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사례
유명 공연 제작 회사인 A는 무용수가 스스로 무용을 창작하고 실연하는 공연 및 이를 촬영한 영상물을 제작하기로 하고, 몇몇 유명 무용수들에게 스스로 창작한 무용의 시연을 의뢰하면서 당선된 무용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공연 출연 계약을 체결하기로 하였다.
(1)A는 오디션 후 무용수 B를 당선자로 선정하고 B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였다. 양 당사자는 서면 계약을 전제로 출연 내용에 대한 제반사항을 협의하며 계약서를 수정하며 주고받았고, B는 계약대로 진행될 것이라 신뢰하고 다른 공연 스케쥴을 정리하고 안무를 창작하였다. 그러나 A는 회사 내부사정과 경제여건 등으로 인해 구체적인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B에게 공연 출연을 취소하기로 하였다고 통보한 후 다른 무용수 C와 계약을 진행하였다.
이 경우 B는 A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2) 한편 C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고 무용수로서 계약 체결 경험이 전무한 자였다. A는 C와 공연기간, 저작권료, 출연료에 대하여 간략한 내용을 담은 계약서를 작성하여 서명한 후 구두로는 C의 저작인격권을 포기할 것, 해당 공연기간은 물론 공연을 녹화한 영상을 배급, 유통하는 기간동안 C가 타 방송이나 타 공연에 출연하지 않을 것, 그리고 이를 위반할 경우 이미 지급한 저작권료와 출연료의 10배를 배상할 것을 조건으로 합의하였다.
C는 공연기간이 모두 종료한 후 타 공연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자 이에 출연하기로 하였으나, A는 자신의 공연영상이 유통되는 중이고, 영상이 유통되는 동안 타 공연에 출연하지 않기로 합의하였으므로 C의 행위는 계약위반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C에게 지급한 출연료의 10배에 해당하는 손해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청구하였다.
이 경우 C는 A에게 해당 손해배상금을 지급하여야 할까?
사례(1)의 해설
□ 계약 성립의 요건
계약이 성립되기 위하여는 별도의 형식이 요구되지 않으며, 계약 당사자 간의 의사의 합치만 있다면 계약은 성립된다. 즉 당사자 일방이 상대방에게 일정한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자는 뜻의 청약의 의사를 표시하고, 상대방이 이에 대하여 승낙의 의사를 표시하면 계약이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계약서가 작성되지 아니한 구두계약이나 계약서를 작성하였으나 당사자가 서명을 하지 아니한 경우라 할지라도 당사자 간 의사의 합치만 있다면 계약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계약이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의사의 합치’의 기준이 문제된다. 판례는 계약의 내용을 이루는 모든 사항에 관하여 의사의 합치가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아니하나, 계약을 이루는 본질적인 사항이나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는 구체적인 합의가 존재하거나 적어도 장래에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있는 기준과 방법 등에 관한 합의는 있어야 한다. 특히 당사자가 의사의 합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표시한 사항에 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경우에는 계약이 성립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위 사례로 돌아가, 만일 A와 B 간 협의 과정에서 안무제작 및 공연출연에 관한 본질적이고 중요한 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 공연기간, 출연료, 창작한 안무에 대한 저작권 귀속 여부, 저작권료 및 그에 따른 제반사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계약서 작성이나 서명 여부와 무관하게 계약이 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공연기간, 출연료, 저작권 귀속 및 저작권료 등 본질적이고 중요한 사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단계라면 계약이 성립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계약 내용의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분에 양 당사자의 의사 합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작성한 계약서에 계약의 효력은 양 당사자가 서명 또는 날인한 날로부터 발생한다는 조항이 있다면 양 당사자가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까지 그 효력을 유보하는 것으로 의사가 합치되어 있다고 할 것이며, 이때 A는 이를 근거로 계약의 효력이 발생하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
□ 계약 성립시 채무불이행에 따른 손해배상
A와 B 간 계약이 성립하였다고 가정하고 사례를 살펴보자. A와 B 간 계약이 성립하였다면, A의 행동은 계약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겠다는 계약파기 의사를 명백히 표시한 때에 해당하므로, B는 A에 대하여 이행거절을 원인으로 계약을 해제하고 이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때 B가 청구할 수 있는 손해의 범위가 문제되는데,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계약을 해제 또는 해지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채권자는 채무가 이행되었더라면 얻었을 이익을 얻지 못하는 손해를 입은 것이므로 계약의 이행으로 얻을 이익, 즉 이행이익의 배상을 구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채권자는 그 대신에 계약이 이행되리라고 믿고 지출한 비용의 배상을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라고 볼 수 있는 한도에서 청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지출비용의 배상은 이행이익의 증명이 곤란한 경우에 그 증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인정되는데, 이 경우에도 채권자가 입은 손해, 즉 이행이익의 범위를 초과할 수는 없다(대법원 2017. 2. 15. 선고 2015다235766 판결).
따라서 B는 A에 대하여 계약이 이행되었더라면 얻었을 저작권료나 출연료 기타 예상되는 이익을 지급할 것을 청구하거나, 그 이행이익의 범위 내에서 계약이 이행되리라고 믿고 지출한 안무 창작비용 등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 계약 미성립시 계약교섭의 부당한 중도파기의 불법행위 구성
이번에는 A와 B 간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다고 가정하고 사례를 살펴보자. 계약이 성립하지 않았다면, B는 A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을까? 보통 계약이 성립하기 전에는 당사자 간 법적 관계가 형성되기 전이므로 당사자 일방이 교섭을 중도에 파기하더라도 어떠한 법적 책임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판례는 어느 일방이 교섭단계에서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부여하여 상대방이 그 신뢰에 따라 행동하였음에도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혔다면, 이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자유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하고, 그 일방은 상대방이 입은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보고 있다(대법원 2003. 4. 11. 선고 2001다53059 판결).
사례의 경우 계약이 성립되지 않았더라도 서명 외 계약 내용의 의사 합치가 있었던 점에 미루어 B는 계약이 확실하게 체결되리라는 정당한 기대 내지 신뢰를 가지고 A가 요구하는 대로 안무창작을 하거나 관련 스케쥴을 정리하는 등의 행동을 하였을 것임에도, A가 B와는 무관한 자신의 내부적 사정만으로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의 체결을 거부하고 다른 무용수와 계약을 체결한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계약자유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서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그러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의 범위는 일방이 신의에 반하여 상당한 이유 없이 계약교섭을 파기함으로써 계약체결을 신뢰한 상대방이 입게 된 상당인과관계 있는 손해로서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다고 믿었던 것에 의하여 입었던 손해에 한정된다.
따라서 B가 계약이 이행되었더라면 얻을 수 있었던 저작권료나 출연료는 결과적으로 이 사건 계약이 정당하게 체결됨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그 이행을 청구할 수 없고, 그 불이행책임을 청구할 아무런 법적 지위에 놓여 있지 아니하게 된 이상 B는 위와 같은 손해의 배상을 구할 수는 없다. 또한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하여 지출한 창작비용 등 계약체결에 관한 확고한 신뢰가 부여되기 이전 상태에서 계약교섭의 당사자가 계약체결이 좌절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지출한 비용의 배상도 구할 수 없다.
다만 B는 계약이 유효하게 체결된다고 믿음으로써 지출한 무용창작 비용 상당액은 청구할 수 있으며, 이와 별도로 그 침해행위와 피해법익의 유형에 따라서는 계약교섭의 파기로 인한 불법행위가 인격적 법익을 침해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정신적 고통을 초래하였다고 인정되는 경우라면 그러한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에 대하여 별도로 배상을 구할 수 있다.
사례(2)의 해설
□ 법률행위의 효력
[사례1]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A와 C가 한 구두합의도 계약으로서 효력이 있다. 단 해당 계약서에 “관련한 모든 합의는 서면으로 하여야 한다”는 등 구두 조건을 배제하는 조항이 있다면, C는 A에게 해당 구두 합의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C가 해당 구두 합의가 있었음을 인정하지 아니할 경우, 구두 합의가 있었다는 점의 입증은 이를 주장하는 A가 하여야 하고 이에 대한 입증을 하지 못할 경우 구두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반대로 A와 C의 계약서에 구두 합의를 배제하는 조항이 없고 C가 해당 구두 합의의 존재 여부를 다투지 않는 경우라면, 구두 합의의 내용은 일응 계약 조건으로 인정된다.
A와 C의 계약서에 구두 합의를 배제하는 조항이 없고 C가 해당 구두 합의의 존재 여부를 다투지 않아 구두 합의의 내용이 계약으로 인정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계약당사자가 어떠한 권리를 취득하고 의무를 부담할 것인지 등의 내용을 정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당사자의 자유이고, 이러한 당사자 사이의 약정은 법령의 임의규정보다 우선하게 된다. 따라서 계약체결 전에는 예상 가능한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조건을 결정하여야 한다.
다만 이러한 계약 자유의 원칙에도 법률적인 제한은 존재한다. 민법은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와 당사자의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는 당사자 간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무효로 보고 있으며, 근로기준법 등 개별 법령에도 사회질서 유지를 위하여 당사자의 의사에 의하여 그 적용을 배제할 수 없도록 한 규정들이 있다.
사례에서 (i) C의 저작인격권을 포기할 것, (ii) 해당 공연기간은 물론 공연을 녹화한 영상을 배급, 유통하는 기간동안 C가 타 방송이나 타 공연에 출연하지 않을 것, 그리고 (iii) 이를 위반할 경우 이미 지급한 저작권료와 출연료의 10배를 배상할 것 모두 반사회질서의 법률행위로서 무효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저작인격권은 일신전속적 성격을 가지므로 처분할 수 없다. 따라서 저작인격권을 양도하거나 포기할 수 없으며, 이러한 조항은 인격적 법익침해에 관한 것으로서 사회질서에 반하여 무효가 된다. 또한 공연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타 방송이나 타 공연에 출연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게 하는 것은 C의 경제적인 자유와 이익을 과도하게 제한한 경우로 헌법상 보장된 직업선택의 자유와 근로권의 과도한 제한, 자유로운 경쟁을 지나치게 제한한 때에 해당하여 무효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손해배상의 위약벌이나 지체상금 등이 과다한 경우 허용되는 수준을 넘은 부분은 무효로 보고 있으며, 법원은 통상 계약금액의 3배액을 넘는 부분은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성적인 의무를 강제하는 경우, 계약기간, 이익분배, 계약 해제, 손해배상 등 중요한 조항이 일방 당사자에게 불공정한 경우에도 무효가 될 수 있다.
아울러 C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고 무용수로서 계약 체결 경험이 전무한 자로서, 거래 일반에 관한 경험 및 지식이 부족한 ‘무경험’의 상태에 있었다. 민법은 이러한 무경험이나 급박한 경제적 필요가 있는 경우,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결핍된 궁박 상태에 있는 경우로서 현저한 불균형이 있는 법률행위는 효력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례와 같이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고 관련된 사회생활 경험도 전무한 자가 법령상 양도가 추정되지 아니함에도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아니하고 저작재산권이나 저작인접권을 양도한 경우, 일방이 무경험 상태에 있고 급부 간의 현저한 불균형이 있는 때에 해당하여 무효가 될 것이다.
□ 계약서 작성 및 날인의 필요성
한편 계약 성립 및 효력 여부를 떠나서, 계약서와 날인은 추후 계약 성립과 그 내용에 있어 다툼이 있을 때 증명을 위하여 필요하다. 계약서의 날인도 진정한 것으로 추정되면 나아가 계약서의 진정도 추정되어 작성명의자를 위조함이 없이 그 명의자 본인의 의사에 기해 법률상의 행위가 그 문서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증명할 수 있다.
또한 계약당사자는 개별법에서 서면 계약을 의무로 하고 있는지 여부를 유의하여야 한다. 위 사례의 경우 A의 특정 공연의 완성을 위해 대가를 받고 제공되는 C의 노무는 예술인 복지법상 문화예술용역에 해당한다. 예술인복지법에 따르면 문화예술용역과 관련하여 서면 계약을 의무로 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계약 금액, 계약 기간, 갱신, 변경 및 해지에 관한 사항 등을 명시해 서명 또는 기명날인한 계약서를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또한 문화예술기획업자 등은 서명 또는 기명날인한 문화예술용역 계약서를 3년간 보존하여야 한다. 사례에서 A는 위와 같은 예술인복지법에 따른 서면 작성 의무 및 보존 의무를 위반한 때에 해당할 수 있다.
다만 서면 작성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해당 조항은 강행규정은 아니어서 서면 계약을 하지 않더라도 계약의 성립이 인정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나, 문화예술기획업자가 문화예술용역 관련 서면계약을 하지 않거나 계약서를 3년간 보존하지 아니한 경우 예술인복지법에 따라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 대상이 되므로 유의하여야 한다.
결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두계약도 내용이 명확하다면 법률상 서면계약과 동일한 효력을 가질 수 있고 계약서의 존재와 날인은 계약의 효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또한 계약이 성립하지 아니하여도 계약교섭 과정 중 신의칙상 계약 체결에 대한 신뢰를 보호할 필요가 있을 경우 보호받을 수 있으며 강행규정에 위반하거나 불공정한 계약의 경우 무효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분쟁 예방과 대처를 위한다면 향후 발생할 문제 상황을 예상하고 신중하게 계약서를 작성하여 날인까지 마쳐 놓는 것이 필요하다.
이예희
디케이엘파트너스 법률사무소 변호사. 한국춤비평가협회 고문 변호사.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각각 연극과 문학을 전공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현재 문화, 예술, 엔터테인먼트 등 콘텐츠 IP와 관련된 분야에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