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다원적 관점에서 실험하고 모색하는 새로운 판이 펼쳐졌다. 주최측은 이를 ‘퍼포먼스 플랫폼’ 이라고 이름 붙였다. 컨템포러리 댄스, 필름, 사운드, 미디어 아트, 설치미술 등 매체와 형식의 실험적인 교류뿐 아니라 건축, 과학, 언어학 등 다양한 학제와의 개념적 융합을 바탕으로 예술의 표현성을 끊임없이 확장하고자 하는 페스티벌 프로젝트이다. 봄의 문턱에 예고없이 찾아온 이 흥미로운 현장을 <춤웹진>이 취재했다. (편집자 주)
현장에서 진보성과 대중성의 절충 가능성을 보았다
홍애령_<춤웹진> 수습기자
공연예술이란 무엇인가? 무대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이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신선한 판이 열렸다. 동시대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다원적인 관점에서 실험하고 모색하는 퍼포먼스 페스티벌 <러프컷 나잇>(Rough Cut Nights). 3월 25일부터 30일까지 디아츠앤코 주최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러프컷 나잇>은 컨템포러리 댄스, 필름, 사운드, 미디어 아트, 설치미술 등 매체와 형식의 실험적인 교류뿐 아니라 건축, 과학, 언어학 등 다양한 학제와의 개념적 융합을 바탕으로 총 7개의 신작을 1주일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프로젝트이다. 올해는 '극장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컨셉트로 '그라운드 제로 프로젝트', '인더비(In the B)', '아트 프로젝트 보라', '스페이스 셀' 등의 예술단체가 참여하였다. 하나 같이 극장의 공간 개념을 확장하고 재해석하며, 때로는 파괴함으로써 극장에서 발생하는 라이브 퍼포먼스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키고, 이를 통해 새로운 관극 태도를 제안하는 작품들이었다.
그라운드 제로 프로젝트의
3월 25일 공연한 ‘그라운드 제로 프로젝트’(안무 전혁진)는 인간을 향한 신의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를 선보였다. 무대 공간의 제약을 다양한 오브제들과 무대 미술을 활용하여 극복하였으며 이들이 이뤄내는 미장센, 그리고 몸의 기호학적 상징성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갈망을 그렸다. 중세 회화에서 발견되는 아이콘, 신체와 이미지의 배치 방식 등을 차용하면서, 고정된 평면 프레임에 존재하던 회화적 이미지를 시간 예술로 치환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미학을 도출해냈다. 무대 전면에는 물이 흐르고 무대 바닥은 곳곳이 뚫려 있어 한 순간 몸의 일부가 솟아오르거나 조각상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무대에는 전혁진의 춤이 낮은 음조의 음악과 함께 추어졌고,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는 하윤지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온갖 욕망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과 대조되는 차분한 음색의 노래였다. 무지몽매한 인간을 어여삐 여기어 그의 머리를 기꺼이 씻겨주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공연을 찾은 대학생 관객들은 “어떻게 저런 장치를 사용했는지 신기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고, 동료 무용수들은 “이런 시도가 처음은 아니지만 새롭기는 하다” “단순한 주제를 너무 깊게 다루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In the B의 <골드버그 머신, 제목을 입력하세요>
3월 27일 공연한 비주얼·퍼포밍 아트그룹 인더비의 <골드버그 머신_제목을 입력하세요>는 미국의 만화가 루브 골드버그(1883-1970)의 만화에 등장하는 각종 번잡한 장치에서 영감을 받은 독특한 형태의 퍼포먼스이다. 말 그대로 스크린 속 이미지, 무용수와 뮤지션, 배우들과 무대 위의 오브제들, 나아가 공연을 바라보는 관객까지 공연에 포함되어 암전이 되고 나면 서로 간에 암묵적으로 약속해왔던 질서를 파괴해나갔다.
관객은 숨죽이고 공연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박수를 치는 것, 무용수는 어둠을 뚫고 나와 춤을 추는 것, 뮤지션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악기를 두드리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 배우는 역할에서 주어진 대사를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씩 빗나갔다. 이처럼 당연하게 여겨 온 무대 위 규칙들에 대한 도발적인 반격과 함께, 공연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특유의 위트로 풀어냈다. 무용, 영화, 음악, 연극이 순차적으로 배치된 이 작품은 “제목을 입력하세요”라는 제목 그대로 특정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각 예술 장르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다소 통일감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어쩌면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공개되어있는 무대라는 공간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털어냈다. 그러나 얼마간 해석하기 힘들었던 전반부, 2명의 무용수들이 ‘볼레로’에 맞추어 춤을 추고 시각적인 기호들로 가득한 무대 바닥에서 형상을 만들어가는 장면, 무대 위에서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을 직접 촬영하는 장면, 뮤지션들의 즉흥 연주 등은 낱낱이 떨어져 무대 위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의 해체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의미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뮤지컬 배우 정영주의 자조적인 독백은 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영화 촬영장면에서 극장 밖으로 나간 배우가 데려온 무대 밖의 정영주는 무대 위에 앉아 자신의 무대 인생을 이야기했다. 관객석의 조명을 밝히고 자신을 아는 사람들을 색출하기도 하고, 관객의 표정을 살피기도 했다. 공연장에는 다양한 전공의 관객들이 존재했다. 공연이 끝나고 객석이 밝아지자, 관객들은 탄성을 내뱉었다. 무용을 전공했다는 한 대학생 관객은 “이런 공연이 무용 공연으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 새롭고 파격적인 시도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동료들과 함께 극장을 찾았다는 한 무대 설치가는 “무대 위에서의 여러 기자재들의 배열과 연결 매듬새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공연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실험성과 도전정신을 높이 샀다.
아트 프로젝트 보라의 <꼬리언어학>
3월 29일 공연한 아트 프로젝트 보라는 고양이의 꼬리 언어와 제스처의 상징체계를 움직임의 모티브로 하여 위선적인 교양주의와 언어의 해석적 오류를 풍자한 작품 <꼬리언어학>(안무 김보라)을 공연했다. 안무가 김보라는 “고양이의 꼬리 언어에 착안하여 선과 면, 또는 선과 도형의 교차와 같이 구조적이고 기호학적인 움직임들을 건축적인 맥락으로 재조합하고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다른 차원의 언어가 창조되는 것을 그려볼 생각이다”라고 기대치를 밝혔다. 댄스 퍼포먼스라는 시간적인 행위를 건축적인 맥락으로 설치하고 디자인해나가는 실험적 안무의 방식이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공연을 지켜본 춤비평가 김예림은 다음과 같이 촌평했다.
‘변이’시리즈의 연작 <꼬리언어학>은 김보라의 춤어휘 탐구에 대한 성과를 보여준 작품으로 <혼잣말>(2011)에서 시작된 움직임 해체가 <I'm Not There>(2013)에서 통제불가의 몸부림으로, <프랑켄슈타인>(2013)에서 절제되기 시작하여 이번 무대에 동물탐구로 드러난 것이다. 특히 등을 웅크리고 발끝으로 걷는 무용수의 실루엣에서 ‘고양이’라는 동기유발체가 설명되고, 4명의 출중한 무용수가 출품작 가운데 가장 정돈된 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한층 노련해진 안무력을 볼 수 있었다. 초록 꽃가루가 흰 플로어에 쌓이는 엔딩장면은 대형작품을 감당해내는 김보라의 스케일과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꼬리언어학>은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긴다. 움직임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공동정체성에 대한 의미와 소통의 이슈를 환기시킴”이라는 안무의도가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과, 협업 예술 특히 의상에 대한 강조와 배려가 마치 옷을 모시면서(?) 춤추는 것 같은 불편함으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협업요소로 밝혔던 ‘건축’의 실종은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꼬리언어학>은 최근 2년간 활발히 신작을 생산해내며 자신의 안무색을 찾아가는 김보라의 발전을 읽을 수 있는 무대였고, 여성 안무가의 부재가 아쉬운 무용단 LDP에 균형을 맞춰줄 인물로 김보라가 확실히 부각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스페이스 셀X 임샛별 최승윤의
3월 30일 공연한 아시아 유일의 핸드메이드 필름 랩 '스페이스 셀'은 필름 퍼포먼스와 안무, 연극적 요소, 사운드 등을 결합한 '익스펜디드 시네마(확장 영화)' 작업을 국내 최초로 극장 무대에서 선보였다. 공연장인 대학로 예술극장의 출입구는 3층에서 2층으로 변했고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었던 프로시니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관객들은 생소한 공간에서 전면과 죄우 측면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스크린의 영상들, 그리고 댄서의 춤과 마주쳤다. 무용수가 오브제를 활용한 움직임으로 변화를 줄 즈음, 이 생소한 공간에 익숙해 질 때 쯤 갑자기 왼편의 스크린이 사라지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영상과 춤의 조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작업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관객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다. 하나에서 두 개로 확장된 공간에 익숙해 질 즈음 이번에는 오른편 스크린이 사라졌다. 또 하나의 새로운 공간이 생겨났고 그것은 놀랍게도 극장의 객석이었다. 객석 군데군데 사람이 앉아있고 그들의 얼굴 위로 돌아가면서 탑 조명이 비쳐졌다. 극장 끝 벽은 흰 천으로 치장되어 있고 그곳을 향해 8대의 영사기가 거친 소리를 내면서 영상을 투사하고 있다. 관객들은 크게 3개의 다른 공간이 주는 각기 다른 콘셉트의 예술과 만났다. '스톱모션'이라는 대주제 아래 소개된 4개의 독립된 필름 작업은 일차원적인 평면 스크린을 넘어 퍼포먼스적 요소와의 연계를 시도했고, 공간에 대한 재해석, 영화에 대한 재체험을 유발하며,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독특한 경험을 맛보게 했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디아츠앤코의 송남은 대표는 "러프컷 나잇은 매년 다양한 형식과 태도의 라이브 퍼포먼스 작업들을 콜렉션하여 선보임으로써,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 정신을 고취시키고 표현의 다양성과 확장을 유도할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는 새로운 미적 경험과 관점을 제안하는 새로운 축제의 장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춤비평가 김예림은 “러프컷 나잇이 장르간의 융합이라는 트렌드를 반복하면서도 차별성을 갖는 이유는 타이틀에서 나타나듯 장담할 수 없는 장르간의 충돌이 거칠게(Rough), 미완되더라도 감수하겠는 도전정신에 있다. 뿐만 아니라 아트 디렉터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송남은 대표의 예술가 선별 감각과 조합 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이 기획이 ‘페스티벌 봄’의 진보성과 'SPAF'의 대중성을 절충하는 대형 프로그램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겼다”고 평했다. 그는 또 “2012년부터 ‘DanceLAB Seoul’ 등 독창적 기획력을 보여준 The Arts&Co.는 이번 러프컷 나잇을 통해 한국의 무용기획사들이 기존작품의 조합 또는 공연업무 대행에 그치고 있는 것과 달리 ‘제작시스템’을 표방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도 하나의 성과이다”라고 말했다. 기획자의 말대로 무대는 축제였다. 이토록 사람, 예술로 가득차 있는 무대라면 모든 이가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러프컷 나잇의 또다른 내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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