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집중기획_ 공공 무용단 운영, 무엇이 문제인가

국내 공공무용단은 왜 개인무용단이라 비판받는가?
- 공공 무용단 여론조사 이후(2)


김채현_춤비평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 갖는 위상에 비추어, 그리고 춤의 넌버벌적 속성에 힘입어 이제는 적어도 공공무용단만큼은 국내 차원을 넘어 세계무대에서 자웅을 겨룰 전략을 숙성시킬 때이다. 세계무대를 넘본다고 해서 국내에서의 공공성이 낮아지는 것도 아니다. 공공무용단에 대해 세계무대 전략을 권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공공무용단이 90년대까지의 어려움과 한계를 딛고서 기량을 쌓아 왔고 또 공간과 급여 등 인프라 면에서 국내 민간 단체들과는 비교가 안 될 월등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공공무용단이 그런 전략을 세우리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스럽다. 

 

 



 공공무용단 운영 실태 여론조사 결과는, 지난 기고문에서 밝혔듯이, 공공무용단이 핵심 예술 과제에서 본연의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춤계 여론을 전해주었다(공공무용단 운영실태 춤계 여론조사 결과와 진단, 김채현, 춤웹진 제69호 집중기획 포럼 발제문 모음 참조).  

 이미 소개된 대로, 그 여론은 “무용단의 예술 작품 및 레퍼토리를 만족스럽게 생각하십니까?” 문항에 대한 다음의 응답 결과에 집약되어 있다[응답 결과: ①매우 그렇다(전현직 단원 5명, 일반 무용인 1명) ②그렇다(19명, 5명) ③보통이다(32명, 35명) ④그렇지 않다(30명, 26명) ⑤매우 그렇지 않다(7명, 7명)(응답자 전체 규모: 전현직 단원 94명, 일반 무용인: 74명)].
 여기서 보통이다의 의미가 ‘그저 그렇다’ 또는 영어식으로 얼버무리듯 하는 ‘낫배드(not bad)’처럼 긍정적 평가를 유보하는 그 만큼 부정적 평가를 나타내기 때문에, 전현직 단원의 75.5%, 일반 무용인의 92%가 공공무용단의 작품 및 레퍼토리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점도 이미 언급되었다.
 공공무용단들이 지향해야 할 작품 및 레퍼토리의 경향이나 수준을 일률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춤 장르, 춤계 내의 위상, 경영 사정 등 구체적 환경이 단체들 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특히 작품 수준면에서 공공무용단들 사이에 편차가 심한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렇더라도, 전국의 전현직 단원들이 다수 참여한 여론조사 응답자들이 그러한 환경을 도외시하고 자기만의 주관적인 응답을 했을 리도 없고, 또 그랬으리라고 추측할 근거는 더욱 없다. 그러므로 여론조사 응답 전체 결과를 주어진 대로 수용하면서 진단하고 대안을 강구하는 게 타당하다.
 공연 예술 단체의 핵심 과제는 공연 예술 작품을 창작 생산하는 일로 집약된다. 위의 응답 결과에서 공공무용단의 무대 현장에서 작품 창작과 생산이 부실하다는 점이 재확인된다. 무용사적으로 볼 때, 지난 10년간 공공무용단들은 그 이전과는 달리 관객 확보 차원에서 그리고 공공성 실현 차원에서 관객 교육이나 예술적 인식 높이기, 찾아가기 공연 같은 부대(附帶)사업들을 적지 않게 수행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이런 유형의 부대사업은 일견 권장할 일이다. 지금은 어느 예술 장르에서나 공공 단체에 대해 이런 부대사업이 많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이에 힘입어 공공 무용단의 활동도 전에 비해 활발해 보일 것은 틀림없다. 그런 반면에, 현실적으로는 그 이상의 폐단도 엿보인다. 말하자면, 정작 해당 단체의 핵심 과제를 소홀히 하면서 이런 유형의 부대사업에 치중한다면 그야말로 주객을 뒤바꾸는 처사에 지나지 않는다. 핵심 과제 수행 역량이나 레퍼토리가 빈약한 탓에 부대사업에 기대어 공공의 평점을 높이려는 의도나 압력은 없(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공공무용단의 작품과 레퍼토리에 대해 무용단 안팎에서 불만족도가 매우 높다. 단적으로 말해, 공공무용단의 작품 창작과 레퍼토리 선정이 부실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공공무용단 내부에서부터 지적되고 있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공공무용단 전현직 단원들은 각자의 의견을 묻는 13번 주관식 문항(문항 주제: 무용단의 불만족스러운 점 또는 개선할 점 제안)에서 여러 의견들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 작품 창작과 레퍼토리 선정과 연관된 것으로서 대표적인 것들을 참고로 들어본다(“무용단마다 정체성을 가졌으면 한다, 국립, 국악원, 시립의 색깔을 갖고 그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 “단체의 정체성 문제가 가장 큼”, “무용단이 일률적인 성격을 갖는 데다 모든 무용단이 흡사하다”, “감독들 부임에 따라 그 목표가 다르게 나타난다, 단체의 목표가 정확히 있어야 한다”, “단체장 취향과 선호도에 따라 레퍼토리가 바뀜, 정체성 바뀌어 혼란, 단체만의 특성에 맞는 창작활동이 필요하다”, “단장, 극장장에 따라 변화가 많아 체계화가 필요하다, 예술감독 재임기간에 따라 변화가 극심하다”, “감독이 공공단체에서 하는 작품은 자기 것이 아니라 단체의 레퍼토리가 되어야 한다”, “개인 무용단으로 됨”, “공공무용단/민간예술단 정체성 구분이 확연하게 되어야 한다”, “감독 1인체제가 문제”). 이 주관식 문항을 일반 무용인들에게 물었어도 유사한 의견들이 나왔을 것 같다. 이 의견들은 공공무용단의 작품 활동 측면에서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오래 전부터 우리 춤계는 무용단의 작품 창작과 레퍼토리 선정을 예술감독의 전결(專決) 사항으로 여기는 관행을 지속해왔다. 이러한 관행은 장단점이 있으므로, 그 자체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것은 여기서 별 의미가 없다. 더욱이, 해외 공연단체가 예술 과제를 예술감독에 일임한 때문에 오히려 융성했던 경우들도 더러 알려져 있다. 그리고 국내 민간 무용단들이 그러한 관행을 쫓는다고 해도 여기서 상관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공공무용단의 작품과 레퍼토리에 대해 무용단 안팎에서 불만족도가 매우 높은 현실에서는 그 무엇보다 이 관행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공공무용단에서 작품 창작과 레퍼토리 선정 과정은 매우 불투명해 보인다. 혹시 있을 드문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우리 공공무용단에서 작품 창작과 레퍼토리 구성은 예술감독에게 일임(一任)되는 게 관행이다. 반면에, 예술감독이 자신에게 주어진 그러한 권한을 어떤 식으로 행사해서 작품 창작과 레퍼토리 선정 과정을 마무리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공공무용단들의 세세한 운영 규정을 살펴봐도 해당 단체의 작품 창작과 레퍼토리 선정 과정은 전혀 명문화(明文化)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지난번에 잠시 언급했듯이, 명시된 규정이 없는 상황에서는 공공무용단의 예술 과제를 예술감독이나 단체장 또는 일부 소수의 편의에 의해 주관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위에 소개된 전현직 단원들의 의견은 이러한 지적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1962년 국립무용단 창설 이래 근 반세기 동안, 아니면 1970년대 서울, 부산, 광주 등지에서 시립 무용단들이 창설되기 시작한 이래 근 40년 동안 공공무용단들은 예술감독(단장)에게 일임하는 관행을 다져왔었다. 유감스럽게도, 국내 공공무용단의 작품과 레퍼토리에 대해 무용단 안팎에서 불만족도가 매우 높은 현상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온 이 관행은 순기능보다는 오히려 역기능이 더 컸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의 여론조사에서는 그런 문제점이 실증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명문화된 규정이 부재한 상태에서 공공무용단이 예술 과제 추진과 관리를 예술감독에게 일임하는 관행은 궁극적으로는 지금과 같은 조사결과(불만족감)의 원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이 원인 즉 관행이 유발하는 부작용을 짚어보자.
 먼저, 각 공공무용단은 단체의 춤 장르가 구분되는 관행(일례로 국립무용단은 한국무용 단체, 국립발레단은 발레 단체 식으로) 이외에 해당 무용단이 어떤 예술 작품과 예술 활동을 지향하는지 목표가 분명치 않고 작품 개발 과정도 불투명하며 관련 명문 규정도 없는 것으로 안다. 이에 따라 예술감독의 역량(과 판단력)이 절대 중요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술감독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술감독의 역량에 따라 (창작 작업을 포함하여) 단체의 수준과 진로가 널뛰기할 가능성마저 커진다. 이는 그동안 드물지 않게 경험해온 바이기도 하다. 여론조사에서 단체의 정체성이 모호하거나 정체성 상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는 여기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현직 단원들도 지적하듯이, 공공무용단에도 다른 공공무용단과의 차별성 즉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이 중요하다. 전국에 25곳의 공공무용단이 있다면, 25가지의 정체성부터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작품과 공연 무대에서 그러한 차별성이 감지되지 않거나 점점 더 없어진다는 지적이 강하다. 공공무용단들이 정체성에서 유사하거나 동일하다면 궁극에는 통(폐)합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현실 속에서, 공공무용단들이 정체성을 회복하려면 어떤 방안이 필요할까? 

 

 



 거듭하는 말이지만, 공공무용단의 예술 작품 및 예술 활동에서 지향점이 분명치 않으며 작품 개발 과정도 불투명하고 해당 명문 규정도 없는 줄로 안다. 이번 여론조사 기간에 공공무용단에 운영 규정 등을 요청하고 더러 협조를 받았다. 공공무용단의 기본법이라 할 운영 규칙이나 운영 조례를 살펴봐도 단체의 지향점과 작품 개발 과정, 이들 두 사항에 대해 신통한 명문 규정이 발견되지 않는다. 설령 명문 규정이 있다고 해도 아주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어서 무용인들이 상식적으로 알거나 짐작하는 범위 안의 내용들이다.  

 현실적으로, 예술 작품 및 예술 활동에서 지향점과 작품 개발 과정이 분명치 않고 해당 명문 규정도 없는 상황에서 예술 과제 추진과 관리를 예술감독에 일임하기 마련일 테고 또 예술감독은 이를 자율적으로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예술감독의 역량에 따라 단체의 수준과 진로가 널뛰기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 것이다.
 역량있는 예술감독을 맞이하는 것이 공공무용단의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원칙이 되어야 한다. 어느 예술감독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만 할 것이다. 그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를 두고 예술감독만 탓한다면 어리석은 일이고 또 탓하기에는 너무 늦은 경우도 왕왕 있다. 예술 작품 및 예술 활동에서 지향점이 분명치 않고 해당 명문 규정도 없는 터에 예술감독을 선임하는 기준마저 애매모호한 것이 현실이다. 공공무용단 예술감독 선임에서 학력이나 경력 같은 객관적인 기준 이외에 그보다 훨씬 결정적인 예술적 역량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공공무용단의 예술적 지향점이 불분명하면서 명문 규정마저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예술감독 선임 과정에서 심사는 단순하면서도 심지어 부실하기까지 하다. 해당 공공무용단의 지향 목표와 예술감독 지원자의 역량 사이의 일치점 또는 상치점을 토론해서 적임자를 가려내는 심사는 퍽 드문 줄로 안다. 혹여 그런 토론 과정을 통해 예술감독 후보를 선발해도 그 다음의 (보이지 않는) 손(즉, 단체장 또는 외부 세력)에 의해 뒤집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대개들 입시나 고시가 엄중해야 한다고 한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입시나 고시와는 차원이 다르게 책임자를 선발해서 일국의 예술 향방에 끼치는 긍정적 아니면 부정적 영향이 막대할 것이 공공예술단의 예술감독 선임 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점에서, 공공무용단의 예술감독 선임 과정 또는 절차는 상당히 허술해 보인다. 게다가 공공무용단의 예술적 지향점이 불분명하고 그에 관한 명문 규정도 부재한데, 예술감독 선임을 위한 심사 과정에서 토론이 무엇을 토대로, 얼마나 이어지겠는가? 적임자인 예술감독을 만나는 것이 공공무용단에서는 일종의 행운인 것처럼 비쳐진다.
 유능한 예술감독을 만나면 물론 공공무용단의 어떤 현안들이 해결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공공무용단 외부에 있을 예술감독 후보자들 가운데 공공무용단의 예술 과제 추진과 관리를 제대로 해서 정체성을 세워주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술감독을 만나지 못할 가능성, 또 선임된 예술감독이 자율성의 관행을 내세워 자신의 춤 경향을 밀어붙일 가능성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공무용단에서는 예술감독을 선임하는 일 못지않게 이제는 공공무용단 자체의 지향점과 정체성을 외부에서도 수긍할 수 있는 명문 규정(또는 그와 유사한 것)부터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예술감독에 따라 그 목표가 달라진다”, “단체장 취향과 선호도에 따라 레퍼토리가 바뀐다”, “예술감독과 단체장에 따라 변화가 많아서 체계화가 필요하다”, “단체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 “예술감독이 공공무용단에서 하는 작품은 자기 것이 아니라 단체의 레퍼토리가 되어야 한다”, “개인 무용단으로 된다”는 공공무용단 내부의 지적들이 제기되었다. 해당 단체의 예술적 지향점과 작품 개발 과정이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예술 과제 추진과 관리를 예술감독에 일임하기 마련이므로, 예술감독의 개인적 경향이 주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부수적으로는, 단체 내에서 작품 개발 또는 예술에 관한 소통은 미미하거나 예술감독으로부터 단원 쪽으로 내려가는 하향 전달이 주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공공무용단이 일부 예술감독의 개인 무용단처럼 변질되거나 비판받을 소지는 공공무용단 내부에 이미 잠복해 있는 편이다.
 어느 공공무용단의 지향점과 정체성, 작품 개발 과정을 수긍하지 않을 사람은 해당 단체의 예술감독으로서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면, 해당 단체의 지향점과 정체성, 작품 개발 과정에 관한 명문화된 규정 같은 것이 없다면, 수긍한다 아니면 수긍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단서 또한 없는 셈이다. 물론, 어느 공공무용단의 예술감독 후보자가 단체의 지향점과 정체성, 작품 개발 과정을 수긍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기가 그것을 변경하겠다는 의지를 공식적으로 피력할 경우, 이를 심사 과정에서 토론 또는 논의에 부칠 수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그가 예술감독에 선임되어 자기 의지대로 한다면, 그것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이미 공인된 변경 작업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단체 내부에서 공감할 지향점과 정체성, 작품 개발 과정이 명료하지 않은 터에, 세계무대 전략은 고사하고 중장기 계획이나 국내와 지역 관객을 겨냥한 경영 전략마저 미미한 것이 오늘의 공공무용단의 현실 아닌가. 이런 상황에 비추어, 우리 공공무용단들이 직면한 최우선의 과제는 공공무용단의 공공성과 예술감독의 개인적 경향을 조화롭게 결합시키는 일이라 생각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해당 단체의 지향점과 정체성, 작품 개발 과정을 명문화하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런 명문 규정 없이 혹시 새로운 예술감독을 선임해서 단체의 변화 또는 혁신을 꾀하려는 발상은,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그다지 권할 바가 못 된다.  

 그러한 명문화 작업은 국내 다른 공공 공연단체에서도 잘 채택하지 않는 일일 것 같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명문화라고 해서 경직된 문면(文面)만 연상할 것은 아니다. 해당 명문을 단체의 운영 규정 속에 녹여 넣을 것인지 아니면 단체의 내규로 처리할 것인지, 여러 대안이 구상될 수 있다. 그리고 공청회를 통해 춤계 의견을 수렴하는 것도 권할 방법이다.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2015. 0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