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추모기획_ 우봉(宇峰) 이매방
名舞 춤의 거목

우봉(宇峰) 이매방 선생이 8월 7일 오전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및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한국무용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자 은관문화훈장(2등급)을 추서했다. 영결식은 8월 9일 삼성서울병원에서 문화예술인장으로 치러졌으며, 선생의 유해는 8월 10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가족추모 공원에 안장되었다. <춤웹진>에서는 선생의 삶과 예술 등을 돌아보는 특별 추모기획을 마련했다. (편집자 주)



 





추모의 글 (1)

춤꾼은 모름지기 마음이 고와야 춤도 곱다


채상묵_한국전통춤협회 이사장


지난 7일 아침,
창밖으로 질주해가는 바람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의 영혼이 생의 저편으로 멀어져가는 소리였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위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듯이 기억되는 모든 것은 훌훌 털어버리고
섬광처럼 번득이는 영혼은 무한의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면 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위대한 예술가이자 춤꾼을 추억하며 애도하기 위해 사랑하고 존경했던 마음으로 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우봉 이매방 선생님은 7세 때 춤에 입문하여 15세 때 명창 임방울의 공연에서 첫 승무를 추시면서 고인의 예술적 토대를 마련하게 되시었으며, 평생을 춤과 함께 생활하시다가 안타깝게도 8월 7일 9시 6분경에 저희들 곁을 훌훌히 떠나셨습니다.
 고인의 춤세계는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승무와,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시었고, 27년생이시며 중요무형문화재 27호와 97호로 당신은 7이라는 숫자와 인연이 많으시다고 평소에도 말씀하시면서 한국 전통춤의 역사상 영원히 빛날 업적을 남기시며 저희 제자들을 양성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약력과 업적은 앞에서 양종승 박사가 말하여 아시다시피 우리 춤 역사에 큰 거목으로서 호남의 이매방류라는 획을 그어 놓으셨고, 후학들의 수많은 연구논문을 통해 입증되듯이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전통춤의 움직임을 체계적으로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매방 춤에는 재주가 보이고, 기술이 보이고, 예술이 보이고, 마침내는 마음이 보인다’라고 한 어느 이론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춤꾼은 모름지기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라고 항상 제자들에게 강조하시며, 춤꾼 자신의 수양 즉, 수기(修己)를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동양의 인격론과 무관하지 않으며, 결과가 아닌 과정이 중요하다는 예도(藝道)의 중요성을 일깨우려함이었을 것이라고 저희는 되새기며 제 개인적인 생각도 해 봅니다.
 이제 생존의 모습을 뵐 수는 없지만, 예술에 대한 숭고한 정신은 여러분들과 저희 제자들 곁에 영원히 함께 빛나며 기억으로 자리 매김 할 것이며, 저 세상에서도 名舞로서 훨훨 춤추시며 평안하시기를 저희 제자들은 기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부디 편안하게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영원하십시요!

 

* 이 글은 10월 9일 영결식에서 제자 대표로 발표한 추도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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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2)


새벽 미싱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지만---

 


백경우_이매방의 제자


이젠 선생님께서 미싱 돌리시는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의상, 연습복, 집안의 커튼, 당신의 이부자리 등을 만드시겠다고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셔서 돌리시던 미싱 소리.
지금은 무거운 침묵만이 이 집안을 가득히 감싸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필요하시면 부르시던 저의 이름.
단지 옆에 있던 것도 갔다달라고 하시던 선생님의 목소리.
편찮으신 이후에는 이른 새벽에 사과주스와 물을 달라고 부르시던 그 목소리를 지금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고 싶은 건 하고 마시는 고집 센 아이 같던 선생님.
언제나 밥솥 한 가득 밥을 해야 뿌듯해 하시던 할머니 같던 선생님.
차를 타고 갈 때면 초콜렛을 까서 주시던 자상한 엄마와 같던 선생님.
어디 가실 때면 이 옷이 어울리는지 저 옷이 어울리는지 물어보시던 멋쟁이 선생님.
그리곤 향수를 잔뜩 뿌리시고선 출타하시던 귀여우신 나의 선생님.
이젠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선생님!
그립습니다.
아침이면 미싱 돌리는 그 소리가 그립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선생님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이제 그 어느 곳에서도 선생님의 모습과 소리를 들을 수 없어 가슴이 먹먹하기만 합니다.

선생님!
비록 이 세상 인연은 다 되었지만 제 마음 속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가슴 속 깊이 고이 담아 선생님의 뜻을 받들며 살아가려 합니다.
선생님께서 평생 힘들게 걸어오신 그 길을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뒤따라 걸어가려 합니다.
선생님!
나의 선생님!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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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3)


새벽 2시에 걸려 온 전화

 


장광열_춤비평가


 10년도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다. 잠자리에 든 지 한참 지난 시간 같은데--- 따르릉 벨 소리에 잠이 덜 깬 상태로 받은 수화기 너머로 “야 너 이XX야 어떻게 나에게 그런 글을 쓸 수 있는가 XX ~~".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뭐야 XX 내가 전통춤을 망치고 있다고~~ XX"
 금방 사태를 알아차리고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긴 했지만 글의 내용을 보지 못한 채 누군가로부터 잘못된 얘기만을 들은 것 같은 선생의 화를 당장에 잠재울 수는 없었다.

 




 “승무와 살풀이춤이 우리춤을 망친다고?”

 

 발단은 “승무와 살풀이춤이 우리춤을 망치고 있다”는 제하의 글이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발간하는 신문에 실린 이 글은 편집진에게 제목을 교체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내가 집필한 글이다.
 이 글은 <진주검무> <승전무> <동래학춤> 등 우리나라에는 다른 빼어난 민속춤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해외공연의 대부분을 <승무>와 <살풀이춤><태평무> 등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홀춤 만을 내보내고 있는 현실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다. 이들 세 종목의 춤들만이 대학의 무용과에서 교육되어지고, 콩쿨 종목으로 지정되고, 강습회 등을 통해 보급되고 있는 우리나라 전통무용계의 현실, 지나치게 편중된 전통춤의 전승과 보급에 대한 정책의 문제점을 함께 지적한 것이었다.
 유일하게 <승무>와 <살풀이춤> 두 종목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우봉 선생이나 그 문하생들이 글의 내용을 다 읽지 않고 “승무와 살풀이춤이 우리춤을 망치고 있다”는 제목만 본다면 우봉 선생을 지칭한 것이라고 오해할 만한 소지가 있었다.
 1990년 전후로 필자가 <객석>의 무용전문 기자로 활동할 당시 선생의 주변은 온갖 흥미로운 일로 가득했다. “누가 가장 욕 잘하는 예인일까?” 하는 질문을 받고 자신있게 “이매방 선생님”이라고 대답하면 “틀렸다”는 답이 돌아 왔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하는 광고 멘트와 함께 등장했던 박동진 명창이 1위이고 2위가 우봉 선생이란다. 박동진 명창의 욕설을 들어보지 못한 기자에게 우봉 선생보다 더 심하다면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감이 잘 오질 않았다.
 문화부를 출입할 때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던 사무관에 대한 기억도 있다.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어령 장관이 몇몇 원로 선생들과 함께 자리한 오찬장에 초대된 우봉 선생의 걸쭉한 욕설에 “장관님 앞에서 어떻게 저런 욕을 해대는가” 하며 안절부절 하던 문화부 공무원들은 으레 선생의 욕설에 익숙했던 이어령 장관의 아무렇지도 않아 하던 그 태도에 더욱 질겁을 했다는 것이다.
 청계천에서 기생들에게 포르노 필름을 보여주던 기억을 떠올리며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묘사하며 박장대소하시던 선생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선생은 장단도 모르는 무용수들, 수련은 게을리 하면서 이수자 자격증만 탐을 내는 제자들을 나무라셨다. 제대로 춤도 못 추면서 대학교수라는 이유로 학생들에게 자신의 춤을 가르치는 제자들에 대해 분개하셨고, 춤 장단도 제대로 모르면서 돈만 밝히는 악사들에 대해서도 개탄을 하셨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란 명예 앞에서는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는 선생과 관련해 필자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일이다.
 취재를 위한 인터뷰에서, 그리고 공연 무대와 춤추는 현장에서 선생은 언제나 춤에 관한한 정성을 다하는 도도한 예술가였다. 손수 자신의 무복을 바느질해 입으셨던 예인. 춤에 관한한 철저하리만치 수신(修身)한 이 예인은, 어쩌면 무형문화재란 기형적인 제도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보유자 •이수자• 전수자를 둘러싼 수많은 일들이 한 예인의 고고한 예술 세계를 더럽혔다.
 선생은 이제 그런 추한 것들이 사라진 하늘나라에서는 고고한 그 춤들을 원 없이 추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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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기획 우봉 이매방_ 남긴 작품들


20세기 후반 전통춤의 흐름 투영

 


김영희_ 전통춤연구가


 우봉 이매방(1927~2015) 선생이 찬란했던 춤의 무대를 접으시고 영면하셨다. 어린 시절 목포권번을 시작으로 30대까지 광주, 부산, 서울, 군산 등을 거치며 수련과 예술적 번민의 과정을 거치다가, 50세 무렵(1970년대 후반) 무용학자 고 정병호 선생에 의해 서울의 중앙 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춤의 나래를 훨훨 펼치기 시작했다. 1987년에 무형문화재 27호인 <승무>, 1990년에 무형문화재 97호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셨고, 다수의 전통춤들을 남기셨다.

 



 이 전통춤 레퍼토리들은 선생님이 살아생전 추셨고 다듬어 제자들에 의해 추어지고 있다. 이는 이매방 개인의 예술적 성과이면서, 또한 20세기 한국 전통춤의 일면인 셈이다. 그리고 청년기에 추셨던 신무용 작품들까지 돌아보면, 이매방 선생의 춤 속에는 20세기 후반 전통춤의 흐름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이매방 선생은 한국전쟁 끝 무렵 부산에 있었다. 부산은 전쟁의 화마에서 벗어나있었고, 내노라하는 전통춤꾼들이 모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어린 시절 기생에게 배운 승무와 검무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전쟁의 와중이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춤판은 자주 벌어지지 않았다. 춤계의 시류가 전통춤보다 신무용 등의 신흥무용에 쏠려있었기 때문에 전통춤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정확한 연대를 표기하지 않은 채 이매방 선생의 30대의 사진으로 남아있는 <초립동><장고춤><장검무><화랑도><박쥐춤> 등은 전통춤꾼 이매방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빨간 패랭이를 쓰고 손으로 턱을 궤고 귀여운 표정으로 추는 <초립동>이나, 여장을 하거나 바지저고리에 조끼 차림으로 추는 <장고춤>은 영락없는 신무용 스타일이다. <장검무>는 만주 대련 정포소학교 시절 매란방의 제자에게 배웠다는 중국의 장검무를 기억하고 선생이 안무한 춤이다. 중국풍(中國風)의 여장으로 포즈를 잡았다. <화랑도>는 장화를 신은 의상에 칼과 활을 소품으로 용맹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또 <박쥐춤>은 박쥐의 날개처럼 소매를 넓게 한 검은 의상을 입고 맨발로 춘 창작춤이다. 1950, 60년대 신무용이 휩쓸던 시기이기에 이매방 선생도 비껴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1967년에 무용극 <꽃신 짚신>을, 1976년에 <신검(神劍)>을 발표했다. ‘이매방 창작무용공연’이란 타이틀로 부산시민회관에 올려진 공연은 1부에 전통춤 레파토리, 2부에 창작품 <신검>으로 구성되었다. 이 작품은 무가(巫歌)로 불려지는 바리대기공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작품화했으니, 전통춤 계열이면서 무용극을 발표했던 강선영 선생의 행보와 유사하다. 춤계에서 위상을 갖지 못하던 전통춤이 신무용에 떠밀리던 현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무형문화재 제도가 시행되면서 진주검무(1967년 지정) 승무(1969), 학무(1971), 처용무(1971)가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0년대 무용학 민속학 등 학자들의 전통 공연예술 발굴이 활발해지며 전통춤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7년 정병호 선생이 회장이었던 한국전통무용연구회의 발표회(YWCA강당)에서 이매방의 승무가 만천하에 드러나며 그 가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삼현승무>라는 제목으로 추어진 춤에 대해 이매방 선생은 “승무 중에서도 북가락의 기교가 특이한 점이 호남의 삼현승무입니다. 나는 삼현승무의 심오한 정신을 이어받아 반생을 애껴 다듬어왔습니다.”라고 했다. 이 춤은 당시 한영숙 선생의 경기 충청지방의 승무와는 다른 스타일로 많은 호평을 받았고, 이매방의 춤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매방 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듬해 1978년 ‘공간사 창립 12주년 공연’에서 선생은 <살풀이춤>을 공개한 후 1982년 서울시립무용단의 ‘한국명무전’에서도 살풀이춤을 추었다. 이즈음 살풀이춤은 승무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이었으니, 이매방 선생은 이렇게 승무와 살풀이춤으로 중심을 세운 후 당신의 춤을 레파토리화하였다. 1984년의 ‘북소리’ 공연에서 승무와 살풀이춤 외에 <육자배기> <사랑가><한량무><호남검무><보렴승무><북소리>를 선보였다. <육자배기>는 이후에 <입춤>이 되었고, 진유림과 임이조가 춘 <사랑가>는 판소리 춘향가 중 한 대목을 작품화한 춤이다. <한량무>는 무용극으로 한량에 김진홍, 기생에 한순서, 승려에 임이조, 주모에 김옥진이 등장하여 추었다. 진주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진주한량무의 틀을 따르고 있다. <보렴승무>는 보시염불(菩施念佛)의 약자인 보렴(菩念)을 모티브로 한 승무이다. 예전에 사당패가 입창을 할 때는 관염불을 불러 축원을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 관염불 대목의 음악을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이매방 선생이 흑장삼을, 군무가 흰 장삼을 입고 추었는데, 차후 공연에서 승려의 복식으로 바뀌었다. <북소리>는 <오고무>를 군무로 춘 춤이다. 이후 1985년의 ‘북소리 II’과 1990년의 ‘북소리 III’에서 <회상><장고춤><장검무>도 선보였다.

 



 이 레퍼토리 중에는 독자적으로 창작한 춤도 있지만, 당시 유행한 춤들을 이매방 선생이 재안무한 춤도 있다. 이 시기에 이매방 선생은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었으며, 살풀이춤과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후 1999년 ‘이매방 춤인생 65년 기념공연’에서 <승무><대감놀이><입춤><화랑도> <기원무><검무><장고춤><살풀이춤><장검무><사풍정감><태평무><보렴무><풍물놀이><북소리>의 14종목이 무대를 채웠다. <대감놀이>는 무당춤 계열의 춤이고, <사풍정감>은 한량무 계열의 춤이며, <태평무>는 신무용 종목인 화관무나 한영숙•강선영이 추는 태평무 계열의 춤이다. 이 춤들을 두텁게 양성한 제자들이 풍성하게 춤추었다. 이 작품들은 작년까지 올려진 이매방 선생의 공연에서 고정된 레파토리들이며, 이매방 선생의 춤 인생에서 끝까지 함께 한 춤들이며 예술적 결실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이매방 선생이 30대 청년시절부터 노년까지 추었던 작품들을 살펴보면, 전통춤을 근간으로 다양한 스타일들을 볼 수 있다. 승무, 검무, 살풀이춤과 같이 전통춤의 올곧은 뿌리를 갖는 춤도 있지만, 전통공연예술의 모티브들을 토대로 무대화시키거나, 다른 무용가들에게 영향을 받아 재구성한 춤들도 있다. 또한 신무용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춤도 있으며, 젊은 시절에는 모던댄스 계열의 창작춤도 추었다. 모두 20세기 후반 전통춤의 토대와 전통춤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추어졌으며, 전통춤을 둘러싸고 있는 전체 춤의 환경에서 추어졌다. 이매방 선생의 춤은 시대를 대표하지 않을 수 없으며, 20세기 후반을 통과한 전통춤을 대변한다고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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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기획 우봉 이매방_ 삶과 예술


춤생애와 무용사적 의의

 


이병옥_용인대학교 무용과 명예교수




 1. 들어가는 말

 

 ‘하늘이 내린 춤꾼’,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하는 전통춤꾼’이라 칭송되는 이매방(李梅芳)이기에 더더욱 이 시대의 국무로 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2015년 8월 7일 88세로 영면하였다. 필자가 볼 때 한국 전통춤을 오늘날처럼 곱게 다듬고 정립한 전통무용가는 한국무용사에서도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명창 중에서도 뛰어난 명창을 ‘국창’이라고 하는 만큼, 명무 중에서도 빼어난 명무를 ‘국무(國舞)’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이매방을 국무로 칭하고 인정하게 될 만큼 춤꾼으로 만든 요인들이 무엇이었을까 살펴보기로 한다.
 이매방은 1927년 5월 5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7세 되던 해에 목포 권번(券番)의 권번장 함국향의 눈에 들어 춤 학습을 받았고,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검무 그리고 고법을 가르쳤던 이대조(李大組) 명인으로부터 춤과 북놀이 사습을 8년 동안 받았으며, 주로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었던 권번에서도 유일하게 남자 학습생으로 들어가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전수받았다.
 오늘날 이매방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된 것도 그의 외길 춤인생에서 갈고 닦아진 예술적 가치와 전통적 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2. 이매방의 춤생애

 


 1) 입문기(入門期, 1930년대)-목포권번과 만주대련의 소년시절

 이매방은 1927년 음력 3월 7일(호적상 1927년 5월5일)에 전라남도 목포시 대성동 186번지에서 부친 이경식(李敬植)과 모친 조병림(曺炳林) 사이에서 3남2녀의 막내둥이로 태어났다.
 이매방은 태몽과 관련 독특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모친 조씨는 이매방을 낳기 전 태몽에서 모친이 밭에서 호미질을 하는데 동그란 불덩이가 굴러와 치마폭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 명무로서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예고한 것이었다.
 이매방은 세 살적부터 끼가 발산된 천생의 춤꾼이다. 어려서부터 계집애들 같이 누님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매만지며 경대 앞에서 춤추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매방은 여자 같은 행동을 보고 부모형제들은 미쳤다고 야단법석이면서도 그가 철이 안 들어 그런 것일 거라고 지나치곤 하였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 전인 7세(1934년)가 되던 해 옆집에 세 들어 살던 조도 출신 목포권번의 권번장 함국향(咸菊香)씨가 그의 춤추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춤 학습을 권유하였다.
 한편 이매방의 할아버지벌격인 이대조(李大祚, 김금옥에게서 춤사사)씨는 호남일대에서 명성이 높았던 춤의 명인으로써 승무와 북놀이에 탁월한 예인이었다. 이매방의 할아버지이면서 스승이었던 이대조 명인은 목포 권번(卷番)에서 승무와 북놀이, 검무 그리고 고법(鼓法)을 가르쳤던 권번 선생이었다. 당시 목포에는 포배당이라는 절마당 앞에 드럼통을 이삼십개 깔고 판자를 올려 가설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하였다. 이때 이대조(1870년초~1950년대, 북반주)와 한성준(1874~1941, 장구반주)이 서로 잘 아는 친구사이로 공연에서 이동백, 이화중선 등의 반주를 맡았다. 절에서의 공연은 조선시대 굿중패, 절걸립패, 사당패들의 근거지이며, 공연장이 절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러한 연희문화 현상은 지속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매방은 함국향씨가 소개한 목포권번에 입문하게 된다. 이매방이 목포 권번에 입문하여 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학습도 함께 시작하였으나 판소리는 그의 목청이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청이 터지질 않아서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렇게 시작된 이매방의 춤과 북놀이 학습은 8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여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권번에서 유일하게 남자 학습 생이 들어가자 주위 선배들과 동기들은 귀염과 사랑을 듬뿍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호남 권번에서 다양한 춤을 익힌 이매방은 유년시절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중국 대련에서 운수회사를 운영하던 큰 형님에게 가서 약 5년간을 지내게 되면서 대련 정포소학교(1935~1939)를 다니면서 그는 매란방, 배구자 등을 만난다. 그리고 12세 무렵 대련에서 우연한 기회에 신무용의 대가인 배구자 무용공연에 출연하게 된다. 또 북경에 있던 큰 누나의 연결로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 매란방(梅蘭芳)과 조우한다. 매란방의 공연을 접하고 이국적인 향취에 매료되어 그에게 <장검무>, <등불춤>, <꿩털춤> 등을 배운다. 공연 때마다 무대에 오르는 이매방의 장검무는 그때 매란방에게 배운 장검무의 기법을 토대로 창작된 춤이다. 6. 25 이후에는 본명 이규태를 버리고 매방(梅芳)이라는 예명을 지어 사용하게 되는데, 매란방에게서 배우고 느낀 예술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대련정포소학교 5학년 때(1939년) 말도 잘 안통하고 해서 고향 목포북교소학교에 전학하여 졸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춤에 정진하게 된다.


 2) 학습기(學習期, 1940년대)-역경 속에서 다져진 승무로 데뷔무대

 목포소학교를 졸업 후 이매방은 뜻에 없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로 마음에 없는 목포공립공업학교를 입학(1940년)하였다. 공업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항시 그의 마음에는 춤사위와 북놀이가 떠나질 않았었다. 원래 손재주가 있어 자신과 제자들이 입을 의상은 물론 공연에 필요한 무구(舞具) 소품들을 직접 바느질하거나 제작하였다. 성격이 섬세하고 꼼꼼하여서 바느질 솜씨가 일품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결벽성과 치밀한 성격으로 아무리 소소하고 간단한 것이라도 매사가 완벽하게 갖춰야 하는 성품이므로 그의 바느질 솜씨는 전문적인 한복 제작자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1942년(16세) 목포역전에다 쇠가래를 세워 그 위에 막을 치고 드럼통을 깔아 만든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밤낮 춤과 소리로 명인명창대회를 열고 공연을 했었다. 그런데 승무를 담당한 박봉선이 사정이 생겨 춤을 출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 목포 사는 신두옥도 놀음을 나가 없었고, 성산호주 역시 결혼을 하여 무대에 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임방울은 승무를 추어야할 사람이 갑자기 참석치 못하게 되자 함국향에게 승무를 대신해서 출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함국향선생은 마침 이매방의 춤이 무르익은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곧바로 이매방을 불러 임방울선생에게 소개하였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김연수의 장삼을 빌려 입고 무대에 나섰다. 피리에는 임세균, 거문고에는 한갑득, 설장고에는 전사업, 전이섭, 김오채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과 함께 한 무대였다. 이때 이매방은 승무를 춤추어 관객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첫 데뷔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해방 후로는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 1948년 임춘앵의 여성국극단에 삼고무를 가르쳐 여성국악인들의 공연을 도와주었으며, 그해 승무로 첫 데뷔했던 목포 역전에서 다시 임방울이 이끄는 명인명창발표회에 승무로 출연하였다.
 이처럼 1940년대는 본격적인 춤과 가락을 익히는 학습기였다. 그동안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는 방학 때 귀국하여 간간히 춤을 익혔지만 목포로 전학한 후로는 당내에 명성을 날렸던 박영구(화순 능주출신)선생에게 학습하기 위해 주말마다 광주를 오가면서 광주권번을 다녔다. 당시 박영구선생은 광주권번에서 승무와 북놀이를 가르치고 있던 권번선생이었다. 광주권번에서 박영구선생과 함께 춤선생으로 있던 이창조(장성출신)선생에게는 검무를 학습하였다.
 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며 박영구, 이창조, 그리고 이대조(무안출신) 선생에게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을 배웠다. 특히 이대조에게서 가장 많은 레퍼토리를 배웠으며 이대조의 북가락은 다양하고 가짓수가 많아 ‘천수북’이란 말이 전해졌다. 오늘날까지 이매방 북가락이 일품이라고 하는 것은 이대조로부터 전수받은 가락이다.


 3) 방랑기(放浪期, 1950년대)-6.25사변 군예대 활동-대구, 군산, 부산, 광주, 서울

 해방 후 진지하고 평화롭게 예인의 길에 정진하던 것도 잠시뿐 1950년 6.25사변이 터졌다. 북한군의 뒤를 따라 예술동맹 공연단들이 내려와 목포에서 인민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전황(본명 전두황, 전옥의 동생, 전미례의 부친), 최옥산, 임종옥, 한계만, 유선도, 이경팔, 박정호 등이 내려와 공연한 것을 이매방은 보게 되었다. 이때 전황은 <처녀총각>, 안성희는 <장검무> 등을 추었다. 그리고 이매방을 강제로 무용동맹에 가입시켜 무용활동을 시켰다. 당시 무용동행위원장에 차범석, 국악동맹위원장에 장월중선 등이었다. 무용동맹에서 춤을 가르치거나 공연을 하였고 또 국악동맹에 가서 안무도 해주며 지냈다. 안성희가 “규태동무 북조선으로 갑시다”하는 바람에 피신해 있었지만 수복 후 국군이 들어와 무용동맹에 강제로 가입했던 것에 곤욕을 치루었다. 가까스로 해명하고 국군 군예대(KAS)에 가입하여 1951년 대구 역전 태평로에 본부를 두어 활동했다. 그 때 군예대에는 황해(전영록 부친), 허장강(허준호 부친), 그리고 무용가 김진걸, 황무봉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군예대(종군연예인공연단) 일원(1951년)으로 활동하면서 지방순회공연을 다녔다. 또 광주에서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공작단을 맡아 단장으로 호남 일대를 돌며 순회공연을 한다.
 이렇게 지방순회공연을 하던 중 군산에서 연구소를 개설해주겠다는 유지들이 나타나 이매방이 24세(1951년)에는 잠시 군산으로 옮겨 군산시 영화동에다 이매방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2,3년간 활동을 하였다.
 그때부터 이 매방은 그가 직접 운영하는 연구소를 통하여 그의 춤과 북놀이를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할 때 춤을 배웠던 제자들로서는 박문자, 김옥순, 양향옥, 그리고 채영옥 등이 배웠다. 1953년에 문하생들을 데리고 광주에서 첫 발표회를 가진다.

 



 그 후 1953년 부산으로 내려가 장홍심이 운영하는 영도에 함께 연구소를 했지만 결별하였다. 부산에서의 제자는 김진홍, 성승민, 이도근 등이 있었다. 1954년 광주로 옮겨 남동 양조장 옆에 국악원을 개설하여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를 조교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쇼무대나 악극단 등 순수 무용활동 이외의 출연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하생들과 함께 광주에서 다시 이매방의 무용발표회(1955년, 광주극장)를 가졌다. 한편 서울에서는 올라와 창신동 신익희의 딸 신영균의 집에서 활동을 하였다. 이때 서울에서는 여성창극단, 삼성여성국악단(박옥진, 박보아, 조양금 3인)등에서 잠시 활동하다가 1955년 부산으로 내려가 초량동에 자리잡았다.
 그동안 부산에서 초량동, 범이동, 대신동 등지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1956년 대통령 입후보했던 신익희의 사망으로 인하여 서울연구소를 청산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산에서 첫 발표회를 대영극장(1957년)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때에도 어리지만 춤을 잘 추는 한순서의 역할이 켰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1959년 원각사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이매방의 공연작품으로 역시 <승무>와 <쌍검무>로 전통무용의 진수로 보여주며 춤기법이 매우 빼어났음을 표현하면서 전통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대적인 무대예술로 승화되면 좋겠다는 평을 하였다.
 당시의 이매방의 춤활동은 전국적으로 목포, 대구, 부산, 광주, 서울이었지만 주근거지는 사실상 부산이었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에 많은 예술인들이 체류하였었고 일부는 잔류하면서 예술의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이매방도 1950년대 중후반까지 부산에 중심을 두어 고전무용의 중심인물이었고 부산무용가협회 정회원이었으며, 1957년과 58년에 부산공연을 올렸으며 1960년대 말까지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


 4) 정립기(定立期, 1960년대)-다양한 춤 레퍼토리

 1960년대는 1950년대를 이어 많은 무대를 누비면서 점차 춤 레퍼토리를 확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선 이매방은 그의 선생에게서 배운 북놀이를 그가 혼자 활동하던 1948년 북3개를 놓고 추는 삼고무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창작하였지만 그 후 북5개를 놓고 치는 5고무, 7개를 놓고 치는 7고무 그리고 9고무와 11고무로 확대하였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연희되고 있는 삼고무의 원조는 이매방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초립동>, <화랑무>, <검무>, <장검무>, <박쥐춤>, <흥춤>, <무당춤>, <장고춤>, <학춤> 등을 정립하였고, 늘 추어온<승무>, <입춤>, <검무> 등과 함께 추었다. 그러한 이매방의 춤예술 정립은 그의 탁월한 예능적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까지도 이매방의 주 활동무대는 부산이었으나 점차 활동무대를 서울로 넓혀나간다. 그리하여 1967년 10월에는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창작무용 <꽃신 짚신>발표회를 가졌고, 1968년 8월에 일본 대판(大阪) 상은 창립 15주년기념제전(대판후생회관)에 초청되어 <승무>로 출연하였고, 이어서 제23회 광복절기념공연(일본동경 거류민단 본부 주최)에 <승무>를 추어 갈채를 받았다.

 



 5) 비상기(飛翔期, 1970년대)-전통춤의 예술성과 가치 인정

 1970년대 초까지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으나 이매방의 승무가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소를 서울로 옮겨 현재까지 서울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서울에서 한 때 1956년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 집에 신세지며 서울 창신동에다 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6.25직후에 주 활동무대였던 부산에서의 활동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매방은 <보렴승무>, <삼현승무>, <살풀이춤>, <검무>, <입춤>, <한량무>, <태평무>, <흥춤>, <장검무> 그리고 <장고춤> 등도 <승무>와 함께 끊임없이 연마하여 왔다.
 1970년대 초부터 이미 국악계에서는 이매방의 춤의 가치를 파악하고 많은 국악제전에 초청하여 출연하게 된다. 1970년부터 매년 부산에서 3.1절 기념 국악대제전에 <승무>공연, 1973년 4월 동래야류발표회에 <승무>초청공연, 그해 12월 전통예술감상회에는 <초립동>을 공연하였다. 1974년 5월 인간문화재 초청공연에 <승무>로 초청이 되었고 12월에 무용대공연에는 <화랑도>(전주삼남극장)로 출연하였다. 1975년 5월 강백천 대금산조발표회에 <승무>출연(부산민속예술관)하였고, 8월에는 이선옥 초청 신적무용발표회에 <사랑과 이별>을 안무하여 이선옥과 2인무로 출연(국립극장 소극장)하였다. 이선옥과의 콤비를 맞추게 되면서 그동안 함께해온 한순서는 자연히 독자적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6년 1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무용공연 <신검(바리공주)>를 부산시민회관에서 가졌다.
 이리하여 이매방 선생이 서울무용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중앙대 명예교수인 무용학자 정병호에 의해 1977년 7월30일 서울 YMCA에서 한국전통무용발표회에서 승무를 추면서부터이다. 전통무용연구회(회장 정병호)가 주최한 <이매방 승무 발표회>에서 삼현승무와 보렴승무를 추었고, 찬조로 김소희 국창의 판소리(고수 김득수)와 이선옥의 살풀이춤이 올려졌고, 악사에 지갑성, 전태용, 이생강, 김순봉, 오주환, 서용석, 김한국 등이 반주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병호 교수가 최초로 ‘승무의 미학’를 발제하였으며 안내장에는 김천흥의 축사가 기록되었다. 또한 이날 이매방 춤을 감상하고 조선일보 기사에 발표한 홍종인은 다음과 같은 평문을 남겼다.

“등골이 으쓱 들었다가 놓는 그 순간 그 깊은 한숨소리는 들은 바 없었으나 그 순간의 한숨은 하늘이 꺼지는 듯 깊은 느낌이었다..... 이씨의 춤이 각별하다는 점은 악곡이 지닌 장단과 가락 속에 섬세하고 대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온몸에 매듭과 힘줄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작동하고 있다는 그 기교를 훨씬 넘어서 그의 전신에 넘쳐 흐르는 예술적, 창조적 그리고 또 즉흥적인 감흥이 압도적이었다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홍종인, “이매방씨의 승무를 보고”, 『조선일보』(1977년 8월 3일자).

 홍종인의 평문은 사실상 이매방의 전통춤이 우리 무용계에 새로운 별이 등극했음을 시사는 글이다. 감상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춤,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춤, 심장박동을 자극하는 북가락, 섬세하고 고운 춤사위에 모두 감동을 받은 공연이었음을 암시해준다. 아울러 그때까지 한성준류의 한영숙 승무에 매료되었던 이들에게 새로운 유파의 승무가 있음을 지상을 통해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대에서의 성공은 이듬해 1978년 3월 세계민속예술제 한국대표로 프랑스 렌느시에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6) 만개기(滿開期, 1980년대)-<북소리> 시리즈와 승무 예능보유자 인정

 평생 춤의 길을 걸으면서 외길로만 살아온 이매방은 지난날의 춤생활을 돌이켜 보면 한과 정으로 가슴이 벅차다고 말한다. 이매방은 평생 동안 춤을 추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광대, 굿쟁이, 기생, 당골소리 등 별의별 말을 다 들으며 살아왔다. 거기에다 이매방의 성격이 직설적이고 입바른 소리를 잘 할 뿐 아니라 수틀리면 욕잘 하기로 유명한 그는 호랑이, 사자이빨, 따발총, 직사포, 욕보, 욕대장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한 면일 뿐이다. 이매방의 내면에는 그간 겪어온 진솔한 삶의 모습과 예술혼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래서 당시 이매방 춤의 진수를 처음 제대로 알아본 이는 당시 전통무용연구회장이던 중앙대 정병호 교수였다.

“이매방씨가 예술가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승무의 명무자라는 것과 오늘의 북틀춤을 탄생케 한 창조자로서의 장본인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씨의 승무에서 돋보이는 것은 하나는 그가 치는 북놀이이다. 그는 북놀이를 할 때 마치 한(恨)을 풀 듯이 신명나게 치고, 감정을 한곳으로 몰입시켜 주술경에 도달한 정도이다....이매방의 승무는 비단 춤사위의 멋 만이 아니라 북놀이에도 그 정수를 느낄 수가 있다. 그의 북놀이는 궁편과 각을 조화있게 타주(打柱)하는 가운데 많은 가락을 만들뿐만 아니라 그 기교는 무아경(無我境)에 이르는 신비스런 율동이다”.(정병호, “이매방의 승무”, 『전통문화』,1984년 5월호)

 이매방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무대공연을 주선하는 등 그가 문화재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민속학자 정병호는 그의 춤 중에서 승무를 으뜸으로 꼽는다. 승무에 있어 북틀의 창시자라는 점과 감정이입에 입각한 승무의 춤사위를 주술적 무아경에 이르게 하는 신비한 묘술로 풀어내면서 이매방을 최고의 춤꾼으로 극찬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도록 조사에 착수하여 이매방 승무의 가치와 미학을 연구하였다. 당시 정병호교수의 제자로 연구에 참여했던 필자도 함께 YMCA 이매방 승무발표회(1977년), 이매방전통무용의 밤(명동유네스코회관, 1981년)을 동참하였고, 이매방춤 마포연구소에 찾아가 면담하면서 특히 당시에 이미 승무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던 고 한영숙 승무와의 차별성과 승무의 미학과 지역적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 연구하였다.
 이매방 춤판 최고의 결정판 <북소리> 씨리즈의 시작이었다. 1984년 6월 이매방 무용인생 50주년 기념공연 <북소리>(문예회관 대극장)에 이어 1985년 6월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 Ⅱ>였다. 또한 전통예술의 보급과 선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결과로 정부로부터 옥관문화훈장(1984)과 성옥문화상 문예부문 대상(1995)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편 중요무형문화재 인정에서 보류된 이매방의 승무에 대해 사생활과 예술세계는 별개라는 당시 정병호 문화재위원의 일관되고 끈질긴 노력과 더 열정적으로 이매방 승무를 알리기 위해 1981년 유네스코 회관 공연을 주선하여 문화재위원들을 초청하여 이매방 승무의 예술적 가치와 지역성과 전통성을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1987년 7월1일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어 명실상부한 명무의 대열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1989년 일본무용예술제 참가와 국악대공연에 참가 등의 더욱 왕성한 공연활동을 펼치게 된다.


 7) 결실기(結實期)(1990년대)-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인정과 이매방 춤인생 60년

 1990년대의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에 이어 1990년 10월10일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아 전통춤의 최고 명인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수많은 한국무용가들이 이매방류 춤을 전수받기 위해 구름같이 모이게 된다.
 서울에 정착한 후 이매방은 창신동, 돈암동, 대현동, 운니동, 삼성동, 그리고 마포를 거쳐 지금의 양재동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무용연구소를 운영했었다. 그후 지금까지 무용연구소를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는데, 한국무용계를 대표하는 무용가들 대부분이 그의 춤을 전수받은 제자들이다. 하지만 춤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제자로 들이지 않는다. 새로 입문할 사람이 재능이 없어 보이거나 꾸준히 학습에 임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
 승무와 살풀이춤의 보유자로 인정되자 그의 많은 옛 제자들이 다시 찾아들기 시작하였고 새로이 입문한 문하생들이 그의 춤과 북놀이를 배우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90년의 활동은 ’90 북경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참가와 이매방 전통무용 <북소리Ⅲ>(호암아트홀)를 가진 후, 1991년 미국순회공연, 1992년 유럽순회공연을 마치고 1994년에 춤인생 60년을 정리하는 <북소리 Ⅳ>를 가진다. 이어서 1995년 광복50주년 민속종합예술제 출연과 1996년 인생70 고희기념공연, 1997년과 98년 일본공연을 가졌고,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1999년에 우봉 이매방 춤인생 65주년 기념 대공연을 가지면서 1990년대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였다.

 



 8) 국무기(國舞期, 2000년대)-외길인생 우봉 이매방 춤 70년

 격변기를 살아온 우리의 춤선구자 대부분이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왔듯이 명무 이매방의 삶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몇 년 전 이매방은 또 한 번의 고비를 맞았다. 2001년 갑작스럽게 발병한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야했다. 주위의 걱정과 안타까움 속에 위 대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 몸무게가 15kg 빠지는 등 체력이 급격하게 저하되어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매방은 작년 ‘우봉이매방팔순기념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직접 살풀이춤과 입춤을 추는 저력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오직 춤만을 생각하는 열정이 아니라면 감히 이루어 내지 못할 일이다.
 ‘우봉 이매방 춤 전수관’은 2005년 7월 목포문화예술회관 1층에 마련된 이매방의 살풀이와 승무를 전승하는 공간으로 이매방의 이수자들이 승무와 살풀이춤, 입춤, 삼고무 등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06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우봉이매방춤경연대회’는 이매방의 예술혼을 예향 목포 이미지로 연결시키기 위해 창립된 행사이다. 전통춤 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이매방의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3. 우봉 이매방 춤의 무용예술적 가치

 

 이매방의 춤에서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호남제 시나위 춤사위로 짜여져 있다. 그중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의 곱고 아름다운 사위와 자태를 자아내고 한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정중동의 몸놀림이 배어나온다.
 결국 이매방춤은 호남 지방의 권번에서 추어왔던 춤사위 기법이지만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본인 스스로의 속멋에서 우러나온 춤으로 발전된 것이기에 단순한 전수춤이 아니라 스승들의 춤을 뛰어넘어 본인의 혼을 담은 전통춤이었기에 아무도 넘겨볼 수 없는 국무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다. 이제 우봉 이매방이 왜 국무의 칭호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거론하고자 한다.
 첫째는 남자이면서도 여성보다도 더 곱고 섬세한 기방계통의 ‘춤바디’와 여성적 ‘춤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전승되는 한국 전통춤의 기법과 미학적 표현법을 볼 때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현하는 전통무용가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한국 전통춤의 역사상에서도 우봉 이매방 만큼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가하는 무용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왜 이처럼 아름다운 춤사위기법을 가지게 되었을까?
 몇 가지 추론되는 점이 있다. 하나는 어릴 적 처음 춤입문에서 고운춤만을 추는 기방에서 춤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당시 목포권번 함국향이라는 권번장이 이웃에 살아 그 집을 드나들면서 기방춤을 처음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자처럼 예쁜춤의 기본이 몸에 배여있어 이매방춤에는 기방예술의 전형적 아름다움을 담겨 있다. 그리하여 이매방이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여성들보다도 더 여성적인 기방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통소리꾼들에게는 유파별로 또는 계통별로 ‘소리바디’가 있듯이 이매방의 춤맵시에는 이미 기방계통춤의 고운 ‘춤바디’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아무리 아름답게 춘다고 해도 여성만큼 섬세하고 아름답게 추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한계성을 극복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이매방은 성의 정체성을 뛰어넘는 여성적 감수성이 정신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아무리 춤바디가 기방계적 표현력을 지녔다 해도 대개의 남자춤꾼들은 남성의 ‘춤속’이라는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의 춤사위와 표현법에는 여자보다 더 여성화된 ‘춤속’을 지니고 있다. 제아무리 성정체성이 뒤바뀐 남성춤꾼이라 해도 모두 춤속이 여성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뒤섞인 혼성춤속이거나 어설픈 여성춤속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매방은 완벽한 기방계 ‘춤바디’에다 가장 섬세한 내면적 정서의 여성보다 더 여성적인 ‘춤속’을 지닌 특별한 춤꾼이다.

 



 둘째, 호남지역의 명무들로부터 뼈대있는 전통춤을 다양하게 전수받아 호남춤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목포권번에서 호남기생에게 처음 춤을 사사한 이매방은 그후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전통무용가로 성장한다.
 맨 처음 정식으로 춤을 가르친 이는 이대조는 무안 출신으로 목포권번 사범으로 춤과 음악에 능통한 전통예인이며, 이매방에게 승무, 검무, 장고춤을 가르쳤다. 또한 옥과 출신인 신방초에게 육자배기, 화초사거리, 가곡, 검무, 승무 등을 익혔고, 10대 중반에는 광주권번에서 화순 출신 박영구 문하에서 승무와 북을 배웠고, 장성 출신 이창조에게 검무를 사사하기도 했으며, 춤과 기악에 능통한 이장선의 문하생이 되어 다양한 예능을 접하게 되었다. 스승 모두가 호남일대와 경향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궁중 어전 출입도 잦았던 당대 최고의 전통예인들이었다.
 이처럼 이매방은 목포권번과 광주권번을 오가면서 권범사범들인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의 제일가는 명무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승무, 승무북놀이, 검무, 입춤, 살풀이춤, 장고춤, 태평무, 한량무, 보렴승무, 흥춤, 장검무, 장고기법들과 다양한 춤가락을 익혀 호남춤의 특성과 미학을 정립한 전통성과 정체성을 보유한 명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간에 호남춤의 대를 이은 한진옥을 비롯한 몇몇의 호남춤의 명인들이 있었으나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고향에서만 활동하다 잊혀져 갔다. 그러나 이매방은 고향 목포에 머무르지 않고 부산, 군산, 광주 등지를 거쳐 한국예술의 중앙무대인 서울로 진출하여 호남춤의 예술성을 범한국춤으로 위상을 높였다.

 



 이매방 춤에서 전승되는 보석같이 소중한 호남제 춤사위는 실로 다양하다. 춤사위 용어상에 나타난 대표적인 춤사위 명칭은 대삼소삼(大杉小杉), 비정비팔(比丁比八), 양우선(兩雨線), 비디듬, 좌우걸이, 완자걸이, 잉어걸이, 지숫기 등이다.
 이매방이 춤을 가르칠 때 매번 강조하는 대삼소삼은 장단의 강약을 따라 춤사위도 강약으로 표현하는 춤기법으로 강과 약으로 반복하면서 조율하여 추는 방식으로 춤의 섬세한 리듬성과 변화성을 보여준다.
 또한 움직임의 기법 중 정중동 또는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는 양우선도 중요한 춤 특징으로 손짓과 발짓의 모든 동작은 양우선의 원리를 따른다. 가령 발은 뒤꿈치부터 앞꿈치로 옮겨지고, 팔은 엎으면 반드시 뒤집고, 뿌리가 내려오면 끝이 올라간다거나 끝이 쳐지면 뿌리가 올려지는 등의 자연스러운 기교와 원리가 연출된다.
 또한 보법에서 비정비팔(比丁比八)이라는 발디딤은 호남춤에서 내려오는 오랜 춤기법 중의 하나로, 발 딛는 자세가 한자의 정(丁)자 혹은 팔(八)자의 모양으로 딛는 독특한 형태의 보법이다. 오른발에 이어 왼발 끝으로 딛어 오른발 옆에 옮겨 딛고 제자리에서 무릎을 굽혔다고 펴는 형태의 섬세하고 정교한 발디딤은 이매방 춤의 몸가짐과 돋음새, 오금새, 디딤새로 이어지는 걸음걸이의 진수이다.
 셋째,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과 재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춤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이매방의 첫 스승 이대조는 그의 집안 할아버지벌이 된다. 즉 이매방의 집안은 스승이자 할아버지인 이대조 대(代)까지 대대로 무업(巫業)을 해온 무계의 혈통을 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세습되면서 천부적인 예능성을 이어받아 오게 된다. 대개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경우는 도중에 도태되지만 선천적 예능성을 지닌 유전인자를 지닌 예인들은 대를 이을수록 더 유명해진다.
 이매방의 천재성은 이미 어린 나이인 15세 때 증명되었다. 목포역전에서 임방울이 가설무대에서 명인명차대회를 열었는데 승무를 추기로 한 박봉선이 불참하여 대타자로 승무를 추었으나 관중들의 찬사가 뜨거웠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매방은 이 모든 스승들의 춤기량을 뛰어넘는 춤기법과 춤사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래서 천재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전승된 전국의 모든 류파와 계통의 전통춤 전승자와 명무들을 볼 때 이매방만큼 춤을 곱고 아름답게 구사하는 명무는 없었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현재의 한국전통춤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고 춤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이매방을 명무 중에서 명무인 국무로 호칭하는 것이다.
 넷째, 현대교육개념으로 볼 때 어린나이부터 춤의 조기영재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매방은 예닐곱 살부터 목포권번에서 예기들의 춤을 접하고 춤 배우기를 권유받아 이대조로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만주 대련 정포소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면 북경 매란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거나 목포로 돌아와 춤을 배웠다.
 이처럼 이매방은 어린 10대에 호남의 이름난 명인들 이대조, 신방초, 박영구, 이창조 등 호남지역의 명무자들의 가르침을 받아 악가무를 두루 섭렵하였다.

2015. 08.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