가 없다고 하였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승무와 학춤에 능한 신경수(辛景壽) 스님이 김덕명이 춤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승무와 학춤을 가르쳐 주었다. 신경수 스님은 키가 크고 갸름한 외모로 춤사위가 섬세하고 세련되었던 반면, 양대응 스님은 큰 체격으로 육중하게 추었다. 당시 상좌들에게 교습방식은 따라 배우기식으로 했기에 예능에 특별한 소질이 없는 상좌들은 배우기 힘들었지만 그는 좋아하는 춤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즐거워 열심히 따라 배운 결과 상좌들보다 월등하게 춤을 잘 추게 되었다.
그가 학춤과 승무, 바라춤을 배우고 나자 통도사에 제(祭)가 있을 때 직접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다. 당시 통도사의 행사는 수시로 이루어졌는데 기생들을 참여시켰고, 학춤과 승무, 기녀의 소리와 살풀이춤이 어우러지는 공연이었다.
그가 다니는 절과 집 사이에는 양산권번이 위치해 있었는데 권번장은 고수길(高壽吉, 1888~1965)로 원래는 사대부집의 서자였으나 공부보다는 예능에 뜻을 두어 부산의 동래 권번에 있던 사람이었다.
대처승인 신경수·양대응 스님에게 춤을 배우는 과정에서 스님들은 권번이나 요릿집에 들러서 기생들과 춤판을 벌이며 놀았다. 이때 그를 데리고 다녔기에 춤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매일을 통도사에 다니며 춤을 익히는 동안 그는 또 다른 방법, 즉 권번에서의 기예도 배우게 된다. 그때 양산권번의 기생으로는 권번장 고수길의 딸인 큰 딸 고채봉(高綵峰)과 둘째딸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이 있었고, 이외에도 명월(明月), 모추월(毛秋月) 등이 있었다. 이때의 관습으로는 일반 사가에서도 자손들에게 교양으로 가무를 가르치기 위해 8~9세쯤의 나이가 된 또래들을 권번에 보냈다고 한다.
사찰춤을 먼저 배운 그는 권번춤을 익히는 데는 걸림돌이 많았다. 우선 투박하고 단순한 사찰춤에 비해 권번춤은 섬세하고 곱고 보폭도 좁아 상반된 정서와 춤기법으로 혼선이 많았지만 그래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사찰행사와 권번과 요릿집에서 이미 기녀들의 춤을 눈여겨 살핀 눈썰미로 양면성을 극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권번춤의 명무 이주서(李周瑞, 1882~ ?)와 고수길로부터 양반춤을 배우면서 고수길원장의 딸인 기녀 산월(山月, 고채숙)과 함께 사찰과 권번을 왕래하며 춤을 추기도 하였다.
김덕명이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게 된 것은 12세(1935)때 평양명기 김농주(金農宙, 1905~?, 당시 31세)가 평양생활을 청산하고 진주(晋州)나 동래권번(東萊券番)에서 춤사범으로 정착하고자 찾아왔지만 그 곳에 설자리가 없어 양산권번으로 발길을 돌린 것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덕명에게는 김농주를 만난 것이 그의 춤은 발전하고 성숙의 단계에 이르는 운명적인 만남이 되었다.
김농주가 양산권번의 교육전담사범으로 자리하면서부터 모든 기녀들은 예능교육에 앞서 절도있는 소양(素養)교육과 엄격한 실기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격식있는 품격과 소양을 갖춘 김농주의 춤은 가히 무선(舞仙)이라 할 만큼 뛰어났으며 예능지도에도 열정이 대단하여 강하고 부드러움이 조화된 춤사위는 조화를 이룬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김농주의 춤을 배우면서 김덕명의 춤도 걸음마 단계를 넘어 성숙해지기는 하였으나 사찰에 적을 두고 있던 그는 스님들과의 외출이 잦아 겨우 순서정도를 익히는 것에 불과하여 흥과 멋을 익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춤은 김농주에 의해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춤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걸음마부터 다시 배우는 기초과정은 그가 16살(1939)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교방타령, 굿거리, 교방양반춤, 한량무, 신라장검무, 장기춤, 등 김농주가 가진 예능을 배우면서 춤이 무르익으며 성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들이 배우러 오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여 선생님들도 여자들보다는 우선적으로 남자를 가르쳤으며 그 가르침 또한 매우 엄해서 한동작, 한가락, 한마디의 소리라도 소홀히 하면 느티나무 회초리가 한 묶음이 다하도록 종아리를 맞았었다.
양산권번의 기녀교육과정은 춤을 배우기 전에 2단계의 걸음걸이부터 익히게 하였다. 1단계는 머리위에 사발을 올려서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였고, 2단계는 물이 담긴 사발을 머리위에 올린 후 차분하고 고운 걸음걸이를 연마한 후 빠른 걸음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기본적인 걸음걸이가 완성되면 무릎을 굽히고 펴는 훈련과 전, 후의 절도 있는 발 디딤을 배웠다. 하지만 교육은 체계적이지 않았고 사범이 시범을 보이면 기녀들은 따라하는 정도였다. 때문에 기녀들은 지나쳐가는 순서를 쉽게 외울 수 없었다. 더구나 교육규정상 세 번 이상의 설명을 하게하면 머리가 나쁘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는 진주에서 열리는 전국 기생 교류모임에서 양산권번을 대표해서 장기춤을 추어 각 지역의 기녀들을 제치고 당당히 1등을 했는데, 김덕명의 증언한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당시에 전국에 기생이라 하는 기생은 다 모이기 땜에 웬만한 기생은 그 자리에 가면 다 만날 수 있는 기라. 그땐 내가 키가 조그만 한 게 팔을 탁 걷어붙이고 ‘장이야’ 하면서 춤을 추모 모두가 좋아하는 기라. 기생들이 귀엽다고 안아주고 난리가 난 기라. 머 대회라 해서 요새처럼 한사람 춤추고 상주고 그런 게 아니고 모두 모여서 잔치분위기로 하는 긴데 춤을 잘 추니까 1등으로 정하고 한상 그득하게 대접받는 정도지 요새처럼 상장주고 그리 안했다. 팔도 기생이 모이모 지 잘하는 거 내 보이고 그게 교류라는 기다.”(2013년 5월 15일 인터뷰 내용, 박계현 박사학위논문 중에서 인용)
이렇게 해서 권번의 춤과 가락, 악기, 시조, 창 등 여러 분야의 예능을 몸에 익혔고 16세(1939)가 되던 해에는 개성권번에서 춤을 추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권번마다의 장기를 겨루기 위해 지방마다 서로 옮겨 다니며 예능을 선보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개성에서 춘 그의 춤은 그 예능인들 사이에서도 인정이 되어 전라도의 임방울이나 양산에 있다가 진주로 옮겨가 명기가 된 모추월의 칭찬을 받았고, 김농주 같은 이는 아예 그를 안고 다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권번에서의 춤을 배운다는 것을 알게 된 집안의 노여움으로 17세(1940)에 집으로 끌려왔다. 그는 두려운 마음보다 집에서 생활해야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다 마침 소를 팔아 둔 돈을 훔쳐서 포항으로 도망갔다. 포항에서도 주로 구경을 하며 돌아다녔으며, 여성국극단 임춘앵(林春鶯, 1923~1975, 전남 함평출신, 본명 임종례)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자 받아들여져 방자역을 맡아하기도 했는데 그만 공연 3일 만에 임춘앵 앞에서 넘어지는 실수를 하여 야단을 맞고는 그만두고 말았다. 의지할 곳 없는 그는 빵집에 취직하고 생활하였지만 수소문해서 찾아온 큰 형님에게 붙들려 다시 집에 끌려오게 되면서 가출생활은 청산되었다.
이 후 그는 통도사 부설 보광학교(寶光學校)를 수료(19세, 1942년 2월10일)하고, 큰형님이 부탁한 면장의 추천으로 경상남도 황민연성도장(皇民練成道場, 해방 후 광안농업학교 )에서 1년 동안 힘든 생활을 하여 1943년(20세) 8월3일 단기수료로 졸업을 하게 되니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는 마지막인 학교생활이었던 셈이다.
3) 성숙기-해방과 직업생활(1945~1968)
20세(1943) 되던 해 다시 춤을 추고자 마음먹었지만 일본군의 징집영장을 받게 되었고 자손을 이어야한다는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징집 3개월을 앞두고 혼례를 치렀다. 그때 신부는 친구의 동생인 정용순(鄭龍順)이였다. 제대로 신혼생활도 보내지 못한 채 징집된 그는 일본군으로 중국 땅까지 진출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거기서 해방(1945년 22세)을 맞았다. 일본군으로 남의 땅에서 해방을 맞았으니 고국까지 돌아오는 길도 험하여서 집에 도착한 것은 해방이 된지 3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사이 부인은 아들을 낳아 키우고 있었으니 그의 일본군에서의 고생이나 돌아올 때의 고생은 어느 정도 상쇄되는 듯도 싶었다.
그러나 김덕명은 다시 권번생활(1945년)로 돌아와 그의 할아버지(金斗熄)의 제자인 황종렬(黃鍾烈)과 안화주(安化周)에게서 양산통도사의 사찰 춤을 배웠으며, 김농주(金農宙, 1905~?)에게는 신라장검무, 기생소고무, 타령, 굿거리, 한량무 주로 기방무를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을 배웠다.
특히 그는 평양명기 김농주와 오누이를 맺어 김농주의 모든 춤을 전수받게 되는데 김덕명의 권번춤에 큰 영향을 미친 김농주와 오누이가 된 인연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6년(23세) 김덕명은 양산의 작은 누님집에 세 들어 사는 서울댁을 자주 찾게 되었다. 이유는 서울댁은 원래 서울 권번출신으로 권번춤의 명무 이주서의 조카 이경구의 애첩이었기에 서울예술에 관한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였다. 그때 마침 김덕명의 모친 환갑을 맞이하여 잔치를 주도할 기생이 필요하다고 하자 김덕명 본인이 직접 수소문할 수도 있었지만 서울댁을 통해 양산권번에 선을 넣었다. 그런데 행사를 맡은 기녀는 뜻밖에도 권번춤을 가르쳐주시던 김농주가 직접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고 게다가 양산권번장 고수길의 딸인 채봉과 채숙과 함께 잔치의 판을 이끌게 되었다. 사흘 동안 치룬 모친의 환갑잔치는 성대하였고, 잔치판을 주도한 김농주는 뛰어난 평양명기의 예술성을 유감없이 발휘함으로서 김덕명의 모친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게 되었다. 환갑잔치가 인연이 되어 홀로 타향살이를 하던 김농주는 가족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자 후덕한 김덕명의 모친에게 수양딸로 받아달라고 청하게 되었다. 모친께서는 김농주의 재능과 헌신적인 성품을 높이 평가하던 터라 청을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김덕명과는 오누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김농주의 춤을 더욱더 열심히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945년(22세)부터 배우기 시작하였지만 이제는 집에서 함께 거주하게 되어 1949년(26세) 김농주(44세)가 혼인하기 전까지 그녀의 춤을 개인교습으로 배울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농주의 보유종목인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 교방진연무, 교방살풀이, 교방소고무 등 다양한 춤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기교를 깃들인 멋진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
김덕명이 어린 시절에 배운 춤은 멋과 의미를 모르는 채 추었지만 김농주와 의남매 인연을 맺은 후 그녀가 추는 멋을 알게 되었고 기교를 익히면서 그의 춤은 신경수 스님 평양명기 김농주 양대응 스님에 의해 완숙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대가족이 함께 사는 김덕명의 집안에는 며느리와 손주들이 늘어나면서 더 이상 온가족이 함께 생활하는데 한계에 이르렀다. 그래서 집을 옮기면서 그의 모친이 김농주를 두 딸과 함께 생활하는 5촌 당숙모 댁에서 살도록 배려하였다. 그 후 모친은 중년이 되도록 혼자 살고 있는 44세의 김농주에게 맞는 배필을 찾아 혼인을 시켜주었다. 그래도 김농주가 혼인한 후에도 1954년(31세)까지 남편과 함께 김덕명 집에 자주 오가면서 틈틈이 춤을 익혔지만 1955년(32세) 이후 소식이 끊겼다.
한편 그는 해방으로 제대 후 곧 양산에 연구소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춤을 추려고 했으나 어엿하게 자식까지 둔 가장이 춤만 추러 다닌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1948년(25세) 12월 면서기시험을 치룬 후 면서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8년간(1948~1956)은 직장생활에 충실하며 춤이니 장단이니 하는 것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나 예능 외의 사회물정은 전혀 모르고 지냈던 터였으므로 면서기의 박봉만으로 늘어나는 식구의 생계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1957년(34세) 3월 부산의 한일기계 제작소의 영업부에 입사시험을 통한 정식 사원이 되어 대외업무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의 주요업무는 상대 거래회사 사람과의 상담이었다.
그때만 해도 상담하는 관례상 저녁에는 거래하는 회사의 사람들과의 연회가 많았다고 하며 그런 자리에서 그는 기생도 꼼짝 못하게 할 만한 춤과 장단으로 흥겨운 자리를 만들곤 하여 번번이 상담에 성공하였다고 한다.
일동회사라는 이름의 그의 회사는 경쟁하는 입장에 있던 회사에서는 너무나 상담을 잘 성공시키는 그에게 월급을 배로 줄 테니 자기네 회사로 옮기라는 유혹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자신의 예능에 대한 긍지는 누구보다도 높았으나 당시 사회가 모든 예능인들을 천시하던 풍조가 팽배해 있던 때이었으므로 자신보다는 오히려 자라던 자식들을 위하여 자신의 예능을 조심스럽게 숨겼다.
4) 원숙기-중년의 춤활동기(1969~1975)
그러나 그 반면에 전통예술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서는 우선 배우는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1969년(46세) 부산대학교의 전통예술연구회(동아리 지도교수 서국영)에 46세 때 지도를 맡아 10여 년간(1969~1975)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1970년(47세) 차츰 그의 전통춤이 소문을 타고 널리 퍼지게 되면서 동래야류의 차양반(次兩班)역을 맡은 그의 친구가 3년 동안이나 동래야류에서 함께 활동하기를 권했지만 그는 광대 라는 사회적 인식이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되어 매번 거절했었다.
그러다가 1973년, 그는 큰 아들이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 받은 후 가정의 생활권을 아들에게 넘기고 보다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하게 되었다. 전통예술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차츰 달라지고 자식들도 가정을 갖게 되어 생활이 안정되자 오로지 춤만 추는 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예술 활동을 시작하게 된 1973년 이후로 친구가 더욱 적극적으로 동래야류 입회를 간청하자 자신 생각도 차츰 바뀌어 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친구의 입회조건은 동래야류 단체에 적을 두고 차양반 춤과 상관없이 이수증만 받아두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김덕명은 동래야류 회원들이 춤을 출 때면 회원들의 야류춤과는 다른 자신이 보유한 양반춤을 추며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는 앞으로 보유자 지정 가능성을 알리며 그를 차양반 이수자 명단에 올리게 되자 회원들 간에 미묘한 기류가 형성되면서 성향이 다른 그들과는 애매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동래야류에 잠시 몸담고 그들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된 것이 나중에는 그의 춤 인생에 커다란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악수를 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1973년 10월26일 부산대학교 야외공연장 축제에서 전통예술반의 한량무발표회를 갖고 학춤 찬조출연도 하였다. 이어서 부산시민회관에서 제1회 전통춤발표회를 갖게 되면서 그는 춤 잘 추는 춤꾼으로 예술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후에도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부산대학교 대극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부산대학교 전통예술연구회에서 한량무를 전수한다는 소식이 진주 팔검무(八劍舞)회까지 전해지고 무용계에도 차츰 알려지면서 제6회 공연을 마감하고 더 넓은 춤 세계로 나가는 인생행로가 펼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통적으로 춤을 배운 그는 너무나 올곧은 춤맥에 사로잡혀 가끔씩 서울에도 올라가 춤판을 보고 잘못된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무슨 춤이냐”는 등의 고지식한 말을 하곤 해서 많은 빈축도 샀고 미움도 사곤 했다. 그러자 그를 아끼는 사람들로 부터도 “김선생, 그러다 몰매 맞겠어”, “알면 김선생이나 알고 있지. 왜! 이러구 저러구 해서 미움을 받나”라는 말들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로서는 어려서부터 배워온 춤이라 그 하나하나의 작은 변화까지 뻔히 알고 있는데 정작 다른 사람이 추는 것을 보면 너무나 전통춤의 정도에 어긋나 있어서 도무지 참을 수 없어 그랬던 것이다.
그때 그는 부산에서 자그마한 무용연구소를 내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배우려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쉽게만 배우려고 하자, 오랫동안 스승으로부터 혹독하게 수련하며 배운 춤이기에 바른 춤길을 엄격하게 가르치니 어렵고 따분하다고 하며 떠나버리는 바람에 사실상 그의 무용연구소는 경제적인 면에서는 운영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때는 꽤 많은 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올바른 무용의 전수에만 힘쓸 수 있었다.
*다음호에는 김덕명의 인생후반기와 전통춤 보유종목별 특징과 예술성에 대해 피력합니다.
<김덕명의 약력>
학력
1933-1940 : 양산군 동면 내송리 한문서당 이시찬 훈장에게 한학 사사
1942.02.10 : 통도사 보광중학교 수련 학도
1943.08.03 : 경상남도 황민 련성도장 수료(해방후, 광안농업학교)
1940-1945 : 통도사, 대응․ 경수스님에게 학춤, 승무, 바라춤 등 사사
1945-1951 : 양산권번 고수길, 평양명기 김농주에게 정통 고전춤 사사
1987.03.05 : 경성대학교 무역대학원 수료
1997.09.15 : 명예 철학박사학위 및 객원교수 획득(몽고 불교대학교)
경력
1948 - 1950 : 회장(양산군 동면초등학교 사친회) 역임
1953 - 1968 : 원장(한국사회사업 경상남도연합회 정화 양노 자애원) 역임
1969 - 1975 : 상임지도위원(부산대학교 전통예술연구회) 역임
1976 - 1981 : 상임사범(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팔검무회) 역임
1979. 05. 02 : 무형문화재 경상남도 제3호 한량무 原始 보유자
1980 - 1993 : 원장(불교중앙문화예술원)
1982 - 1987 : 상임강사(부산여자전문대학 전통무용) 역임
1982 - 1986 : 원장(대한불교예술원 설립, 현 부산불교교육대학) 역임
1983 - 1987 : 김해문화원 민속예술지도사범 겸 김해시립정통무용단 단장역임
1983 - 2007 : 김해가락오광대놀이 지도사범(현)
1984 - 1990 : 상임강사(부산대학교 예술대학 무용학과) 역임
1984. 03. 30 : 한량무 무보 발간(무형문화재 경남 제3호 ․ 등록번호 제 카-1-103호)
1988 - 1993 : 경상남도지부장겸 중앙이사 (<사>한국국악협회) 역임
1994. 04. 25 : 정통고전음악 취입(음반제작 문체부등록 228호)
1995 - 2005 : 상임강사(양산문화원 부설 문화학교 정통고전부) 역임
1996. 07. 11 : 망시곱배기춤발굴전수(양산시 웅상읍덕계) 경남도대회장려상획득.
1998. 11. 19 : 단장(사. 21세기 통일준비운동본부) 역임
2002. 06. 21 : 회장(양산사찰학춤 보존회) 현
2004. 02. 19 : 음반제작 KBS FM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 (성주풀이 등 취입 등록)
2005.08.20-21: 제1회 양산사찰학춤 강습회(대상:전국, 장소:양산)
2005 - 2006 : 운영위원장(부산불교교육대학 운영위원회) 역임
2006. 07. 24 : 고문(부산불교교육대학)
수상
1976. 06. 03 : 제1회 전주대사습 전국경연대회 입선(호걸양반춤)
1978. 11. 09 : 제29회 개천예술제 제2회 경남지사상 최우수상(한량무)
1979. 04. 12 : 제11회 민속예술전국대회 우수상(한량무)
1984. 10. 15 : 제2회 향토민속예술 경남대회 우수상(김해석전놀이)
1990. 04. 11 : 제22회 경남민속 예술경연대회 장려상(김해가락오광대)
2006. 09. 12 : 제11회 대통령상 한밭국악전국대회 (1)최우수상/연등바라춤
2007. 08. 30 : 제12회 대통령상 한밭국악전국대회 (1)최우수상/양산사찰학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