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SIDance 화제작_ 호드웍스(HODWORKS)의 (Review 1)
몸 움직임의 형질 고고인류학적 고역
채희완_춤비평가

 호드웍스의 <새벽>(10월17-18일, 서강대메리홀 대극장. 17일 관람)은 남녀가 처음부터 벗어놓고 한다더니 과연 그러했다. 마치 권투경기의 4각링 위에 두 쌍의 남녀가 올라가 벌거벗은 몸으로 서로 건드리고 놀고 싸우듯, 관중들로 4각벽을 둘러쳐 놓고 시작한다.
 그것이 일상공간과의 연결이라는 인식을 갖지 않도록 옷을 입고 등장하여 옷을 훌훌 벗는 것을 ‘보여주며’ 일을 벌이고는, 끝나서는 보는데서 옷을 주워 입는다. 마치 인간육체 행위의 동물적 특성을 경기로 보여주듯 격투기를 하듯이 연행행위(performance)로써 보여 주고 있음을 주지시켜 놓는다. 

 

 



 네 사람의 남녀는 짝을 지어 건드리기 시작한다. 현대춤에서 곧잘 보이는 신체접촉(body contact)의 즉흥적인 쌍방위적 반응으로 동작이 이루어진다. 밀고 당기기, 밀치고 덥치기, 파묻고 일으키고 기어들고 치켜들고 뛰고 붙잡고 뒹굴고, 사람 동작이 서로 만나서 할 수 있는 모든 동작들을 시도한다.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동작도 모두 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들 두 쌍의 움직임 사이는 인터액션(inter-action)이나 그러나 그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한 쌍의 움직임 사이에 어울림, 엎어침, 마주침, 밀어치기, 되치기, 대비, 대조, 대칭, 엇대칭, 비례, 균제, 균형, 앙상블, 점층도 없고, 역전, 반전도 없다. 두 쌍의 남녀 동작 사이에도 일체 관계 짓기를 배제한다(원주를 돌 듯 한 바퀴 크게 돌아 엉킨 채 윤무를 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결국 연행공간으로서 ‘틀’을 구성했다는, 일상공간과 연행 공간을 구획하는 한 방식으로 제시할 뿐이다).
 이들의 행위를 일체의 수식 없이 동사로만 나열할 수밖에 없도록 애써 힘들여 만들어 ‘동작한다’. 그야말로 인체 동작의 동물적 특성을, 일부러 기계적으로, 움직임끼리 ‘사물적’ 대응으로 일관한다.
 단순 생체 동작의 연속일 뿐. 미세한 숨소리조차 잘 들려오는 밀착 공간에서 오히려 출연행위자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도록 억제해 놓았다. 남녀의 접속이 가열해질수록 어쩔 수 없이 반응하는 생체 반응도 남녀의 귀볼이 이미 조금 붉어져 있을 뿐. 너덜거리는 남성 성기와 깊게 패인 여성 성기의 접촉에도 일체의 감정기복이나 감성적, 감각적 반응, 감응을 배제한 끝이어서. 남녀 접속의 강도가 짙어질수록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관중의 생체반응조차 저강도로 흐르도록 유도할 뿐이다.
 (다만 두 쌍 남녀의 육체 접속이 강도를 더하게 되면서 음향에 가까운 음악이 완만하게 그 절정에서 내려와 대단원의 굴곡을 줄 뿐, 이 음악 아닌 음악도 정서적 반응이나 감성적 인식을 배제하려는 듯, 세상의 온갖 소리를 모조리 불러놓은 총합이거나, 아니면, 없거나 다 거나 한 소리로만 구성된 것을 들려줄 따름이어서 차라리 접촉적 감응기제의 반응을 방해하도록 배치해 놓은 듯하다. 남녀접촉의 절정에 이른 순간조차도 마냥 ‘떨고 있음’의 진동일 뿐 환희나 묘연한 생명감마저 억제, 배제해 놓고 있는 것이다.)
 몸 자체에, 몸 움직임 자체에 아무런 정서, 정념, 욕망, 색채, 이성, 이념, 사유, 아우라를 배제한 몸, 몸 움직임이기에 어쩌면 인간 몸 움직임에 대한 원초적 형질인류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듯도 하다. 인간의 육체 움직임으로 그 어떤 것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일까. 생체 자체로서의 알몸(the naked)을 의미부여된 알몸(nude)으로 진화하는 것이 기존의 춤이라면, 이 작품은 거꾸로 의미부여된 몸을 생체 자체로서의 알몸으로 환원시켜 놓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의 몸 움직임의 원초를 찾아 동물 움직임, 벌레 움직임, 아메바 움직임, 무생물의 움직임을 흉내 내어 보는 우연성의 머스 커닝험의 작업이나 인간 움직임을 사물화한 얼윈 니콜라이의 물체춤과도 좀 다르다. 신체동작(Kinesis)을 어떤 정신적인 것(Metakinesis)으로 옮겨내보는 육체적 사유의 고역스런 작업과정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숫자 1에서 9까지의 아홉가지 숫자를 일체의 순서나 의미나 논리를 배제하고 나열해보는 숫자놀음(게임)이 처음에는 손쉽고 즐거운 듯하나 점차 숫자를 배열해 갈수록 그것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의미 없고 고되고 힘든 작업인 것인지는 금방 해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육체의 움직임사이에서도 남녀 간의 접속이야말로 지극히 인간적이고 신비로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에서 모든 의미 연관이나, 아름다움을 배제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고역스런 육체노동인가를 보여준다. 

 

 



 동작이 춤의 본질적 실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 현대춤의 메시지라면 이 작품은 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현대몸인식의 과제를 풀기위한 다양한 방법 중 하나로, 인체동작을 지극히 동물적으로 구사해본 것인가.  

 다만 동작 사이의 관계에서 일체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배제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동작을 만들어 이를 거듭 연습하고 수련하여 실연자로 하여금 격한 운동에 흘리는 땀조차 한방울 보이지 않도록 하고, 또 보는이로 하여금 어쩔 수 없는 생체반응조차 미미하게 하도록 몰고간 그 인간적인 노력이 절절하고 그렇게 한 안무의 솜씨가 또 특출하다.
 이 작품의 동작은, 고대 동양권문화에서 북치고 몸을 놀려 신명을 다해 지치도록 춤추는 ‘고무진신’의 경지라든가, “음아어이우”를 외면서 몸을 움직여 드디어 우주운행의 정기와 마주치는 동적 명상의 ‘영가무도’와는 이미 토대부터가 다르다. 동구와 북구의 전통, 사회주의체제의 경험, 아크로바틱한 체조적 몸놀림, 아리안적 체질 등 문화인류학적 배경을 달리하는 또다른 현대몸세계를 만난 것이 적잖이 충격이다.
 인간의 몸놀림을 통해 세상을 알고보는 것이 접근방식에서부터 다를 수 있음을 알게되는 것도 이 작품이 던지는 의의다. 또 그러고 보니 인간만이 그럴 뿐 동물이나 식물, 곤충, 미생물들이 모두 알몸으로, 옷을 입고 벗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듯 밤에서 낮으로 옮겨가는 시간의 길목, ‘새벽’은 변화의 조짐을 상징하는 말이다. 몸, 몸 움직임에 대한 새로운 문제설정을 통해 현대의 신체인류학적 과제를 풀어보려고 고역스런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이 작품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몸 생활이란 것이 막다른 어둔 골목길에서 깨놓고 동물적으로 몸놀림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의 안무자는 몸, 또는 몸움직임을 통해 문명전환의 ‘새벽’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인간의 몸생활의 ‘새벽’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다시 던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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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ance 화제작_ 호드웍스(HODWORKS)의 <새벽>(Review 2)



포르노그래피의 경계를 넘어선 벌거벗은 몸

김혜라_춤비평가


 힘이 들었다. 벌거벗은 몸으로 50분 동안 춤추는 무용수들을 지켜본 솔직한 심정이다.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폐막작으로 공연된 헝가리 무용단 호드웍스의 <새벽>(10월 17-18일, 서강대메리홀 대극장)은 호불호가 나뉠 만한 작품이다.
 현대예술에서 벗은 몸은 더 이상 도전적인 소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아직까지 사람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주목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이를 방증하듯 <새벽>은 언론과 일반인들의 관심(매표율)이 가장 높은 공연이었다.
 조명도 어떤 장치도 없이 새벽녘 어스름하게 피어나는 안개처럼 적막한 음악과 벌거벗은 몸이 이 무대의 전부이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등장한 네 명의 무용수들은 무대 각 모서리에 등장하자마자 허물을 벗듯 옷을 벗었다. 다져진 근육이 드러난 두 남자와 평범해 보이는 여자 무용수 둘은 서로 짝을 지어 밀고 당기는 관계를 시작했다. 힘의 완급조절을 천천히 그렇지만 정점을 향해 가듯 남녀의 움직임 템포는 크레셴도로 진행되었다. 서강대 메리홀 무대를 둘러싼 ㄷ자로 배치된 앞자리에서 적나라한 무용수들의 행위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다소 당황스러워 보였다.
 인간이 만나고 나누고 헤어지는 관계를 가장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행위로 구성한 <새벽>은 어떤 미사어구 없이 직설적인 성교 행위 과정을 보여주었다. 밀착된 남녀의 육체를 통한 강렬한 인상은 다른 동작들까지도 다양한 체위를 연상하게 만들지 않았을지..... 공연이 진행될수록 특정 몸의 부위에 애써 시선을 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담은 가시어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무용수들의 얼굴과 몸은 상기되어 열기가 가득하였지만 교감은 전혀 없이 동작의 변형을 연속적으로 무대 각 지면에서 실행할 뿐이었다. 땀으로 젖은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부딪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들의 행위가 점점 춤이라기보다는 힘겨운 노동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남녀 간 거친 동작 후 네 명의 무용수는 각자 자신의 몸에 익숙한 가벼운 움직임을 보여주었고 새벽녘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는 고요함과 기대가 교차하는 기운으로 무대는 추슬러졌다.
 굳이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라는 의문을 품으며 작품을 보던 필자는 마지막 즈음 잠깐이었지만 무용수들이 각자 가볍게 추스른 움직임에서 비로소 춤을 보았다. 둘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진 혼자서 뛰고 도는 몸은 작품 시작 전 벗은 몸과는 전혀 다른 이완된 몸이었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자 힘겨운 노동을 끝내고 쉬는 ‘자발적인 몸짓’ 그것이었다. 

 

 



 안무가는 포르노그래피적인 남녀 간 성교를 표방하였지만,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작품에서 리듬과 정서를 배제시켜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행위가 전혀 에로틱하지 않았고 그 무엇보다 “미적 대상으로서의 누드”를 완전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즉,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몸짓을 과감히 벗어 던진 것이다. 다시 말해 안무가는 관객들이 춤 혹은 예술대상을 바라볼 때 작동하는 개인적인 선입견이나 이미지로 해석해 내는 문화적 맥락을 없애버린 것이다.  

 호드웍스의 <새벽>은 현대예술을 일종의 포르노그래피라며 예술에서 보여줄 어떤 정서도 환상도 없다고 했던 장 보드리야의 말이 생각나게 하는 작품으로 19금 수위의 남녀 간 성행위로 바라보았던 시선에서 이것이 춤인지 아니면 포르노그래피를 표방한 행위예술인지 평가할 수 있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다만 현대무용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관객에게는 무용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공연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소화해 낸 무용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2014. 11.
사진제공_SIDance 201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