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국내 레지던스 환경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한 소소한 관찰
LIG아트홀과 흥은예술창작센터의 사례를 중식으로
최근 수년간의 공공 및 민간 영역에서 운영되는 예술지원 프로그램들을 살펴보자면 몇 가지 공통적인 기미를 느낄 수가 있는데, 그것은 지원 주체들이 자신의 관점이나 아이덴티티를 예전에 비해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지원사업의 내용과 방향 역시 보다 심화되거나 미학적으로 특정한 지향점을 향해 초점을 모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레지던스 사업의 경우에 있어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원사업의 유형이 작품 제작 지원(commissioning)이 아닌 레지던스 사업의 경우에는 지원주체가 결과물 즉, 작품이나 공연으로서의 완성을 기대하는 하는 것이 과도하거나 순수하지 않은 요구라는 의식도 없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의 미덕을 여행, 휴식, 상호교류, 연구 등을 가능하게 하는 예술인들을 위한 묵상 혹은 재충전(retreats)의 시기나 환경으로 한정 지어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프로젝트형 레지던스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발되면서 하나의 창작 툴(tool)로서 기능이 강화되는 듯하다. 최근의 경향을 살펴보자면, 과거 공연 분야의 레지던스 사업들이 결과물 공유를 대전제로 하되(작품 발표 준비단계에서 부터의 소통), 지원 대상의 사업 기간이 짧고(연내 수행 가능한 공연), 지원 방식은 일회적이며(공연/작품 1건), 단순한 방식 (제작경비 일부 및 공간 지원, 기본적인 홍보와 기록)이 주를 이루던데 반해, 최근에는 창작 과정 존중을 대전제로 하고(전 창작과정에 걸친 소통 및 공유), 입체적이고(전문인력, 하드웨어 시스템 전반, 멘토링, 홍보, 기록) 장기적인(수개월~2년) 지원 방식이 연구 및 시도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필자는 이번 포럼에서는 국내 레지던스 현황 전반을 소개한다는 무리한 미션은 겸허히 사양하고 앞서 언급한 경향을 명확한 특징으로 드러내고 있는 국내 2개 예술지원 주체들의 프로젝트형 레지던스 운영 사례를 간단히 소개함으로써 막연하던 논점들이 구체화되는 데에 소용이 되기를 바래본다. 소개하는 대상은 LIG아트홀과 홍은예술창작센터이며 이 두 곳은 각기 예술감독과 자문위원으로서 일해 온 경험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소상하게 소개하는 것이 가능하며 변화해가고 있는 국내 레지던스 환경의 한 부분으로서 상당히 집약적인 컨셉의 지원 프로그램으로서 소개할만한 요소들이 충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LIG아트홀과 홍은예술창작센터는 두어 가지 상이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가장 본질적인 차이점은 조직의 성격이 각기 민간(private sector)과 공공(public sector)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과 보유한 공간의 기능 역시 각기 극장과 레지던스 전문 공간이라는 사실인데, 이 같은 필수적 전제들로 인해 서비스(예술지원)의 목적과 대상은 역시 사뭇 다르다. 이들 중 처음으로 언급한 ‘조직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의사결정 과정의 환경과 생리가 다르다는 점만 짚어두면 충분할 듯하다. 실무자들 입장에서야 피부로 절감하는 엄청난 차이와 각각의 장단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부에서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디자인하는 담당자가 어떤 사람들이냐의 문제보다 프로그램에 더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특징은 연결된 사항인데, 공간의 태생적 성격과 최우선적 수혜자에 대한 입장과 관점의 차이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한정하여 보더라도 ‘누구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관점과 우선순위에 있어서 적지 않은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LIG아트홀은 극장이라는 속성상 다양한 층위의 관객들을 위한 프로그래밍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지만 젊은 예술인 지원이라는 설립 미션을 충실하게 수행해가는 과정이자 방법으로서 떠오르는 신예 그룹에서 독보적인 중견급에 이르는 예술인들이 선보이는 동시대 공연예술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여주려는 크고 작은 시도를 해왔다. 이 과정에서 예술인들에게 창작과정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예술인 인큐베이팅’의 기능과 ‘차별적인 프로그램 개발과 공급을 위한 효율적 제작 방법’으로서 아티스트-인-레지던시(artist-in-residence) 포맷을 적극적으로 운영해왔다. 물론 두 가지 목적이 혼재되는 경우가 현장에서의 일반적 경향인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LIG아트홀 레지던스 프로그램
2006년에 출범한 LIG아트홀은 2012년까지 연간 20~30개의 기획프로그램을 통해 약 40~50건 이상의 공연물을 지원(commissioning)/초청(presenting)/제작(producing)해 왔다. 연간 공연프로그램의 주요 구성은 극장이 콘셉트 작업을 주도하게 되는 다양한 기획 공연과 전적으로 예술인들 스스로가 주도하는 3개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균형과 대조를 이루며 운영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LIG아트홀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은 공연 분야의 일반적 관습이기도 한 ‘단기적 창작 기간’과 일회적 지원 방식의 한계’와 그로 인한 ‘공연제작 방식의 일반적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나아가 ‘극장 자체가 보여주는(showing) 곳만이 아닌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making) 예술 창작 플랫폼이 되고자’ 했던 의도가 담겨있었다.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LIG아트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개괄적으로 소개해본다.
LIG아트홀이 운영하는 프로젝트형 레지던스의 지원내용은 해당 기간 동안의 참여예술인이 스스로 수립한 공연 및 연구 프로젝트에 대하여 제작비 및 사전 연구 진행비 제공과 더불어 공연장 및 연습실 지원과 기술지원이 함께 이루어지며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공연, 오픈 스튜디오 등의 주요 활동은 극장의 연간 프로그램으로서 기획과 홍보, 아카이빙이 이루어지게 된다. 단, 공간 지원의 경우, 일상적 연습 보다는 기술적 연구나 실험 등을 포함하는 명확한 소 목표를 가진 연구나 실험에 대해 우선적으로 제공하며, 필요 시 조명, 음향, 영상 등의 장비 사용과 더불어 극장 기술 스텝들의 협력과 멘토링이 함께 이루어진다. 참여작가를 선정하는 방법은 신예예술인을 지원대상으로 하는 레지던스-I만이 공모방식으로 운영되며 레지던스-L과 레지던스-G의 경우는 극장의 자체적인 리서치와 큐레이팅을 통해 후보예술인들을 정한 후 개별적인 접촉과 협의를 통해 최종적인 대상을 확정하게 된다. 선정되는 인원수는 L은 3명, G는 1명이며 예술인 입장에서는 선정이 확정된 후에 수시로 극장과 소통하며 프로젝트 계획서를 차분히 준비하면 된다. 즉, 이들 레지던스의 운영 방침은 ‘프로젝트형’이지만 선정방식은 철저히 작가 중심인 것이다.
각 참여 작가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세운 프로젝트 계획에 따라 연간 평균 1~2개의 작품과 1회 이상의 오픈 스튜디오를 수행하는 것 외에는 별도의 의무사항은 없으며, 사전에 심도 있는 구상을 한 참가자일수록 해당 기간 동안 극장에서의 레지던스가 가질 수 있는 유익함을 최대로 확장하여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는 것이 중요한데, 예컨대 레지던스-L의 경우는 레지던스를 시작하기 1년 전에, 레지던스-G의 경우도 전년도 하반기 중에는 이미 당사자와 논의와 결정을 마치기 때문에 사전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레지던스_L](Long-term Residence)
국내 중견급 공연예술인들을 위한 2년제 레지던스로 2010년에 시작된 프로그램이며 그 대상이 무용분야만으로 한정되어 있지는 않다.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적 지향점을 드러내며 독자적인 창작 활동을 펼쳐가고 있는 앞서가는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며, 예술단체가 아닌 개별 예술인의 다양한 창작 방식을 지지하고, 각 기간 3명 이내로 선정한다. ‘선별된 예술인들을 대상으로(집중성), 약 2년간(장기성), 각 예술인의 계획에 따라(자기주도성) 제작 과정 전반을 지원하는’것을 주요한 운영 원칙으로 삼는다. 2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해당 작가의 의식이나 작품 경향의 흐름 등을 추적하여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가 인터뷰 및 외부 전문가들의 종합 리뷰가 포함된 도록도 제작하여 제공한다.
[레지던스_I](Residence for Incubating)
젊은 무용인들을 위한 1년제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으로 2006년에 시작되었으며, 워크숍, 공동작업, 연구 및 공연 활동 등을 지원한다. 매년 3명~7명이 공모를 통하여 선정되며 레지던스_I를 위해서는 상시적으로 사용가능한 공용 연습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레지던스_G](Global Collaboration Residence)
글로벌 공동창작 레지던스 프로그램으로 선정된 국내예술인 1인이 스스로 선택한 해외예술인과 파트너가 되어 2~3개월 간의 공동 연구 작업을 거쳐 작품을 발표하며 최적의 파트너쉽 구성과 예술인들의 개별 일정 등을 고려하여 비정기적으로 운영된다.
홍은예술창작센터 입주예술가 창작지원 프로그램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열한 번째 창작공간으로 2011년 5월에 개관한 홍은예술창작센터는 무용예술을 중심으로 한 장르 간 예술 협업 및 창작지원을 미션으로 삼고 있는 곳이다. 무용 장르의 다양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시설 운영과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포함한 다양한 사업의 형태 등을 전문적으로 디자인해 갈만한 곳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국내 현황을 보자면 홍은예술창작센터가 차별적 지향점을 제시하며 수행해가고 있는 프로그램들의 추이를 장기간 주목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창작공간이며 도심 내 주거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 홍은예술창작센터의 역할은 예술가 지원에만 머무르지는 않으며 시민과 예술의 사회적 접점을 만들어내기 위한 별도의 크고 작은 사업들까지 포괄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시설 현황 역시 전문적인 레지던시 공간으로서 부족함이 없는데, 입주예술가 스튜디오 12개, 무용연습실 3개,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창작실 1개가 있으며 그 외에 세미나실, 갤러리, 북 카페 등의 부대적인 시설도 갖추어져 있는 상당히 훌륭한 도시형 레지던스 공간을 보유하고 있다. 주로 6개월과 1년 단위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상시 운영하며 기간별로 공모와 심사를 거쳐 입주 예술인들을 확정하는데, 공모대상은 무용예술과 아울러 무용과 연계 가능한 시각예술분야 전반(영상, 사진 등)이 해당된다. 공연을 위한 작품 창작만이 아니라 커뮤니티 아츠의 관점에서 지역주민 대상 프로그램을 연구 및 수행하고자 계획하는 예술인들의 경우도 별도의 지원이 가능하다. 입주예술가들에게 제공되는 다양하고 실질적인 지원의 내용은 공간과 제작비 외에도 해외교류나 협업을 위한 업무 지원, 전문가 멘토링, 아카이빙, 홍보 및 리뷰, 지속적 네트워킹 운영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레지던스 프로그램 포맷에 더하여 2013년에는 새로운 프로그램 ‘닻(dot)’이 추가되었다. 서울문화재단 유망예술지원사업 중 ‘무용’ 부분을 홍은예술창작센터에서 특화하여 공모, 선정,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무용의 닻을 내리다’와 ‘극장을 벗어난 무용(dance off-theatre)’의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보다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무용을 포용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지원내용을 살펴보면 작가가 체류를 위한 입주는 하지 않되 창작 과정 중 연습공간은 물론 창작활동에 필요한 기획, 공간, 멘토링, 홍보 등 창작과 유통의 전 과정을 지원하고 공연 종료 후 세심한 토의와 평가까지 더해지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공공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지원체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수있는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는 프로그램이라 여겨진다.
이 2013년 신규 프로그램의 주요한 특징은 ‘극장을 벗어난(off-theatre) 개념의 무용 창작과 발표가 가능한 무용예술가들의 기획안이 중심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해당 무용프로젝트가 ‘벗어나는(off)’대상이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기존의 창작지원 환경에서는 감싸 안을 수 없었던 새로운 창작 흐름에 각별하고 집중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작품 발상의 전제, 예술가의 태도와 관점, 작품이 구현되어가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종 관습들과 그것의 현실적 편이성 등 많은 요소들을 본질적으로 의심하면서 공연의 요소와 언어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새롭게 구축하고자 하는 경향의 예술인들에게 있어서 이 프로그램은 매우 비정형적이고 탄성적인 그릇이 되어 줄 수 있을 듯하다.
앞의 두 사례가 보여주는 적극적인 예술지원 방식은 예술인들이 보다 열린 창작환경 속에서 예술적 지향점을 규명해나갈 수 있도록 북돋움으로써 향후 유망 예술가들의 예술적 성장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이러한 사례들을 포함한 다양한 참고자료들이 관찰되고 새로운 연구로 이어진다면 무척 요긴하고 흥미로운 창작플랫폼을 구축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 본다. 바람직한 예술지원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것은 비용, 시간과 더불어 운영주체의 전문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것이다. LIG아트홀과 홍은예술창작센터는 이 균형이 비교적 잘 이루어지는 상태로 시스템을 발전시킨 경우일 수 있는데 이들 외에도 예술지원과 관련하여 더욱 다양한 방식과 층위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들이 공공과 민간 영역에서 각기 창조적으로 시도되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정책과 제도의 속도가 창작현장의 속도를 앞지르는 것은 매우 유의해야 할 현상이지만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와 같은 신뢰할만한 파트너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듯하다. 물론 서두에 언급한 것과 같이 제도나 프로그램의 운영주체가 자신의 의도나 존재감을 보다 더 전면에 드러내려는 경향이 과도기적인 것인지, 바람직한지 등의 여부는 쉽사리 진단할 수 없겠지만 모든 순기능과 역기능들을 고려한 상태에서의 대안으로 결국 예술지원 제도 역시 예술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종으로 횡으로 보다 다양하게 분화되어야 할 것이라는 다소 막연한 의견을 제시하며 부족한 원고를 마무리한다.
자료제공_서울세계무용축제
조성주는 그간 무용가, 기획자, 예술행정가 등의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이후의 활동으로는 동시대 예술현상의 범주와 사회문화적 맥락을 쓸만한 방식으로 엮어내는 데에 뜻을 두고 있다.(재)LIG문화재단 예술감독과 공연사업부장, 중앙대학교 겸임교수를 거쳐 극단 툴의 상임안무가, 댄스컴퍼니 조박 공동대표, SIDance'98 사무차장으로 활동했다. 현배 바누 인터미디어 대표이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분야 책임심의위원과 홍은예술창작센터 자문위원을 밭고 있다.