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극장 객석은 거의 만원이었다. 첫날 공연은 더 많은 관객들이 찾았다고 극장 관계자가 귀띔했다. 대구시립무용단 제67회 공연 <코끼리를 보았다>(5월 27-28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는 안무가 홍승엽이 지난해 11월 새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신작이다.
<코끼리를 보았다>는 제목부터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공연은 1부 ‘코끼리를 아십니까?’, 2부 ‘코끼리를 보았다’로 짜여져 있다. 그럼에도 이 두 개 작품은 서로 별개인 듯 판이하게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코끼리를 아십니까?’가 다채로운 소품과 나레이션에, 극장의 스태프로 분한 출연자들이 직접 무대미술을 조립하고 표정연기를 곁들인 움직임과 댄서들이 객석으로 내려와 관객들과 함께 춤을 추는 구성 등 강렬한 비주얼과 볼거리를 담아냈다면, ‘코끼리를 보았다’는 남녀 여섯 커플, 12명의 무용수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의 조합과 변주, 곧 춤추기에 집중하고 있다.
40분 내외의 비슷한 길이의 작품에서 출연 무용수의 수(1부 25명, 2부 12명)에서 두 배 이상의 차이를 보인 것이나 1부와 2부 사이에 20분 동안의 인터미션을 설정한 안무자의 의도는 작품이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한 작품 안에 서로 다른 스타일의 춤을 배치해 관객들에게 컨템포러리댄스가 갖는 다양성과 해석에서의 확장성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는 공연 후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소리에서도 성공한 실험으로 자리매김 했다.
출연 무용수들이 보여준 집중력과 열정, 안무자와 오래 동안 제작 파트너로 활동해온 무대미술(엄진선), 음악감독(김태근), 무대감독(강희순)의 뛰어난 협업도 작품의 완성도에 힘을 보탰다.
1부 초반부에 등장하는 여성 나레이터의 완급과 고저가 있는 인성(人聲)은 드라마를 더하면서 그것 자체가 무용음악으로 기능, 관객들의 집중력을 높여주었다. 무용수들이 들고 움직일 때마다 형체가 변하는 플라스틱 튜브를 활용한 비주얼 효과(튜브의 곡선과 곧은 직선의 긴 장대가 만들어 내는 대비적인 공간감까지), 2부에서 보여준 홍승엽 특유의 음악과의 매치를 고려한, 상하체를 변주시키는 움직임 조합이 주는 안무자의 특별한 감각은 별미였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초대 예술감독을 지낸 안무가가 지역의 시립무용단으로 터를 옮겨 가진 창작 작업은 일단 성공했다. 작품의 예술적인 완성도에서, 혼신을 다해 무대 위에서 예술가로서 관객들과 소통하려는 단원들의 열기에서, 대구 지역의 지도급 무용가들과 문화예술 관계자들이 인터미션 때 상주극장의 극장장과 예술감독과 함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격려하는 모습에서도, 그런 진일보 된 직업 예술단체의 달라진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거장의 반열에 우뚝 선 안무가 피나 바우쉬는 독일의 작은 도시 부퍼탈 시립무용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후 댄서들과의 협업을 통해 우수한 작품을 만들고, 이를 레퍼토리로 유통시키면서 세계적인 무용단으로 성장시켰다. 이를 통해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 등 독일을 대표하는 대도시를 압도하는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어낸 것을 예술감독과 대구시립무용단 단원들에게 기대해 보는 것은 성급한 것일까?
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공 예술단의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담아낸 작품 제작, 단원들의 열정과 그런 예술적인 기량을 끄집어 내어 조합하고 움직임을 통한 앙상블을 만들어내는 안무력과 지도력이라면, 작품 제작을 위한 재정적인 뒷받침만 더 해 진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아 보인다.
홍승엽 예술감독은 오는 8월 일본의 문화수도 나가타에서 열리는 예술축제에 초청되었다며, 이날 2부에서 선보인 ‘코끼리를 보았다’를 그곳 축제에서 공연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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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코끼리를 보았다>
춤으로 그려낸 이성의 관념화 작업
권옥희_춤비평가
달랐다, 작품이. 무용수들의 몸(춤)도. 지금껏 봐오던 이들이 아니었다. 춤추는 몸과 눈빛에서 나른함이 걷혔다. 처음 호흡을 맞춘 예술감독과 단원들, 서로를 경험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낸 여정이 쉽지는 않았을 터. 하지만 이들은 프로다. 결과, 훈련된 근육(마음)으로 빚어낸 춤으로 무대는 빛났다.
불교 열반경에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우화가 있다. 우리들의 눈에서 시작된 것, 한 부분으로 전체를 상상하기, 말하기에 대한 경계. 말이 불러일으키기 마련인 대상의 견고한 성질에 비교할 때 말이란 거의 허무와 같은 것이다. 홍승엽은 그 허무와 마주한 채, 자기의 예술수단인 춤으로 대상의 본질에 대한 정의를 끌어낸다.
회색 매트를 뒤집어쓰고 무대를 기어 다니는 물체. 검정색 의상의 무용수들은 널빤지를 이어 붙여 무대 위에 흰색의 가벽을 세운 뒤, 가벽위에 코끼리 형상을 모자이크한다. 눈이 등에 달리고 몸통은 사자처럼 긴 코끼리, 낯설다. 무대를 어슬렁거리던 물체, 뒤집어쓰고 있던 가죽(매트)을 벗으니 흰색 슈트차림의 남자 무용수. 껍데기와는 다른 모습(내용)이다. 이 모든 작업과정을 마치 의식처럼 보여준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화두를 던지며 시작되는 춤. 시작행위가 절대행위가 되었다.
경쾌하고 밝은 음악, 남자무용수의 흰색 슈트, 여자무용수들의 짧은 상의와 튜튜. 군더더기 하나 없다. 서술되는 내용에 맞춘, 유머코드로 무장한 무용수의 마임. 내레이터는 공연을 감상하는 관객의 관람예절, 품격에 대해 말하며 매너 없는 관객을 “홍승엽 감독은 쥐어박아 주고 싶어 한다”는 대사에서 얼굴을 잠깐 내미는 홍승엽의 위트. 웃음이 극장의 공기를 안정되게 바꾼다. 위트는 마음의 균형추 같은 역할을 한다. 일관된 진지함은 불안정하다는 것을 홍승엽은 알고 있다(?).
코끼리를 찾아 나선 여행. 무용수들이 객석으로 내려와 관객들의 손을 잡아 끈 뒤 손을 맞잡아 안고 객석통로에 선 채 춤을 춘다. 각자 자신이 보고 싶었던 ‘코끼리’를 안고 있는 것. 느리게 추다가 멈춰 서고, 다시 춤을 추기를 반복. 그들이 안고 있는 코끼리는 허(虛)일 수도 도(道)일 수도, 혹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욕망일 수도. 아쉬운 눈빛으로 코끼리를 둔 채, 무대로 복귀. 검정색 안경을 쓰고, 지팡이로 무대바닥을 더듬더듬 두드리며 내레이터 퇴장.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본다는 것에 대한 역설을 가볍고 위트 있게 그려낸다. 섣부르게 가르치려 들지 않아 다행.
12명 남녀 군무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무용수들의 변화된 몸과 춤. 6명 여자무용수들의 손끝에 반응하는 6명 남자무용수들의 춤. 강렬한 작용. 코끼리의 울음소리 같은 음악에 변주되는 춤의 형태 변화. 머리에 책을 인 여자무용수가 직사각형의 6개 지점에 놓아 둔 6권의 책. 각자 보거나, 깔고 앉고 엎어 놓기도 하는 책. 책 속의 코끼리를 찾는 중?
직설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내러티브의 어조이지만 다소 복잡하여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플롯의 결합을 위트 있는 언어와 은유, 좋은 알레고리를 사용, 주의 깊고 친절하게 풀었다.
2막 ‘코끼리를 보았다’에서 본질을 찾아가는 사유의 그림을 홍승엽은 작정한 듯 춤으로 보여준다. 막이 오르면 사각 조명 안에 서로 엉켜있는 (무용수)덩어리. 만약 (복잡한)사유라는 것의 형태가 있다면 이런 그림이지 않을까, 싶었다.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몸의 배열, 근사했다. 무대 배경으로 서 있던 코끼리 그림. 널빤지 몇 조각을 뺀 뒤 재배열. 등에 달려있던 눈이 사라지고 허리께가 짧아지면서 예뻐진 코끼리. 11명 무용수의 춤은 파편화된 사유로 보인다. 바닥(껍데기)이 걷힌 뒤, 네모난 조명 안에 남은 5명의 무용수(본질). 이어서 사유의 씨앗을 품은, 무용수 한 명을 중심으로 군무진이 방사형으로 끝없이 움직이는 춤의 구도에 숨겨진 선명한 의식. 어지러이 마음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사유의 여정을, 감정을 벗어버린 치밀하게 계산된 움직임의 형태로 보여준다. 움직임의 설명 일단과 그 실현을 볼 수 있는 춤이었다.
홍승엽은 한 예술가의 내면에, 그 내면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보여진 것)과 함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들어있으며, 그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알려진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요한 질과 힘을 지니고 있다고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홍승엽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적용된다. 춤이 주는 몽상에 기대지 않고, 쓸데없는 춤의 언어는 차용하지 않으며, 춤의 기술에 경도되지 않는, 말하자면 주체의 타자성을 믿지 않는 것.
안무자에게 다소 낯선 느낌으로 시작되었을 (지방에서의)단장의 직무. 그 낯섦이, 직접적이고 분명한 그 느낌이 자신에게 보다 분명한 자기 응시를 위한 시간이 되었을 수도. 자신과 세계를 관찰한 것을 춤으로 그려내 놓은, 관객들의 자유로운 해석과 더불어 다음에 올 모든 가능성에 활짝 문을 열어 둔, 수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