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삶을 수놓다’라는 주제로 펼쳐진 제34회 MODAFE 5월 25일의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는 김남진의 〈EYE〉, 홍혜전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안무했다〉, 이주형의 〈소진된 인간〉이 공연되었다.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세 명의 아티스트를 억지로 묶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이들의 작품이 공교롭게도 ‘연극성’을 기반으로 하면서 교차하였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을 우연히 한 자리에서 관람한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 되었다.
작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우수작품으로 선정되어 같은 장소에서 실연되었던 댄스씨어터 창의 〈EYE〉는 안무가 김남진이 피터 쉐퍼의 희곡 〈에쿠우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눈’의 이미지를 반복하여 제시하고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서 고통 받는 영혼을 주인공으로 그렸다는 점을 빼면, 김남진의 〈EYE〉는 굳이 〈에쿠우스〉와 연결 지을 필요가 없는 다른 작품이다.
작년 말 창작산실 우수작품 실연에서는 마리오네트-어린 자아(안연주 역)- 주인공 소년(박재현 역),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세 개의 역할이 한 몸인 듯 뒤엉키거나 분리되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었다. 몸의 크기로는 가장 작은 마리오네트가 오히려 가장 늙은 얼굴을 가짐으로써, 마음의 조로증(早老症)을 앓는 소년의 공허한 심리상태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이번에는 초연 때의 고즈넉한 거문고 라이브 연주 대신 녹음을 사용하였고, 작품 앞부분 나신에 가까운 무용수의 독백과 같은 춤이 대폭 생략되면서 주인공 아이의 외로운 정서에 동참하기가 어려운 다소 거친 전개가 되었다. 초청 공연으로 올릴 때 축약하게 되면 고려할 점 중 하나는 안무가가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관객이 핵심으로 받아들이는 부분 간의 괴리가 예상보다 클 수 있다는 것이다. 대신 안무가가 소년의 두 자아가 결합되어 움직이는 동작들을 조금 더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신경을 쓴 흔적이 보였다.
홍댄스컴퍼니 대표 홍혜전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안무했다〉는 안무가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목격한, 강변에 나와 하루 종일 지칠 줄도 모르고 춤추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인상에 그간의 커뮤니티 댄스 활동이 더해져 만들어진 작품이다. 국내에 커뮤니티 댄스가 새로운 조류인 것처럼 수입되어 등장했지만 실은 원래 우리에게 춤으로 흥을 나누는 전통이 있었고 그것을 다시 떠올려보고 싶었다는 안무가의 지적은 귀담아 들을 부분이다.
이번 작품에는 홍은예술창작센터를 연고로 그녀와 여러 번 공동 작업을 진행해온 다페르튜토 스튜디오의 연출가 적극의 협력연출이 더해졌다. 홍혜전이 무대에 나와 가벼운 렉처 형식으로 작품의 취지를 설명한 다음 바로 춤으로 들어갔는데, 그 배경으로 녹음된 내레이션이 깔렸다. 또박또박 읊어나간 내레이션에는 춤추는 이가 받아들인 니체의 사상, 고난을 넘어 삶을 긍정하고 희구하는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사실 내레이션의 내용이 중요했다기보다는 그것이 홍혜전의 단단한 눈빛과 표정, 몸의 배면 쪽으로 무게중심을 안정적으로 실은 상태에서 몸의 앞을 열어 풀어내는 원숙하고 여유로운 춤의 가락과 함께 맞물려서 ‘사유하는 만큼 춤을 추어내고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모습을 완성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겠다. 즉흥의 분위기가 물씬 나는 자유로운 춤의 몰아침, 머리를 두드리거나 무언가를 퍼 올려서 몸 안에 에너지를 채우려는 것 같은 재미있는 동작 구성은 객석까지 들썩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안무가가 펼칠 시리즈 작업이 자못 기대된다.
앞선 두 중견 안무가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경력의 이주형은 〈소진된 인간〉을 통해, 도시의 부속품으로서 소비되다 사라지는 현대인의 풍경을 담아냈다. 안무가 본인 포함 9명의 남녀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서 각자의 영역에서, 혹은 서로를 넘나들며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노동에 가까운 춤을 춘다. 전선에 주렁주렁 매단 가방들, 그것을 짊어지고 무대를 가로질러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무용수의 모습은 삶을 영위해내기 위해 최소한으로 머물러야 할 노동이 어느덧 천형이 되어 인간을 압도해버린 세태를 풍자한다.
사무직원, 세일즈맨, 청소부, 수리공 등 다양한 직업군을 연상시키는 무용수들의 복장과 그들이 가볍게 대치하는 장면들 속에서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 남자와 여자 노동자 간의 갈등까지도 에둘러 담아내려한 안무가의 한 수를 읽을 수 있다. 마지막 시체처럼 널브러진 무용수들의 몸을 옮겨 산처럼 쌓고 그것을 배경으로 셀프카메라를 찍는 장면은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어가는 데에도 무감각해져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라는 점에서 섬뜩한 메시지를 날린다. 그 장면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뒤 놓인 책상 앞에서 등을 돌린 채 아마도 취업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은 젊은이의 모습은, 생활고에 찌들어 생명을 포기하는 이웃들에 대한 연민이나 갑으로 군림하는 자본에 대한 저항적인 사고를 가질 기회조차 없이(알더라도 눈과 귀를 닫아야 마음이 편하므로) 우선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20대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시원스럽게 터져 나오기는 하지만 미처 세련되게 다듬어지지 않은 연기나 춤 동작 등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20분여의 짧은 공연 시간 동안 주제 의식을 꿰어내기 위해 장면 구성에 꽤 많은 공을 들인 젊은 작가와 무용수들의 의욕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현실의 문제를 무대 위로 가져올 때 얼마나 함축적으로 임팩트 있게 전달하는가가 큰 과제인데 무용수들의 역할 배분, 소품과 시퀀스 구성 등에 고심한 흔적이 보였다.
무언의 언어를 재창조해야하는 작업의 난해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작가의식이 강한 안무가들의 작업에서는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연극의 힘을 빌려 오는 경우가 많다. 연극적인 장치는 무대로의 몰입을 쉽게 도와준다. 또, 춤을 방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적절하게 첨가되는 마임 연기와 약간의 대사는 생기를 불어 넣기도 한다. 현실을 효과적으로 압축하기 위해 일정한 극성(劇性)을 가져온 김남진과 이주형의 작품은 번다한 외부 세계를 차단하고 작가가 보여주는 한정된 것만 보도록 관객을 끌고 들어간다.
한편 전형적인 연극 형식을 탈피하는 작업을 추구해온 적극의 연출 색깔이 배어든 홍혜전의 작품은 겉으로는 관객과 무대 사이 어떤 경계도 없는 것처럼 열린 형태를 취했다. 그러나 ‘나 이러니까 춤을 추는데 너는 어떻게 할래? 같이 춤을 추고 싶지 않아?’라는 자신만의 분명한 주관을 내세워 완결시킨 춤은 관객도 자신만의 1인극을 창조할 수 있겠다는 꿈을 꾸게 했다.
‘춤, 삶을 수놓다’라는 이번 모다페의 주제를 곱씹어볼 때, 춤은 삶의 표피에 얹어져 언제라도 걷어낼 수 있는 장식으로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의식(衣食)이 있는 연후에라야 색(色)이라지만, 춤으로 먹고 사는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에게도 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필요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의 동력으로 자리매김해야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