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비평가의 무용수 인터뷰(2) 임진호
동양적인 움직임의 원리를 찾아보겠다

 


 




 임진호는 한동안 이름만 있고 모습은 보기 어려운 무용수였다. 2013년 Kore-A-Moves 유럽투어에 동참했을 때 임진호 안무의 〈I go〉가 공연되어 선풍적 인기를 끌었음에도 현장에서 임진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자신이 무용수로 참여하는 작품이었으나 그 자리는 다른 선배 무용수가 메우고 있었고 그 이후로도 이 작품은 임진호 없이 무용수들의 이런저런 변동 속에서 꿋꿋하게 공연되었다.  

 〈I go〉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게 2013년부터이고 그가 공익근무를 시작한 것도 같은 해이다 보니 그의 공백이 더욱 눈에 띤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공익근무 덕에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어서 그의 부재는 그야말로 유령의 숨소리처럼 가끔 들리기는 하나 존재하지 않는 궁금함 그 자체였다.
 집안의 업(業)을 돕다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I go〉는 한국전통 장례 중 시신을 수습하고 수의를 입히는 염습(殮襲)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소개하면서 이승을 작별하고 저승으로 넘어가는 죽음의 단면을 진지함과 작은 위트, 발랄함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충돌시키 거나 다층적으로 결합시킴으로서 애잔한 정서로 귀결시킨 수작으로 꼽는다.
 임진호와 지경민이 함께 만든 ‘고블린 파티’는 춤을 이어가는 방식이나 동작을 고안하는 방법이 상투적이지 않아 눈길을 끈다. 자신들만의 방식과 고집이 살아있기가 무용계의 여러 풍토 상 쉽지만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출현은 반갑기만 하다. 게다가 임진호는 공익근무를 마치고 드디어 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앞두고 있다. 얼마 전 단원인 전효인 안무의 〈Before Christ〉 공연에서 본 임진호는 특히 춤을 많이 추고 싶다는 의욕과 포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춤에 열정을 보였다. 


이지현 공익근무가 언제 끝났죠? 이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죠.
임진호 설 지나고 끝났으니까 2015년 3월에 소집해제 됐습니다.

어떠세요?
우선 아침에 늦잠 잘 수 있는 게 너무 행복합니다.

그런데 왜 공익근무로 가게 된 건가요?
어렸을 때 의료사고를 당했었습니다. 제가 5살 때 탈장 수술을 했는데 알고 보니 의사가 무면허였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다시 수술을 했음에도 자꾸 장이 빠져서 고생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 후 습관성 탈장 진단을 받고 공익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근무기간에도 저녁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어서 공연을 많이 했죠?
네. 시간을 맞출 수 있는 데로 맞춰서 가능하면 많이 하려고 했어요. 2년간 휴가가 30일인데 그 30일을 모두 해외공연에 쓴 것 같아요.

춤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춤은 언제부터 추기 시작했나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췄습니다. 아버지가 군인이셔서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정착해서 춤을 배운 곳이 충주입니다. 거기서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댄스 스포츠가 유행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너는 댄스 스포츠를 해야 한다면서 하라고 하셨죠. 당시에 워낙 공부도 안했고 놀기도 잘 놀고 그래서 그러셨던 것 같아요. 근데 당시 댄스 스포츠 학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용학원을 갔는데 거기서 선생님의 권유로 현대무용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본인이 이쪽으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았었나요?
몰랐습니다. 굉장히 소심했었고 무대에 서면 너무 떨고 그랬거든요. 어릴 때 치기어린 마음으로 남들에게 멋있게 보이고 싶어 추던 것과 전공으로 추는 것은 달랐어요. 사실 대학 들어와서부터는 침체기였습니다. 워낙 짧게 배우고 대학교를 간 거라 다른 친구들과 실력 차가 많이 났었습니다.

그럼 언제 변화가 오기 시작했나요?
제가 2006년 대학교 4학년 때 혼자 배낭을 메고 비엔나의 무용축제인 임풀스탄츠(ImpulsTanz)를 갔습니다. 거의 마지막이라는 심경으로 여기서 도전해보고 가능성이 없으면 군대 갔다 와서 제 2의 인생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갔었습니다. 근데 너무 좋았던 거죠. 내가 지금까지 무용을 잘못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용수로서의 삶은 그 때 부터라고 할 수 있죠. 2달 동안 여행겸 축제를 돌아보면서 뭔가 전환점을 찾기 위해서 처음으로 해외로 간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언어도 안되서 몸으로 이야기 했고요. 워크샵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정말 재미있었던 것은 공연이었습니다. 그 당시 충격적이었던 것이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의 〈D'avant〉라는 작품이었어요. 시디를 포함해 4명의 남자 무용수들이 함께 추었는데, 당시 제 기억으로는 미나유 교수님이 이 공연을 보시고 “향후 10년에서 20년 사이에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셨었어요. 마지막에 조명이 꺼지는데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 두 달 뒤 변화는?
모든 게 달라보였습니다. “제에게 춤 못 춘다, 기본이 없다” 라고 이야기 하는 분들이 계셨었는데 이러한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했고, 그 때부터 지경민이란 친구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보다 1살 어린데 제가 갔다 온 이야기를 하면서 세뇌를 시켰습니다.(웃음)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뭐라도 해야한다” 라고 했죠.
테크닉에 치중된 것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공연을 하자고 했죠. 사실 당시 이태상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시기가 맞았던 것 같아요. 저는 좋은 공연을 보고 와서 새로운 무언가가 하고 싶은데 그 때 이태상 선생님께서 조언을 해주시고 밤에는 경민이랑 같이 상의해서 작품을 만들면서 시작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졸업작품을 만들려고 시작을 했고, 그 뒤에 조금 더 커져서 당시 CJ영 페스티벌에 나가서 상을 받고 나름 데뷔 아닌 데뷔를 하게 된 것입니다. <원>이라는 작품이었고, 경민이랑 듀엣이었어요. 지금 와서 이 작품을 보면 당시 해외에서 보고 온 작품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 만들 때는 내 것이라고 만들었는데 후에 보니까 너무 모방 한 것 같아서 창피하더라고요.
그 뒤로도 계속 경민이랑 둘이 이것 저것 하다가 댄스시어터 온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홍승엽 선생님을 만나게 된거죠. 졸업 후 갈 때 없이 헤메다가 정착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또 당시 댄서스 잡마켓이 막 시작할 때여서 월급도 받으면서 1년 간 활동을 했습니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사실 그 동안 저한테 부족하다고 생각한 기본을 배웠습니다. 제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 때 홍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다음엔 무엇을 했나요?  

그리고 나서 장례식장 가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원을 가려고 했는데 무용단에 있으면서 학비 충당을 못하니까 일을 해야했죠. 대학원 다니면서 밤에는 일하고, 공연은 이태상 선생님 공연만 했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2년 가까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국립현대무용단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여러 작품에 출연하게 되고 해외 안무가 작품도 했었습니다. 그 때 정말 집중해서 했었고 작업 과정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I go〉를 수정했습니다.

〈I go〉 얘기를 해볼까요?
공식적으로는 2011년도 서울댄스컬렉션에서 선보인 작품이었고요. 하지만 〈I go〉로 2009년도에 아비뇽 오프에 다녀왔었습니다. 야외 길바닥에서 아직은 해가 남아 있는 시간이라 더위에 고생하며 공연해서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I go〉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고 그 이후 2011년 지금 모습과 비슷해졌죠.

아비뇽 오프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요?
당시 현지에서 도와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아는 분의 소개로 도움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를 시초로 창작활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올리고 보니까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많아서 국립현대무용단 활동을 하면서 대부분 수정을 했던 것입니다. 근데 막상 2013년 초에 〈I go〉로 첫 해외공연 투어를 가게 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에 저는 못갔습니다. 제가 2월에 입대를 했으니까요. 그때 저의 역할을 당시 최고라는 예효승이라는 무용수를 투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웃음) 

 

 



그럼 ‘고블린 파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 입니까?  

Kore-A-Moves 때문에 '고블린파티'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 뒤 제가 처음으로 〈I go〉로 해외 공연을 간 것이 2014년 1월 벨기에 공연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있다가 네덜란드에서 공연을 했고요. 다음 탄츠 메세가 있었고요.

해외 공연 당시 반응은 어땠었나요?
〈I go〉는 정말 오랫동안 끌고 온 작품입니다. 계속 해외 공연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저희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를 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나중에는 스트레스가 됐고요. 항상 공연 반응을 보면 “오 좋아, 근데 난 뭔지 잘 모르겠어” 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오기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모르겠으면 알게 해주겠다는 그런 오기요. 나름 풀이를 쉽게 하려고만 노력하고, 감동을 받게 하는 작품이 아닌 이해를 시키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처음 의도에서 멀어져 있더라고요. 재공연을 하게 되면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처음의도를 살려보고 싶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부딪쳤을 때 오는 두려움, 짓눌림의 감정을 담아내려던 작품이었는데 너무 많은 설명을 넣다보니 재미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I go〉가 가야하는 방향인 것 같습니다.

또 〈I go〉와 비슷한 소재로 <혼구녕>이란 작품이 있었지요?
사실 〈I go〉라는 작품은 이젠 잘 정리를 해서 제 안에 담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반면에 <혼구녕>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국립현대무용단 전통의 재발견 시리즈로 만들었었는데, 고칠 부분이 너무 많아서 지금의 상태는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사실 〈I go〉가 장례식장에서 일을 하면서 죽음을 바라본 관점이라면 <혼구녕>은 사후세계에서 인간세계를 보는 입장입니다.
제가 장례식장에서 일할 때 자살한 분들을 여럿 봤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이 세계를 쉽게 버리는 그들을 혼내주고 싶다는 생각에 만든 것이 <혼구녕>이였습니다. 있는지 조차 모르는 그런 쓸데없는 제3의 세계,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사람들에 대해서 화를 내는 작품입니다. 그깟 사후세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내가 그 사후세계로 가서 이 세계를 바라봐 주고 그들에게 자기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I go〉는 편하게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만들었던 작품이라면 <혼구녕>은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던 건데 쉽게 드러나지는 않더라고요. 

 

 



그렇게 설명을 듣고 보니 좀 새롭게 보이네요. 제대 후 올해 활동에 대한 계획이 많을텐데요.  

올해는 실험적인 것을 하려고 합니다. 요즘 영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큐멘터리 무용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다큐 댄스’ 취지는 경민이랑 저랑 리어카를 끌고 여행을 하면서 1~2주 정도 거기서 먹고 자고 영상을 기록하면서 일주를 하려고 합니다. 2009년 사실 〈I go〉를 아비뇽에서 할 때 거리에서의 경험이 강렬하게 남아있고 향수가 되어 그때의 거리로 다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다 얘기하면 재미없으니까 기대해 주세요.

임진호씨에게 춤은 무엇인가요?
춤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공연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벽에 부딪친 것 같았습니다. 그게 따지고 보면 춤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서인 것 같고요. 그래서 되도록 이면 올해 춤을 많이 추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태까지 하나의 스타일만을 고집했다면 앞으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다양하게 춤을 바라보고 춤을 춰보자. 그리고 다시 내 작품을 하면 좀 더 성숙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부족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쉽게 이야기 하면 제가 습득했던 것들이 이제 다 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습득한 것들을 새롭게 보이게 하는 것도 끝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신체적으로 새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활로를 찾는다면 얼마 전 홍승엽 선생님의 상당히 명상적이고 선적인 공연을 봤습니다. 정서적으로 약간은 동양적이고,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 춤이 매력이 있더라고요. 거칠고, 쥐어짜는 움직임은 아니지만 묘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동양 움직임의 원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을 기반으로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과 내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나름 명상 아닌 명상 호흡도 무용실에서 하고 있습니다.

명상(冥想)에 대해 배운 적이 있나요?
사실 외할아버지께서 산에서 도를 닦던 분이십니다. 그 영향으로 많을 받은 것 같고요, 할아버지께 어릴 때 한문, 붓글씨 등을 배우면서 정신적으로도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명상호흡도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셨습니다. 또 제가 장이 빠져서 그랬는지 어렸을 때부터 명상호흡을 강제로 시키셨습니다. 그런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서 매력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움직임을 다시 찾겠다는 거군요. 그동안의 작품을 보면 지금의 이야기는 의외네요.
선생님들께 받은 것, 그것들 다 소화시키고 떠나보낼 것 다 떠나보내고 이제 제 것이 다시 들어오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제대 후 임진호씨에게 기대되는 것이 많습니다. 춤을 본격적으로 추겠다고 하는 것도 좋은 자세로 보이구요. 다양한 스타일로 자신을 열어 놓겠다는 마음도 앞으로 새로운 것들을 보게 될 수 있을 거 같군요. 그렇다면 좀 더 도전적으로 본인이 추구하는 세계와 매력을 담아서 솔로 작품을 시도해 보기를 추천합니다. 자기 자신과 좀 더 대면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한 도전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감성에 근거한 자신의 언어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진지하고 외로운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를 빌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사실 저는 인터뷰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제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어서. 그래서 조심스럽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바뀔 수도 있으니 딱히 정리된 걸 얘기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리고 어려운 질문하면 어쩌나하고 걱정도 많이 했어요.(웃음) 좀 솔직하고 싶었는데 잘했나 모르겠네요.

솔직하고 생동감 넘치는 인터뷰였습니다. 무대에서 몸으로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2015.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